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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퇴사 없이 24개국 여행하기 10 1부. ‘워라밸’ 말고 ‘라라밸’ 1장. 질문 당신의 허기를 찾는 질문 24 2장. 비밀 과거에 손 내미는 화해 58 3장. 사랑 이탈리아 산속 마을 살이 86 4장. 인생 산에서, 삶으로 124 5장. 고백 당신 덕분에 150 2부. 이탈리아, 그후 6장. 서울 가야 할 길 176 7장. 별책부록 단편소설 〈산의 이웃들〉 190 에필로그 나는 여전히 노마드로 산다 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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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글을 썼다. 마케터로 시작한 콘텐츠 에디팅, 카피라이팅, 언론 홍보를 위한 보도자료 작성 등 다양한 조직에서 글을 쓰는 역할을 감당하다 리얼리즘 장르와 공감주의 문학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 초년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일과 삶’에 대한 에세이와 디지털 사회와 익명성 문제를 다룬 ‘하이퍼리얼리즘’ 콘셉트의 장편소설을 출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초에는 스타트업 이야기를 다룬 경영 에세이를 한 권 더 출간했다.
작년 초 11년 차 사회생활에 접어들면서, ‘조직에 소속된 직업 세계’ 안에서의 글쓰기에서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위한 글쓰기로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직업 세계는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한 시공간이어서 그 세계 안에서 깊게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다. 스타트업 신에서 일을 하며 느낀 것들, 독립 후 혼자 살면서 느낀 도시의 외로움 같은 것들이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쓸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걸 10년 동안 해보니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오직 조직을 대변하는, 혹은 직업 세계 이야기에 국한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아주 구체적으로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사람인가’라는 문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인지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마치 유기 동물 구호에 경험이 있는 이들이 동물권 보호에 대한 글을 쓰고, 책방 혹은 글방을 운영해 본 이들이 글쓰기에 대한 책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보고 느낀 것은 곧 쓰는 것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노마드 살이에 대한 시와 산문이었다. 낯선 시공간의 노마드 라이프를 살면서 새롭게 쓰고 싶은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가는 삶을 원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그 시작을 이탈리아 살이로 정했다. 언젠가 장기간 한국이 아닌 곳에 산다고 했을 때, 이탈리아는 우리 부부가 가장 살고 싶다고 공감한 나라였고 그 나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이 있으니 나뿐 아니라 부부가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일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니, 거기에 남편의 동그란 웃음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시작점이 아닌가. ---「당신의 삶에는 어떤 질문이 있나요」 중에서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우리의 마음은 내 마음이 네 마음 같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언제나’ 내 의도를 타인이 알아주길 기대하는 일은 관계를 피곤하게 한다. 버스 기사님에게 순간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저 시끄러울까 봐 입 가리고 작게 이야기한 걸요? 여기 시끄럽다고 느낀 승객이 정말 있나요?)을 그대로 뱉었다면, 그 날 선 언어는 어떻게 부풀어 전염되었을까. 시간을 돌이켜 상상해 보면 아마 그날의 버스 기사님은 그저 고요한 오후를 사랑하는 예의 바른 한 어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여름, 내가 무언가를 아주 강하게 옳다고 믿을수록 그 반대편엔 옳지 않게 행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밖에 없구나. 내 옳음이 나에게 증명될수록 나와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쉬워지는구나. 왜냐하면 너무 옳으니까. 내 생각이, 내 주장이, 내 행동이. 쨍한 해를 받으며 수줍게 그런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내가’의 옳음과 ‘나는’의 정당함에 에너지를 쓰느라 다정한 상상과 공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사는 주체인 ‘내게’ 가장 아쉬운 일일 테다. 그 세계는 아주 좁은 길일 테니. ---「혐오를 혐오하기」 중에서 백패킹 장비를 매고 오른 겨울의 깊은 산속에선 나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들이 아이러니하게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오늘의 생존만 생각해도 버거울 만큼 춥고 배고프고 육체적으로 괴로운 순간들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 순간이 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매일의 인생 같다고 여겨졌다. 나는 그래서 겨울 산을 오를 때마다 마치 인생의 복사판 같은 혹독한 산행을 저마다의 이유로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있었을까를 상상하며 걷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 과정을 통해, 어떤 언어로 타인에게 고독을 자백하는 것보다 산행이라는 행위 자체를 통해 숨겨둔 나를 자백하고, 위로받고, 생존하게 되는 게 아닐지 생각하며 단편소설 〈산의 이웃들〉을 구상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왜 살아야 할까?’, ‘왜 죽음이 이르기 전까지 살아야만 할까?’라고 질문받는다면, 누구도 정확히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거듭된 불행이 우리를 압도한다 느낄 때에도, 그래도 나는 오늘을 살아보겠다고 결심하는 ‘선택’에는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속 밀고 나가보는 힘. 살고 싶은 이유와 죽고 싶은 이유 사이의 수많은 층위를 들여다보며, 흑과 백의 논리로 이른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꼭 살아야만 하는 어떤 이유를 명확하게 발견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삽시다, 우리 함께」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