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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브노에서 아침을
빗소리 석별-아무도 모르게 2 라오까이 라이까이-가을이 오면 감귤모텔 부흥회 복숭아를 씹으며 아무도 모르게 가를 두고 해설|연착과 사후 · 조형래 발문|서서히 내게 오는 것 · 고명재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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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역배우였던 아버지는 그 영화에서 여섯 번 죽었다. 맨 처음 조선인 지주에게 항의하다가 멍석말이로 맞아 죽었고, 그다음에는 독립군으로 나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순사가 휘두른 칼에 두 번, 총에 한 번, 마지막엔 의병 전투에서 이미 죽어 있는 역할이었다. 여섯 번이나 등장하는 동안 관객 중 누구도 그 모두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가 등장할 때마다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 p.9~10 빗줄기가 거세지자, 그는 그제야 우중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그는 마당에서부터 젖은 옷을 모두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그러다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알몸으로 세찬 비를 맞았다. 그의 굽은 등과 깡마른 몸이 어둠 속에서 희부옇게 드러났다. --- p.54 밤에는 낮의 일을 떠올리고 낮에는 지난밤의 시간을 되새긴다.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매일 다시 채워지고 있다. 반복적이지만 반복적이지 않은 절망의 무게와 함께 선연한 시간이 쌓이고 있다.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묻고 묻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 p.85 “제 이름 알고 있었어요?” “알지, 그럼. 첫날 봤을 때 네가 말했잖아.” 태형은 조금 머쓱해졌다. “아저씨 이름은 뭔데요?” “그걸 알아서 뭐 해, 그냥 만두 아저씨지.” --- p.144 나는 그저 공을 주고받는 게 좋았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야구가 아니었다. --- p.183 그의 사과와 변명은 더 큰 소문과 비난을 불러왔다. 사과는 사과였어야 했으나 해본 적 없었으니 그러지 못했다. 말로 내뱉는 생각은 대부분 터무니없고 빈약한 상상이었다. 그 빈 것을 채우기 위해 말로 애쓸 뿐이었다. --- p.205 그의 겨울은 점점 더 길어졌다. 자기는 겨울에 죽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차가운 방에 담긴 시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 채 겨울은 지나갈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 p.223 죽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근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 p.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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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근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지연된 감정, 제때 읽지 못한 시도, 유예된 애도, 전달되지 못한 사과는 연착되었으므로 현재를 바꾸는 것이다. 소설가 백가흠의 여섯번째 소설집 『가를 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겨우 살아내다가, 자신을 관통했던 죽음을 다시 마주하는 것. 바로 이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일을 겪은 것인지를 이해합니다. -고명재 시인 발문, 「서서히 내게 오는 것」에서 소설가 백가흠의 여섯번째 소설집 『가를 두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지난 5년 동안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것으로 모두 코로나19를 지나오면서 씌어졌다. 데뷔 이후 인간의 비틀린 욕망과 잔혹성을 묘파하며 그로테스크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을 법한 보편의 이별과 상실의 자리를 다룬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조형래의 말을 빌리자면 백가흠의 신작 소설집에 “삶의 잔혹성이라는 조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간병, 파산, 실종, 노년의 고립, 가족의 해체, 뒤늦은 애도의 형식으로 변주되어 있다. 백가흠의 초기 소설이 폭력 앞에 노출된 몸을 통해 생의 민낯을 드러냈다면 『가를 두고』는 그야말로 잔혹무도한 세계 속에서 이미 지나간 사건이 뒤늦게 인물의 삶에 도착하는 방식에 관해”(해설 「연착과 사후」) 보여준다. 출간을 앞두고 “쓰면서 편안했고 많이 슬펐던 기억”이 난다고 말한 바 있는 작가는 소설의 소임을 두고 “남의 일은 내 일이 되고 내 일은 남의 일이 되는 것”(‘작가의 말’)이라 정의한다. 그의 말처럼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 아닌 다른 이의 삶의 형태와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문학을 떼어놓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번 작품에는 가장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조차 “아무도 모르게” 떠나보낸 인물들이 주로 등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혹여 울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숨을 죽여 우는 것뿐이다. 우다브노에 아침이 올 때까지 나는 울었다. 사라졌던 빛이 산맥을 넘어 아주 천천히 평원을 가로질러, 아버지의 무덤 위를 지나서, 서서히 내게 오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다시 곧 돌아오겠다고 내게 오고 있는 것들에게 대답해주었다. -「우다브노에서 아침을」에서 「우다브노에서 아침을」의 ‘지은’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비행시간만 열아홉 시간 반이 걸리는 조지아 트빌리시로 긴 여정을 떠난다. 단역배우였던 아버지는 자신이 여섯 번이나 죽는 영화를 딸의 손을 꼭 잡고 볼 만큼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처음에는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를 찾아 실종 신고까지 했었던 지은은 결혼과 출산, 이혼을 거치면서 아버지를 찾는 일을 점차 단념하게 된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슬픈 사건’이라기보단 ‘난처한 일’에 가깝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트빌리시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아르자니 평원의 작은 마을 우다브노에 도착한 지은은 그곳에서 아버지가 운영했다는 의성식당과 이복동생 ‘애나’를 마주한다. 식당에는 한국식 우물과 지하수 펌프 등 아버지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고, 의성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가 기르던 개의 이름까지도 ‘마늘’이었다는 것. 