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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7쪽
2부 75쪽 3부 149쪽 4부 229쪽 작가의 말 263쪽 발문 26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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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당시 호아가 발음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으므로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서야 자신이 관심을 보인 대상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가능한 선에서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상대가 웃고 있으면 호아도 웃어 보였고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엄마, 엄마는 그 대상이 엄마 같다는 게 아니라 엄마, 나 좀 봐 줘요를 압축한 말이었다. 할 줄 아는 말이 늘고 지을 수 있는 표정도 다양해지자 호아의 흉내 내기는 한층 더 본격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p.12 “처음으로 목표라는 게 생겼다. 여자는 호아를 성공시키는 데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괴롭기만 하던 독박 육아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엄마들처럼 그냥 애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성공을 위한 거니까. 목표만 생기면 이토록 강한 힘이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북하기만 하던 호아의 눈빛과 행동들이 성공을 약속해 주는 징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p.12 “여자는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 유치원을 뒤졌다. 배경이 될 만한 명문 공립 유치원은 명문 대학보다 경쟁률이 높았다. 리스트를 뽑아서 원장들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고 찾아가서 빌어 보기도 했으나 호아를 위한 자리는 나지 않았다. (중략) 그냥 다 포기하고 아무 유치원에나 보내 버릴까.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호아가 칸이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름이 불리는 상상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더 위너 이즈…… 권, 호, 아!” ---p.16 “안쪽 문이 열리더니 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호아 손을 꼭 잡은 채 벌떡 일어섰다. 아름답다. 원장을 보고 여자가 처음 한 생각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3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 모두 가능할 것만 같은 신기한 외모였다. 쌍꺼풀 없이 기다란 눈과 곧게 솟은 코는 엄격한 인상을 풍겼으나, 도톰한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덧니가 귀여움을 가미해 자꾸만 눈이 가는 얼굴이었다. 비율이 좋고 체형도 곧아서 유치원 원장이 아니라 발레리나나 체조 선수처럼 보였다.” ---p.32 “여자도 다른 사랑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 책에 나오는 그런 사랑 말이다. 불가능하고 거짓되게 느껴지는 크고 강해지는 사랑. 들을 때마다 여자를 거북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 이제 와서 남편과 사랑에 대한 정의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 울 때는 스스로도 억지스럽게 느껴졌으나, 울다 보니 울어져서 계속 울었다. 여자의 눈물은 남편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했다. 여자로서는 무척 다행이었다.” ---p.45 여자는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다른 의사가 들어왔을 때 같은 질문을 했다. 지금보다 얼마나 더 아프냐고. 그 의사도 비슷한 답을 해 주었다. 만약 분만실이 직장이었다면 곧장 때려치우고 나갔을 것이다. 힘들 거라는 위험이 감지되면 여자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만뒀다. 그만둘 수 있으니까 그만뒀다. 그건 여자의 유일한 특권이었다. 하지만 분만실에서는 아무것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사실에 공포가 일었다. 몸을 찢고 아기가 튀어나오던 그 순간에도 여자는 공포에 질린 채로 질문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얼마나 더 아프냐고. ---p.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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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좋기만 한 날들
여섯 살 딸 호아에게 남다른 연기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여자의 삶에는 전에 없던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에 좌절을 안겨 주었던 패배의 목록이 호아와 함께라면 승리의 목록으로 역전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와 설렘. 여자는 딸의 지원자로서 전심과 전력을 다한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물불 안 가리는 여자에게 명문 유치원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을 뿐더러 누군가라도 들어가기 힘든 그들만의 요새. 그러나 운 좋게도 여자는 그 힘들다는 ‘솔중 유치원’ 입성에 성공한다. 아역 배우 활동, 명문 유치원 입학, 상위 계층 주거지로의 이사…… 꿈에 부푼 여자는 오늘도 정성을 다해 인스타그램 피드를 업데이트한다. 오늘의 태그. #배우권호아 #솔중유치원 #새로운출발 · 불안은 ‘뒤트임’과 함께 찾아온다 “엄마, 있지. 그렇게 긴 눈을 만들려면 뒤트임을 해야 한대. 나도 뒤트임 할까?” 불안은 뒤트임과 함께 찾아온다고 했던가. 언젠가는 당장 쌍꺼풀 수술을 해 달라며 바닥에 드러누워 생떼를 쓰던 호아가 요즘은 연일 뒤트임타령이다. 여자는 호아의 뜬금없는 요구에 놀라면서도 약간은 징그러움을 느낀다. 여섯 살 아이가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남의 말 같아서, 어쩐지 자신이 해야 하는 말을 대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호아가 원하는 건 뒤트임한 눈을 가진 자신일까, 뒤트임을 원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것일까. 호아는 자신이 어른들의 거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점점 더 완벽한 거울이 되어 간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시, 등원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호아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 간다. · 유치원 스릴러가 된 가족의 꿈 의심스러운 상황 속에서 혼돈에 빠지는 건 여자라고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여자에게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내 당장 그 유치원에서 호아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경고하고, 유치원 때문에 이사 한 새 집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좋았던 날들은 부지불식간에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날들로 변모하고, 여자를 향한 호아의 적대감마저 극에 달한다. 유치원 스릴러가 되어 버린 가족의 꿈은 강진아의 손에서 세련된 서사로 전개된다.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 관찰과 환각을 넘나드는 내면 묘사, 정밀하게 배치된 플롯에서 우리는 『호아』가 스릴러의 문법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문학적 밀도를 잃지 않는 강진아의 신작임을 정확히 간파할 수 있다. · 발문에서 앞선 소설들과 이번 소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사이 작가에게 딸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작품을 읽는 데 작가의 개인사까지 필요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자신일 수는 없는 한 존재와 맺는 동질감과 이물감의 불협화음은 형용하기 힘든 ‘육화체험’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 체험이 이번 소설의 전부는 아닐망정 전부 같은 부분은 될 수 있다. ‘아는 사랑’을 증류해 불순물들을 추출하고 그 불순물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르는 사랑’을 발견한 강진아는 더할 나위 없는 우리 시대의 작가다. 계속해서 새로운 고통을 찾아 나서는 강진아를 우리는 계속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호아』는 앞으로 강진아가 쓸 모든 소설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박혜진(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에서 그런데 글을 쓰고 나서부터는 악마의 속삭임이 실은 꽤 적절한 조언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잦아졌습니다. 당장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일이 되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 그런 것들로부터 눈을 감은 채 지나왔습니다. 쏟아지는 후회 끝에 억울함이 딸려 나왔습니다. 당장 했을 뿐인데, 미루지 않았을 뿐인데, 잘못을 저지르고 만 셈이니까요. 이미 끔찍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당장 해 버린 뒤였습니다. 이제 저는 아주 힘겹게 저 자신에게 말합니다. “내일 해.” 이 말을 내뱉기 위해서는 파멸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써야 합니다. 그걸 해내고, 또 해내며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사실에 매번 놀라워하면서요. 파멸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선연합니다. 이따금 공포가 되살아날 때면 써낸 책들을 들춰보며 마음을 가다듬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