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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불편한 진실
강명관
푸른역사 2026.06.15.
베스트
역사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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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1장] 쟁점과 시각
1. 창제를 둘러싼 쟁점
2. 다른 시각

[2장] 세종의 한글 창제 의도, 〈어제서문〉
1. 〈어제서문〉에 대한 새로운 독해
1-한글 창제 의도에 대한 두 가지 주장
2-〈어제서문〉에 담긴 세종의 한글 창제 의도 분석
2‐1 어제훈민정음서御製訓民正音序
2‐2 국지어음國之語音, 이호중국異乎中國, 여문자불상유통與文字不相流通
2‐3 고우민유소욕언故愚民有所欲言,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2‐4 여위차민연予爲此憫然
2‐5 신제이십팔자新制二十八字
2‐6 욕사인인이습편어일용이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2. 세종의 세 가지 의도
1-백성을 가르치겠다
2-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어리석은 백성’에게 표현 수단(한글)을 주겠다
3-일용日用에 편리함을 느끼게 해주겠다

[3장] 민중과 한글
1. 말하고자 하는, 말할 수 없는 민중
1-말하고자 하는, 문자 없는 민중
1‐1 주체로서의 민중
1‐2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
2-말할 수 없는 민중에게 주어진 문자
2‐1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조관파견법朝官派遣法 ·부민 고소에 대한 처벌의 강화 ·부민고소법의 제한적 복구· 제한적 부민 고소법의 폐기
2‐2 쓸 수 없는 한글
2. 일용, 매일의 한글 사용은 가능했는가
1-‘쉽게 익히는’ 교육과정의 부재
2-한글의 사용례使用例
3-민중의 글쓰기가 있었을까
3. 훈민, 복종과 세뇌
1-저항하는 민중
2-‘훈민’이라는 발상
3-훈민의 언해본 텍스트들
3‐1 『삼강행실』과 축약 언해본 『삼강행실』
·『삼강행실』 ·『삼강행실』 축약 언해본
3‐2 언해본 『소학』과 축약 언해본 『삼강행실』의 대량 보급
3‐3 새 훈민서, 『이륜행실二倫行實』, 『여씨향약呂氏鄕約』, 『정속편正俗篇』, 『경민편警民編』
·『이륜행실』 ·『여씨향약』 ·『정속편』 ·『경민편』
3‐4 언해본 훈민 텍스트의 보급 문제

[4장] 사족-지배계급의 한글 사용
1. 한자-한문을 돕는 한글의 범용성
2. 외국어 학습서의 언해
3. 언해불경諺解佛經
4. 문학서 언해
5. 실용서 언해
1-농서農書
2-의서醫書
3-특수한 의서
6. 경서經書 언해
1-아동용 한자 교과서
2-경서의 구결과 언해

[5장] 불편한 진실
1. 따져 물어야 할 문제들
1-말하고자 하는 민중
2-일상에서의 사용
3-훈민
4-사족의 한글 사용
2. 불편한 진실

보론
1. 한국 문법으로 읽은 〈어제서문〉
2. 부민고소법의 이후 행방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1

姜明官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 한문학을 현대의 텍스트로 생생히 살려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그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후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활동했던 여항인들의 역사적 실체와 그들의 문학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 한문학의 연구 지평을 넓힌 역저(『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문화일보)". "풍속사, 사회사, 음악사, 미술사를 포괄하는 방대한 지적 편력을 담아 내고 있다. 정작 문학 텍스트 자체에 논의를 거의 할애하지 않았는데도, 논의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 한문학을 현대의 텍스트로 생생히 살려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그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후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활동했던 여항인들의 역사적 실체와 그들의 문학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 한문학의 연구 지평을 넓힌 역저(『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문화일보)". "풍속사, 사회사, 음악사, 미술사를 포괄하는 방대한 지적 편력을 담아 내고 있다. 정작 문학 텍스트 자체에 논의를 거의 할애하지 않았는데도, 논의 전개 과정에서 그 시대와 함께 문학 텍스트의 의미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한양대 정민)." 등의 호평을 받았다.