줄곧 자신을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지은은 그제야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나는 몰랐다”(p. 41)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뒤늦은 그리움의 눈물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애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묵은 감정을 씻어내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애도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평생을 그리워했던 관계만이 슬픔을 드러내어 치유에 다다를 수 있다. 반대의 경우, 끝없는 후회만이 사는 내내 이어질 뿐이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는 노인이 등장하는 두 작품, 「빗소리」와 「복숭아를 씹으며」에는 아들의 원인 모를 자살과 한국말이 서툰 며느리 그리고 가족이 아닌 타인의 돌봄 노동에 의탁해야만하는 공통된 설정이 등장한다. 일본인 며느리와 손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혹스러워하는 「빗소리」의 화자는 재일 교포 2세로, 하루하루를 술로 연명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는 아들 ‘상현’이 일본에서 ‘마키 소타’로 살아야만 했던 시간이 배제되어 있다.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깊은 고독과 외로움이 삼대에 걸쳐 반복되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아들에 대한 자책으로 살아온 그는 장맛비에 둑이 무너지고 마당으로 강물이 들이치는 걸 보면서 “아버지가 들어오고 있었다. 상현이도 같이 온 것 같았다”(p. 75)라고 말하며 그 옛날 아버지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 명성을 떨친 「복숭아를 씹으며」의 ‘김영태’는 말년에 이르러 대중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평생을 정치판에서 일하며 약자의 편에 선 것처럼 살아왔으나 실상은 법의 안전망 속에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했고 이러한 이기심은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명성을 염려해 장례조차 치르지 않는 비정함으로 이어진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며느리 ‘재경’은 남편의 죽음을 존중하지 않는 시아버지의 태도를 비난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해본 적이 없었던 김영태는 아들과 며느리, 과거에 자신이 배신했던 연인에게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처절한 상실감과 남아 있는 가족과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 유일하게 자신의 안위를 살피는 타인 ‘마을 이장’과 베트남 청년 ‘민’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이 평생을 외면해왔던 기억을 상기하면서 적막 속에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상실의 자리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이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떠나는 사람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반드시 신호를 보내기에 결국 후회는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아무도 모르게」와 「석별-아무도 모르게 2」에는 아내가 떠난 후 혼자 남겨진 노인과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는 노인이 등장한다. 집 앞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유일한 낙인 「아무도 모르게」의 ‘김영근’은 사십대 중반에 만난 아내와 결혼식을 올릴 당시만 해도 삶의 모든 것이 소박하고 고요하게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런 그에게 아내는 “왜 그렇게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 결혼을 하자는 거예요?”(p. 229)라며 처음으로 언성을 높인다. 이렇듯 아내가 무얼 원하는지 평생 모르고 살아온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며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석별-아무도 모르게 2」의 화자는 “많은 것이 이미 지나가버렸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 속으로 함몰됐다. 우리는 그저 생을 버틴다. 아무런 소망도 없고 더는 절망도 없다. 죽고 싶지도 않고 살고 싶지도 않다”(pp. 79~80)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비관한다. 가족들에게 막대한 빚을 안긴 채 사라진 아들 ‘선규’와 그런 오빠의 빚을 대신 갚느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딸 ‘선희’ 역시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아픈 아내를 돌보며 최소 생활비와 밀린 공과금을 걱정해야 하는 지금의 현실과 아내가 아프기 전 아들과 함께 셋이서 제주도에 갔던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며 전개되는 소설은 이내 아들 선규의 부음으로 이어진다. 아들의 소식을 들은 순간에도 온전히 슬퍼할 수 없는 그는 우는 딸에게 “선희야, 엄마, 들을라. 작게, 작게······ 울어라”(p. 108)라고 말할 뿐이다. 작품 속 두 노인은 자신에게 닥친 외로움과 고독함이 “아무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닥쳤다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살피지 않고 넘겨온 지난 세월의 무심함이 결국 노년의 자신을 외롭게 만든 것이다. 아내를 잃은 사람도 옆에 아픈 아내가 있는 사람도 똑같이 외롭고, 자식이 있는 사람도 자식이 없는 사람도 손 내밀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독함을 털어놓지 못한 채 어둠만이 천천히 드리운다. 소통의 단절은 비단 노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라오까이 라이까이-가을이 오면」과 「감귤호텔 부흥회」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느라 주변을 향한 관심과 인정을 잃어버린 청년 세대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단 사거리에서 4년째 토스트를 팔고 있는 ‘태형’은 낮에는 푸드 트럭을 운영하고 오후에는 물류 창고에서 일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대학생 때 얻은 자취방에 여전히 살며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가는 그에게는 뚜렷한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런 태형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만두 트럭 아저씨’는 눈엣가시나 다름없고, 비 오는 날 발생한 사고 이후 단골손님 중 한 명인 베트남 유학생 ‘흐엉’의 발길마저 뜸해지자 태형의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나중에야 흐엉이 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태형은 언제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그녀의 고향 ‘라오까이 라이까이’에 가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감귤모텔 부흥회」는 삼십대에 사회인 야구단에서 만난 이들이 세월이 흘러 친목 포커 모임을 하게 되면서 달라진 각자의 처지와 상황을 묘사한다. 