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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서문 - 역사는 길 위에 있다
프롤로그 1장 후쿠오카 - 철도 침목 하나에 담긴 모질었던 삶과 애환 일본,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내다 조선 침략의 교두보가 된 안성(성환)천과 청일전쟁 시모노세키와 이토 히로부미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야하타 제철소 아소탄광과 아소 가문 사람의 힘으로 쌓아 올린 인공 산 보타야마 〈신세타령가〉가 울려 퍼지는 보타이시 묘지 온가강은 그들을 알고 있다 지쿠호의 하야시 에이다이 조선 수탈을 위해 만든 석탄 박물관, 국가 등록 문화재가 되다 다가와 지역 최초의 조선인 탄광 순직자 순난비 일본에서 우리말을 지키다, 기타큐슈의 조선인 학교 윤동주 시인과 후쿠오카 형무소 과거와 미래를 잇는 곳, 오다야마 묘지를 말한다 조선인 136명의 유해가 수장된 조세이 해저탄광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의 묘지, 미이케 탄광과 수인 묘지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 오무타 마와타리 기념관을 찾아서 음울한 분위기로 박제된 미이케항과 만다 갱 배동록 선생, 그의 어머니를 말하다 2장 나가사키 - 원폭의 도시에서 만난 기억의 편린들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가사키 죽음의 섬 다카시마 지옥섬 하시마 도깨비섬 사키토 미쓰비시는 살아 있다 원폭에 깃든 서로 다른 얼굴, 원폭 자료관과 나가사키 인권 평화자료관 오무라 항공기지와 해군공창 방공호 형기 없는 감옥 구 오무라 수용소와 오무라 공군기지 어뢰 발사 훈련장과 특공정 신요 순국비 하리오 무선 전신탑과 사세보 요새 이마리 종합제철소 3장 오사카 - 계속되는 고난과 희망의 역사 조선인 마을 우토로에서 찾은 희망 진심은 국경을 초월한다, 타치소 지하터널 조선 침략의 상징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다 오사카 국제평화박물관에서 찾은 대한의 상징 제2의 우토로, 아파치 마을을 가다 나의 묘지이자 우리의 묘지, 단바 망간 기념관 4장 히로시마 - 가장 낮은 곳에서 싹트는 평화 숨 가빴던 전투 요새, 구레의 2단 동굴 터널 어두운 기억 속에 묻힌 나가고 지하터널 공장 인간 어뢰 가이텐 특공기지 야스노 발전소에서 기형도의 시를 떠올리다 조선인 유해가 던져진 인골(人骨)댐 이야기 원폭의 참상이 서린 도시 히로시마를 가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평화자료관 5장 오키나와 - 끝나지 않은 기억과 기록 전쟁의 참상과 슬픔이 깃든 마부니 언덕의 평화기념공원 처절한 역사의 현장 20호 동굴과 하에바루 문화센터 비밀스런 한(恨)을 간직한 섬 도카시키 미군 속에 오키나와가 있다 전쟁을 기억하는 평화의 장, 사키마 미술관 나를 이끈 숙명, ‘한의 비’를 발견하다 에필로그 - 자유와 평화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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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2009년 6월, 네 번째로 이곳을 찾았다. 경북 경산에서 ‘항전사(4개 부대 12개 중대 약 8,500명)’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되어 오키나와 게라마열도 인근으로 배치된 태평양 유족회 소속 군속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중략) 일제는 이들을 미 함정을 요격할 자살특공대의 엄폐호를 파는 강제 노역에 투입했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총기 등은 지급하지 않았고 군수물자, 탄약 등을 옮기게 했다. 부산항을 출발해 처음 도착한 시모노세키항 부근의 중앙여관과 소화관은 오키나와 출발 전 임시숙소로 사용된 곳이다. 하지만 현재는 주변 상권 개발 및 환경이 변해 당시의 건물은 사라졌다. 다만 시모노세키시와 우베시에 있던 조선인학교를 통합한 야마구치 조선초・중급학교 앞에 있는 소화관 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항구 근처 우체국 뒤쪽에 당시 조선인이 많이 밀집해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pp.28-29 1942년 2월 3일 오전 10시 우베 조세이(長生) 해저탄광에 갑작스럽게 바닷물이 유입되어 183명의 광부가 갱 내에 생매장당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이들 중 136명이 조선에서 강제 동원되어 끌려온 사람이었다. 삼엄한 감시와 차별을 견뎌야 하는 이곳은 일명 ‘조선 탄광’이라 불릴 정도로 채탄부(막장) 대부분이 조선 사람이었다. (중략) 일본이 패전하고 83년도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책임자 처벌은 물론이고 사고에 합당한 배상금 논의조차 없었다. 이후 관련 유족들이 야마구치현과 우베시에 수차례 진정을 넣어 유해 발굴을 요구했지만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일본인을 포함해 183명의 유해는 차가운 바닷물 속에 수장된 채 방치되어 있다. ---pp.82-84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큰 누나 배동선 씨가 강연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함께 참석한다. 한국 어린이의 놀이문화를 설명하고 함께 〈고향의 봄〉 등의 노래를 부른다.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김치를 먹고, 한복도 입어보고 기념 촬영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한다. 또한 한국의 시민단체와 연계해서 일본의 강제 연행 지역을 함께 답사하며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후쿠오카를 떠나 다음 촬영지인 나가사키로 가는 내게 배 선생은 지난 30년간 자신이 해온 일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대일항쟁기 재일 조선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된다. 현재 일본 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철도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pp.108-110 멀리서 보면 섬 전체의 모습이 마치 군함 같다고 해서 일명 쿤칸지마(군함도軍艦島)로 불렸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 동원되어 지옥과도 같은 노동에 시달렸다고 해서 광부들 사이에서는 지옥 섬이라고 불렸다. (중략) 나가사키시에서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흘러나왔는데, 그 후 의식 있는 한일 시민단체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이곳은 태평양전쟁 당시 수많은 조선 노동자가 피를 흘린 곳이다. 