광범한 지적 편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풍속사 읽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문학을 쉽게 풀이한 저서들을 다양하게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 시대에 지식이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어 유통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어떻게 설치되어 인간의 사유와 행위를 결정하는가, 그리하여 어떤 인간형이 탄생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공부 중이다. 최근작 『열녀의 탄생』과 연계하여, 조선 시대 남성-양반이 그들의 에토스를 만들기 위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의식화했던가,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성다움, 양반다움으로 남성-양반은 여성, 백성들과 구별 짓고, 우월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면면을 연구할 계획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조선의 뒷골목 풍경』,『근대 계몽기 시가 자료집』,『안쪽과 바깥쪽』,『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농압잡지평석』,『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열녀의 탄생』, 『시비是非를 던지다』,『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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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6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04쪽 | 586g | 152*224*20mm
ISBN13
9791156123415

책 속으로

1443년 12월로부터 2년 9개월 뒤 세종의 〈어제서문〉과 〈예의例義〉, 〈해례〉, 〈서문〉으로 구성된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세종이 1443년 12월 한글을 창제하고 2개월 16일 뒤 (1444년 2월 16일) 최항·박팽년·신숙주·이선로·이개·강희안 등에게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세자(문종)·진양대군(=수양대군)·안평대군에게 그 일을 맡아보게 했다. 최만리 등의 언문 반대 상소는 이로부터 4일 뒤에 나왔다.
---p.24

한글 창제 이후 국가가 간행한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역해』, 언해 불경과 같은 서적들의 존재는, 민중을 위해 만들었다는 한글이 사실상 지배층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할 터이다.…세종과 왕실이 만든 책들은 이들이 읽을 책이 아니었다.
---p.31

세종은 1446년 3월 1일부터 함길도 4진四鎭의 백성이 여진족 땅으로 달아나는 경우 참형에 처하기로 결정한다.…이 도망하는 무리는 강제로 이주된 사민徙民이었다. 이들이 계속 여진족 땅으로 달아난 것은, 4진에서 사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 참형법을 알지 못할까 싶어 1447년 2월 말까지 수령을 통해 알리는 기간을 두고자 한 것이다.
---p.84

『세종실록』은 세종이 허조 등의 요청을 ‘그대로 따랐다[從之]’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이로써 부민고소법은 폐지되었고, 정반대의 ‘부민고소금지법’이 제정되었다.…부민고소법의 폐기, 부민고소금지법의 제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말할 수 있는 통로는 사실상 막히게 되었다. 이는 〈어제서문〉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것 아닌가?
---p.96

세종은 이 3년 사이에 급히 서리 10명을 선발해 한글을 가르쳤고(1444년 2월 20일 이전),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할 것을 명했다(1444년 2월 16일). 『용비어천가』의 한글 가사가 완성되었다(1445년 4월 5일).…세종은 『훈민정음』 완성 직후 녹사와 서리의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넣었고(1446년 12월 26일), 함길도 출신의 하급 관료를 뽑을 때도 훈민정음을 시험 보도록 했다(1447년 4월 20일).
---p.112

이계전은 당시 민의 상황을 “살갗을 벗기고 뼈를 바수더라도 고소할 데가 없다”고 표현했다. 같은 해 6월 18일 세종은 이계전 등의 상소에 대해 답하면서 부민고소법을 폐기하고 조관을 보냈지만 폐단이 커서 역시 그만두었던 역사를 간단히 말한 뒤 행대감찰行臺監察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p.114

지방 거주민의 수령 고소와 관련한 자료에서 언문이 언급되는 예는 찾을 수 없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백성이 관부官府에 제출하는 문서의 양식을 모은 책 『유서필지儒胥必知』 역시 언문이 아닌 한문과 이두를 사용하고 있다. 한글로 된 서식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예외적인 것일 터이다.
---p.118