다른 사람들의 불참으로 단둘이 제주의 외진 무인모텔에 오게 된 ‘상수’와 ‘상원’은 “너하고 둘이 오붓하니 좋네.” “그렇죠, 형하고는 기회가 없었죠”(p. 158)라는 말만 반복하며 어색한 시간을 보낸다. 이후 밤이 되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상수’는 최근 비트코인과 프랜차이즈 사업이 연이어 대박이 난 대학 동기 ‘흥식’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처지에 관한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상원은 다른 사람의 노력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으면서 투정만 부리는 상수를 힐난한다. 그런 상원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상수는 자신이 좋아했던 것은 야구가 아닌 공을 주고받는 행위, 즉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는 과정이었음을 비로소 상기한다. 다음 날 상원은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일이 생겨 가봐야 한다며 급히 떠나고 발코니에 선 상수는 축구 연습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너희들 모두 잘될 거야”(p. 183)라며 되뇐다. 팍팍한 현실과 관계의 단절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회복의 가능성을 그리는 두 작품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저버리는 것이라 여기는 인간의 이기심과 연약함을 그리면서도 그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그 무엇도 혼자 이뤄낼 수 없음을 말하며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난밤에는 밤새 울었습니다”(p. 255)라는 자기 고백적 어조로 시작하는 표제작 「가를 두고」는 부모님을 연이어 떠나보내고 오래전에 여동생마저 보내면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화자가 짐승과도 같은 자신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모나지 않고 평탄하게 살아왔다 여겼던 그는 실은 “어떤 일에 한 번도 용기를 내어본 적이 없”(p. 270)는 삶을 살았고, 읍내에서 귀래식당을 운영하는 동갑내기 친구 ‘금비’의 말 한마디는 그의 적적한 삶에 위로가 되어준다. 제목 “가를 두고”는 마을에 큰불이 나고 마을회관으로 대피하던 할머니가 집에 묶어둔 누렁이를 떠올리고는 “내가 미쳤는갑다. 가를 두고 그냥 왔다”(p. 283)라고 말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사가 위급한 순간에서야 집에 두고 온 식구를 떠올리는 장면은 인생의 많은 것을 함축해 보여준다. 인간에게는 단 한 번의 삶만이 주어지고 때때로 이러한 자명한 사실은 낯설게 느껴진다. 백가흠의 이번 소설집은 이별이 남긴 상처가 아닌 자신이 두고 온 대상, 즉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한 번쯤 후회하게 되는 순간을 그리면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이 소설집의 연착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다. 제때 말하지 못한 것들이 무덤 앞에서야 말이 되는 시간이다. [······] 무덤에서는 쓸 수 없으므로 무덤 앞에서 쓴다. 죽은 뒤에는 말할 수 없으므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대신 말한다. 『가를 두고』의 마지막 울림은 죽음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이름을 불러두는 힘에 있다. -조형래 해설, 「연착과 사후」에서 · 작가의 말 최근에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습니다. AI에게 성경 66권과 초기 불경 170권을 모두 읽게 하고 두 종교 간 공통점과 차이점을 물었는데 AI가 내놓은 답변은 조금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AI는 종교에 관해선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게 중립적으로 답하게 설계되었는데 편견 없이 내놓은 답변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두 경전을 놓고 종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수학적으로 계산을 한 것이지요. 인간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 누구도 같은 깊이로 두 경전을 읽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까요. AI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한 뒤 결론적으로 두 경전에서 모두 반복적으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을 한 문장으로 뽑아냈어요. “지금 네 옆에 있는 사람을 네 자신처럼 대하라.” 문학은 이 문장 앞에 복종합니다. 소설은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남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니까요. 내 일을 남의 일처럼 남에게 말해주는 것이니까요. 남의 일은 내 일이 되고 내 일은 남의 일이 되는 것. 그러니까 소설의 일이라는 것은 경전의 저 깊은 울림을 실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모자람 많은 생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진리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 자꾸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습니다. 2021년부터 써온 소설을 묶습니다. 지나온 그 시절을 떠올리니 아득하고 멀기만 합니다. 그 시작은 코로나로 많은 변화가 있던 때였지요. 그간 이상하게도 저는 중요한 뭔가를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람처럼 허둥댔습니다. 조급함에 불안함에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아름다움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익숙하고 오랫동안 알아왔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현재를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그날은 매일 우리에게 꿈처럼 다가올 것이다. 현실인지 꿈속인지 구분도 할 수 없게 말이다. 그렇게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소리 없이 눈이 쌓인 밤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눈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함께 돌아갈 것이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현재일 것이다. 그날 제주에서 보았던 눈, 세상을 더 밝고 환하게 비추던 달빛처럼 말이다. 오늘, 누구하고든 헤어지기 좋은 날이다.” 2026년 6월 백가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