경제적 논리를 앞세워 관광 상품화하는 일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pp.123-124 얼마 전에는 지난 2021년 11월 6월에 건립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곳을 다녀왔다. 나가사키 평화공원 원폭 자료관 길 건너 코인 주차장 바로 옆에 높이 3미터의 위령비가 설치된 것은 원자폭탄 투하 후 76년 만이다. 그 이전인 1990년대 초에도 논의가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진행되지 못했다가 2013년 7월 위령비 건립위원회가 새롭게 발족하면서 나가사키시와 본격적인 협의가 시작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해도 마무리되기까지 약 30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물론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한국 정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요구한 ‘강제 동원’이란 표현 대신 ‘본인의 의사(意思)에 반(反)해’라는 내용으로 변경하고서야 완공되었다. 늦었지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p.167 처음 찾는 우토로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눈에 담듯 마음에 담듯 마을 구석구석을 촬영했다. 간간이 우리 이름이 쓰여 있는 문패를 보고 촬영을 멈추었다. 이들이 낯선 일본 땅에서 혹독한 대가와도 끝내 바꾸지 않는 이름의 힘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지켜내는지 느껴졌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무도 이들을 지켜주지 않을 때 그들은 스스로를 지켰고 지금 이곳에 있다. 이 마을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1년에 교토 군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일제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1,300여 명이 집단 이주해 합숙하며 살던 곳이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비행장 건설이 중단되자, 당시 조선인 노동자는 실업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떠한 전후 배상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살아오고 있다. (중략) 그동안 그들이 겪어낸 어렵고 힘들고 차별받는 상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주민 200명(60가구)은 약 6,400평 대지에서 서로 도와가면서 60년 이상 이곳 우토로에 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일본 국적을 거부한다. ---pp.200-203 리 관장은 일본인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조선인의 한이 서린 광산을 기념관으로 조성하여 20년간 사재를 털어 운영했다. 그러나 올해 말이면 이곳 망간 기념관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 문이 닫힌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실제로 단바 망간 기념관은 2009년 5월 폐관되었다. 언론매체와 인터뷰한 이용식 관장의 말을 통해 자신의 현재 심정과 안타까움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기념관을 ‘나의 묘지, 우리의 묘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의 묘가 허물어질 상황에 놓인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pp.228-229 목숨을 담보로 진행된 무리한 공사 탓에 숙소를 탈출하는 일도 많았다. 낯선 지형 때문에 깊은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도랑이나 폭포 등으로 떨어져 실족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다리에 나무를 매달아놓고 나뭇잎을 태워 연기를 마시게 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했다고 한다. 기사에는 전혀 믿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히로시마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는 히로시마현 동북부 쪽에 있는 고보 댐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소개했다. 1942년 시작된 댐 공사에는 경상도 출신의 조선인 노동자 2,000여 명이 강제 동원되어 일하고 있었다. 댐 구조물 공사를 하던 중 조선인 노동자들이 구조물 밑바닥 시멘트 더미 위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밑으로 떨어진 그들은 위를 향해 살려달라고 있는 힘을 모아 소리쳤다. 동료인 조선인 노동자들이 밧줄을 내려보내 구하려는 순간 일본인 감독이 작업을 중단하지 말라고 고함을 내질렀다. 이어 감독은 직접 시멘트를 삽으로 떠서 아래로 부었다. 조선인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멘트를 팔로 막으려 했지만 잠시 후 조용해졌다. 생매장당한 것이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 수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뒤 고보 댐은 ‘인골(人骨)댐’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pp.258-259 지금의 동굴은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문화 답사 지역으로 포장되어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피비린내 나는 수술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동굴은 알고 있을 것이다. 목숨을 위협하는 인간의 잔인함을.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내부에서도 생명은 자라고 있었다. 조명등으로 어두운 동굴 내부를 밝히니 작은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유난히 잎과 줄기가 반짝였다. 수많은 사람의 유해가 땅 힘을 좋게 해 땅의 기운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안내하던 분이 동굴 천장에 쓰인 ‘강(姜)’씨 성의 조선인 이름을 가리켰다. 