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프롤로그 8
제1부 내가 무엇을 하여야 … 12 제1장 내가 무엇을 하여야 … [영생을 ‘거래’하려는 은밀한 마음] 13 제2장 거룩함이 생명을 외면할 때 [제사장과 레위인의 합리적 계산] 23 제3장 ‘선함’을 넘어 ‘생명’으로 [‘스플랑크니조마이’가 일으키는 생명] 31 제2부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44 제1장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첫 번째 꿈 [우리의 진짜 꿈은 무엇인가?] 45 제2장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자유 [‘두 통장의 비밀’] 55 제3장 아버지 집 안의 또 다른 그림자 [‘영적 성과’라는 이름의 율법주의] 64 제3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 75 제1장 무너진 구원의 공식 [‘축복받은 의인’의 충격적 실패] 76 제2장 바늘귀의 진짜 의미 [‘부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87 제3장 절망의 끝에서 열리는 문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 95 제4부 내 안의 요나를 대면하다 104 제1장 다시스로 향하는 마음 [하나님의 자비가 나의 정의를 침범할 때] 105 제2장 폭풍과 물고기 뱃속 [불완전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 114 제3장 박넝쿨 그늘 아래 분노 [나의 ‘정의’는 하나님의 ‘마음’과 얼마나 다른가?] 125 제4장 인터루드 137 제5부 아버지 집에 사는 노예 139 제1장 아버지의 질주 [‘거래의 파산’을 막아선 ‘존재의 긍정’] 141 제2장 잔치 밖의 분노 [‘공로의 장부’를 든 자의 함정] 152 제3장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소유’를 넘어 ‘존재’의 잔치로] 161 제6부 포도원의 초대 170 제1장 내가 버린 것의 계산 [그리고 주인의 이상한 초대] 171 제2장 ‘일한 나’의 분노 [한 데나리온이 바꾼 것] 178 제3장 쉼을 거부하는 네 가지 이유 [죄의식이라는 스스로 만든 감옥] 185 제4장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산다 200 제5장 마치며 [장부를 덮고, 잔치를 시작하십시오] 207 에필로그 211 부록 214 참고문헌 221 |
허욱의 다른 상품
|
저 역시 오랫동안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주로 ‘선한 행위’의 아름다운 모범으로 바라보며 위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익숙함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없이 읽고 묵상했던 이야기인데 혹시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더 깊은 결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조용히 피어올랐습니다.
그렇게 다시 말씀을 깊이 살피다가 한 가지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 원문 어디에도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그저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눅 10:33)이라고 마치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을 알리듯 담담하게 기록할 뿐입니다. 더 주목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를 ‘도덕적 행위의 모범’으로 마무리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비유가 끝난 후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신앙의 초점이 행위의 목록에서 관계의 방향으로 완전히 이동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랫동안 이 익숙한 이야기에 관습적으로 붙여온 ‘선한’이라는 이름표는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p.14 ‘선한 행위’는 그 자체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선한 행위’를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신 긍휼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의 긍휼이 담고 있는 깊은 진실 — 율법의 실패, 예상 밖의 구원자, 계산 없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복음의 심장 —을 파고들기보다 눈에 보이는 ‘선한 행위’ 자체에만 주목하며 안심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p.15 세상의 꿈들이 우리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証明)하도록 압박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심어 주신 이 거룩한 꿈은 우리의 가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確定)되었음을 선언하며 그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거룩한 꿈이 우리 삶에서 참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해야만 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뿌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삶을 목회와 선교 같은 ‘하나님의 일’과 직업과 물질 같은 ‘세상의 일’로 나누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삶의 모든 자리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는 통찰이 이 구분을 허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첫 번째 꿈’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꿈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가 된 ‘자녀 됨’입니다. ---p.57 예수님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을 선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눅 19:5). 그 한 마디가 삭개오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즐거워하며” 그의 재물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고, 남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듣고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아무 요구도 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재물을 내어놓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이 대조가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행위의 차이가 아닙니다. 순서의 차이입니다. 부자 청년은 행위로 은혜를 얻으려 했고, 삭개오는 은혜를 받은 결과로 행위가 흘러나왔습니다. 삭개오의 나눔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받은 은혜가 흘러넘쳐 나온 기쁨의 반응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실패했다면, 삭개오는 ‘은혜’를 받은 결과로 참된 행위가 뒤따랐습니다. ---p.101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도망쳤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결과, 곧 원수의 구원을 피하려고 달아났습니다. 반면 우리는 그 말씀이 정말 이루어질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기도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순종하기보다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봅시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정말 요나처럼 ‘그가 구원받을까 봐 두려워서’인지,아니면 ‘기도한다고 저 완고한 사람이 변하겠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요나는 전자였고, 우리는 대부분 후자입니다. ---p.112 신약학자 R. T. 프랑스는 그의 주석에서 주인이 오후 5시에 온 자들에게 내어 준 이 “한 데나리온”은 결코 임금이 아니라 압도적 은혜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아니라 그의 처절한 필요에 대한 아버지의 넉넉한 응답이었습니다. ---p.179 |
|
누구보다 철저히 믿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왜 내 영혼은 이토록 메말라 있습니까.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내 가치를 입증하려 했고, 요나처럼 은혜의 불공평함에 분노했으며, 맏아들처럼 아버지 집 안에서도 잔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는 모두 같았습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자리.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나 역시 공로를 기대하며 삶을 ‘증명의 자리’로 만들어 버린 또 다른 탕자였다는 사실을. 복음은 내가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나에게 조용히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증명하려던 모든 수고가 멈추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아버지 집의 잔치가 시작됩니다. 복음은 내가 붙드는 말씀이 아니라, 파산한 나를 붙들어 일으키는 생명입니다. -저자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