한글이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는 1446년으로부터 39년이 지난 뒤였다. 1485년(성종 16) 7월 17일 서울 시전市廛 이전이 추진되자, 이전에 반대하는 시전 상인들이 호조판서와 참판을 비난하는 언문서諺文書를 판서 이덕량 동생의 집에 던졌다.…언문서 작성자를 찾기 위해 79명이나 잡아들였다. 이 중 언문을 이해하는 사람은 16명이었다.
---p.118

1504년(연산 10) 7월 4일 성명 미상의 인물이 연산군의 학정을 비난하는 언문 익명서를 신수영(연산군의 처남)의 집에 던져 넣었다. 연산군은 언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서울 시내에서 익명서 작성자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p.119

세종이 녹사와 서리의 선발 과목에 언문을 넣은 것은 뒷날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다. 녹사의 선발 과목에는 강講·제술製述·서산書算이있는데, 서산의 세부 과목이 ‘해서楷書·언문諺文·행산行算으로 구성되었다. 서리의 과목은 해서와 행산으로 언문이 없어졌다.…녹사의 시험 과목에 언문이 남았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행정 실무를 맡고 민중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은 쪽은 당연히 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은 서리의 선발 시험에서 언문을 빼는 쪽을 택했다.
---p.123

기록상 최초로 한글을 사용하여 개인의 생각을 적어낸 사람은 세종일 것이다. 1446년 10월 9일 사헌부 집의執義 정창손이 불사佛事를 정지할 것을 상소하자, 세종은 대간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여준다.
---p.127

혜빈 이후 비빈이 언문을 사용한 예는 『실록』을 위시한 문헌에 적지 않게 실려있다. 예컨대 정희왕후는 1458년 세조에게 김분을 용서할 것을 요청했을 때에도, 1476년 수렴청정을 그만두려고 했을 때에도 모두 언문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p.130

궁중의 비빈과 궁녀들이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한글이 궁중에서 만들어지고 한글 사용 확대를 목적으로 설치된 정음청正音廳[언문청]이 궁중에 있었던 데 기인할 것이다.
---p.130

유희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16세기 후반 곧 임진왜란의 발발 어림까지 사족 남성이 언문을 사용하는 경우는 다수 발견된다. 유진柳袗(1582~1635)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란한 경험을 뒷날 언문으로 써서 집안 부녀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강항姜沆은 일본에서 수집한 정보를 언서諺書로 써서 조선으로 보냈다.
---p.143

노비가 언문을 해득한 경우도 발견된다. 이항복이 전한 임피의 재인 아들 박춘朴春이 그런 경우다. 박춘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정유재란 때 왜군의 장수로 선봉에 선다. 그는 일부러 전라도 임피로 가기를 원해 임피의 옛집을 찾았다. 거기서 그는 언서諺書로 주춧돌에 자신의 사연을 길게 남긴다.
---p.143

한글로의 글쓰기가 원칙으로 선언된 것은 1894년 이후다. 갑오경장 이후에도 한문이 아닌 한글로의 글쓰기는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이는 국한문혼용체라는 과도기적 문체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순수한 한글로서의 글쓰기는 1948년 해방 이후 학교에서 국어 교육이 시작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을 것이다.
---p.148

성종 12년 3월 24일, 성종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는 동방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근자에는 사족의 부녀 중에도 혹 실행하는 자가 있으니 내 심히 걱정스럽다. 언문으로 된 『삼강행실』의 열녀도烈女圖 약간 질을 인쇄하여 서울의 오부와 제도에 반사하여, 시골 마을의 부녀자가 다 강습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아마도 풍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p.183

각 곳에 10부를 보급한다 해도 5,000부에 가까웠다. 이 책들이 민중의 손에 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책들은 대부분 사족의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훈민을 바랐지만 실제 훈민은 불가능했다.
---p.186

찬집청撰集廳에서 9개월에 걸쳐 번역한 『소학』 곧 『번역소학』은 이듬해인 1518년 7월 1,300부를 인쇄해 조관朝官과 종친 중 배울 만한 사람에게 두루 내려보냈다.
---p.189
-김안국은 〈증손 여씨향약〉을 언해하면서 이 조직이 유향소의 좌수座首·별감別監·유사有司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향소는 품관의 향촌 지배, 곧 향촌 사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사족의 의도가 담긴 산물이었다.
---p.200

『경민편』에서 그는 자신의 민중에 대한 생각, 곧 지배계급의 민중에 대한 생각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김정국에 의하면, 민중은 ‘눈멀고 귀먹어 그저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오직 입고 먹는 것에만 매달려 법을 범하는 줄도 모르고 죄의 함정에 빠지는 존재’다.…김정국은 무지한 민중이 죄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13개 항목의 가혹한 처벌법을 미리 친절하게 알려주겠노라고 나섰다.
---p.208

책판을 제작하고 처음 찍은 책들은 제작을 주도한 수령과 그의 친지들, 지역의 사족들 몫이었을 것이다. 그다음은 ‘사인’ 곧 개인이 책판이 있는 곳을 찾아와 책을 찍어갈 것이라 기대했으리라. 하지만 이것이 보통의 농민에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p.216

한글 창제 이후 15세기 말까지 한글을 사용한 문헌을 ‘초기 한글 문헌’이라고 하는데, 1446년 『훈민정음』(해례본)부터 1497년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까지 약 40종에 이른다. 이 중 불경언해는 『석보상절』, 『월인석보』를 비롯하여 『육조단경언해』까지 20여 종으로, 전체 한글 문헌의 약 6할에 해당한다.
---p.246
불경 언해는 불경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 승려들만이 아니라 ‘장사꾼과 부엌의 아낙네’까지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언해는 민중을 위해 행한 조치가 아니라, 민중‘까지’ 의식한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언해 불경을 앞에 두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p.254

『농서』와 『잠서』는 김안국에 의해 최초로 언해되었다. 그러나 『언해농서』와 『언해잠서』는 〈팔도책판목록〉에도 보이지 않고, 김안국 스스로 개간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간행되지 않은 듯하다. 결국 언해본 『농서』와 『잠서』는 민중들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p.259

최세진崔世珍(1468~1542)은 1527년…현실생활과 밀착한 한자 3,360자에 뜻과 음, 간단한 주해(한문)를 부기한 『훈몽자회訓蒙字會』(상·중·하)를 간행했다. 그는 상권 서두의 〈범례〉 끝부분‘언문자모諺文字母’에서 당시 통용되던 한글 사용법에 대해 간단히 요약했는데, 특히 한글의 자모에 대해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다.
---p.269

사서 언해 작업은 1447년부터 시작되었다.…세종의 명으로 ‘언자諺字’로 번역한 뒤 책판을 만들어 간행하고 ‘언해’라고 이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언해본 또한 전하지 않는다.
---p.275

-1586년 완성된 『언해소학』 수백 부가 인쇄되었다. 1590년(선조 23)에는 『대학언해』, 『중용언해』, 『논어언해』, 『맹자언해』, 『효경언해』가 간행되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서 언해 출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p.282

구결을 달고 언해하는 작업은 세종-세조때 시작되었으나 완성된 것은 선조 대에 와서였다.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는, 선조 시기 교정청본 경서 언해본이야말로 한글 창제가 사족에게 끼친 최고의 혜택일 것이다.

---p.302

출판사 리뷰

‘어리석은 백성’은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우수한 한글을 농민과 노비가 사용했는지, 사용했다면 어떻게 사용했는지 묻지 않는다. 세종의 거룩한 의도만 확인했을 뿐, 세종이 가르치려 한 ‘우민愚民’에 대해선 잊고 지나친다. 그러나 세종이 말한 ‘어리석은 백성’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고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노비였다. 또 여성이었다. 일 년 열두 달 노동에 시달리는 농민과 노비, 여성의 일상에 읽기와 쓰기가 들어갈 공간은 그다지 없었다. 게다가 책은 귀했고, 종이는 비쌌다. 붓과 먹의 값도 만만치 않았다. ‘어리석은 백성’이 노동에 시달리면서 값비싼 도구를 사서 한글을 익혀 써야 할 여유도 이유가 정말 있었는지, 지은이는 궁금해 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할 기회마저 막혔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백성이 이용할 문자를 주겠다는 것이 세종이 〈어제서문〉에서 밝힌 한글 창제의 으뜸 목적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세종은 백성의 언로를 막았다. 백성들이 하려고 했던 ‘말’의 대부분은, 지방 수령과의 갈등에서 배태되었다. 그런데 한글 창제 이전인 1419년 예조판서 허조의 요청을 받아들여 부민이 지방 관장을 고소할 수 있도록 한 ‘부민고소법’을 폐지하고 ‘부민고소금지법’을 제정했다. 이후 종성 절제사 김후의 부정을 계기로 사간원에서 부민고소법의 부활을 상소하기도 했지만 원래의 부민고소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은이는 민중의 입을 틀어막고 수탈의 자의성을 보장한 이 조치는 〈어제서문〉에 담긴 애민愛民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보았다. 우리가 아는 상식과도 모순되는 것은 물론이다.

한글 보급을 위한 제도적 노력도 미미했다
세종은 1443년 12월 한글을 창제한 뒤 급히 서리 10명을 선발해 한글을 가르쳤다. 어떤 관부의 서리인지, 어떤 목적이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것이 한글에 대한 최초의 교육 사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한글의 존재와 사용법을 민중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지만 지은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어떤 제도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글 보급을 위해선 사용법을 담은 『훈민정음』(해례본)을 많이 인쇄해서 민중이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배포하는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의 인간印刊에 관해서 알려진 사실이 전혀 없다. 『훈민정음』(해례본)의 책판에 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이는 『훈민정음』(해례본)이 실제로는 광범위한 보급을 위해 인쇄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지은이는 보았다. 귀한 뜻으로 만든 한글이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지배질서 강화를 위해 복종을 가르친 ‘훈민’
왕과 궁궐을 중심으로 한글 문서가 작성되긴 했다. 경서經書는 물론 불경과 농서農書, 의서醫書 등 다양한 실용서도 언해도 이뤄졌다. 한데 그 목적은 ‘훈민訓民’에 있었다. “비록 백성들 모두가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겠지만, 별도로 큰 죄의 조문만이라도 뽑아서 이문吏文으로 번역하고 민간에게 반포해 우부우부愚夫愚婦들이 죄를 알고 피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한글 창제의 의도를 짐작케 하는 1432년 세종의 말이다.
‘가르치려는 백성’은 ‘말하고자 하는 백성’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 전자에서 백성은 주체가 되지만, 후자에서 백성은 대상이 된다. 훈민의 내용은 지배질서에 대한 ‘윤리적 의무로서의 복종’이었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을 담은 ‘열녀烈女’를 발명해낸 『삼강행실』이나 『소학』 언해본이 꾸준히 간행된 예가 대표적이다.

‘어리석은 백성’보다 사족 계급이 덕 봤다
지은이가 깨뜨리려 한 ‘한글 신화’ 중 가장 뜻밖인 것은 민중보다 사족들이 한글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동기 사족에게 한자를 가르칠 때 한글은 대단히 유용한 도구였다. 1586년 완성된 『언해소학』 수백 부가 인쇄되었다. 나아가 경서의 언해야말로 사족들이 한글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경서에 구결을 달고 언해하는 작업은 세종-세조 때 시작되었으나 완성된 것은 선조 대에 와서였다. 경서를 읽는 사족이 ‘어리석은 백성’일 수는 없다. 결국 한글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들은 민중이 아닌 지배계급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한글의 창제 원리나 과학적 우수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종의 애민정신에 토를 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나친 자기 긍정의 내셔널리즘에서 벗어나 세종과 한글에 대한 객과적 이해를 촉구할 따름이다. 지은이는 세종은 지배계급의 대표자였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이는 아마도 이는 한글에 관한 가장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지나갔던 흥미로운 사실을 여럿 알려주기에, 아는 기쁨과 더불어 읽는 재미가 각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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