오랜 시간이 흘러 글자는 이미 희미해졌지만 이곳 육군병원에서 숨죽이며 말없이 죽어간 당시 조선인의 한(恨) 맺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p.286 국립 오키나와 청소년 수련원 내에 있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100미터 정도 아래에 집단 자결지가 있다. 미군이 도카시키섬을 공격하던 3월 27일부터 29일 사이에 모여 있던 주민 800명 중 330명이 집단 자결한 곳이다. 집단 자결비 옆에는 〈LA 타임스〉 보도를 근거로 집단 자결 과정을 기록한 작은 비와 일본 정부가 집단 자결을 미화한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집단 자결비 뒤 숲에는 처음 세운 ‘백옥의 탑’이 부서진 채 버려져 있었다. 직접 목격한 그때도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고 있는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금까지 많은 곳을 다녔고 참혹한 역사적 현장을 목격했지만 이곳에서보다 더 큰 충격을 준 곳은 없었다. ---p.292 넓은 백사장의 3분의 1 정도를 철책으로 막아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곳을 방문한 많은 사람이 남긴 평화의 메시지를 매달아놓은 작은 천 조각들은 세찬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책 사이사이를 빼곡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천 조각은 비록 손바닥보다 작지만 붉은색, 노란색, 흰색 등 각각의 희망과 소망으로 분장해 현장의 투쟁과 열정을 강렬하게 채색했다. 늘 그렇듯이 평화는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pp.30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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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길 위에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 이 답사기는 대일항쟁기 조선인 강제 동원과 관련된 내용 및 현장 사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적 혹은 상처받은 자들의 아픔을 품은 현장을 찾아 답사와 함께 사진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중간 과정의 결과물이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에 기초한 역사와 사실을 바탕으로, 과거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변모한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동시에 박제된 과거 역사로 남겨두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되살리기 위해 당시 현장을 다시 찾아 기록을 넘어 기억을 이어가고자 했다. ---프롤로그에서(이재갑) 우리는 ‘군함도’와 ‘강제 동원’이라는 말을 안다. 윤동주가 스물일곱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는 사실도, ‘99엔 사건’의 모욕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이 실제로 어떤 땅 위에, 어떤 사람들의 얼굴 위에 새겨져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는 그 말과 사실 사이의 빈자리를 두 발로 채워 넣은 기록이다. 사진가 이재갑은 1996년부터 30년 가까이,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오사카·히로시마·오키나와까지 조선인이 끌려간 자리를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눠 몇 번이고 되짚어 걸었다. 탄광과 해저 갱도, 군사 벙커와 인골(人骨)댐, 원폭의 도시와 이름 없는 묘지…. 그 자리에 서서 그는 풀과 돌과 나무가 건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사진과 글로 옮겼다. 이 책은 부산을 떠나 도착한 시모노세키가 아니라, 청일전쟁이 시작된 경기도 안성(성환)천에서 첫발을 뗀다. 조선 침략은 일본이 아니라 조선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세워두기 위해서다. 그렇게 100년의 기억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밟고 선 땅의 이야기가 된다. 과거의 상처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만나고 싶은 이에게,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를 읽고 싶은 이에게,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가고 싶은 이에게 기록을 넘어 기억으로, 대립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는 길을 안내한다. “자유와 평화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몸을 움직이고 현장을 다니면 깨닫게 된다. 역시 답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 이재갑(저자) · 제1장 후쿠오카 - 철도 침목 하나에 담긴 모질었던 삶과 애환 역사는 통계가 아니라 얼굴이다. 후쿠오카는 그 사실에서 시작한다. 오리오역 앞, 한복 차림의 배동록 선생이 저자를 맞는다. 평생을 조선인 강제 동원 규명에 바친 사람, 이 긴 여정의 첫 길잡이다.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건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야하타 제철소와 지쿠호의 탄광, 손으로 쌓아 올린 인공 산 보타야마. 제국을 떠받친 노동의 주인은 고향을 빼앗긴 조선인이었다. 침목 하나, 갱도 하나에 모질었던 삶이 새겨져 있다. 스물일곱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시인 윤동주, 조세이 해저탄광에 수장된 136명, 이름도 없이 수인 번호로 남은 미이케 묘지의 사람들.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를 때, 낡은 침목 한 토막이 더 이상 무심한 나무로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역사를 만난다. · 제2장 나가사키 - 원폭의 도시에서 만난 기억의 편린들 나가사키에는 두 개의 상처가 겹쳐 있다. 원폭, 그리고 강제 동원. 다카시마·하시마·사키토, 세 섬의 갱도는 바다 밑에서 조선인의 목숨을 태워 석탄을 캐냈다. 저자는 관광지가 된 지옥섬을 걷되, 안내판이 지워버린 조선인의 자리를 되짚어 읽는다. 이 도시의 또 다른 이름은 미쓰비시다. 강제 동원으로 몸집을 불리고 전후에도 건재한 이 기업 앞에서, ‘99엔 사건’(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에 끌려가 군수공장의 강제노역에 투입된 한국인 여성근로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자, 미쓰비시가 당시 가치로 환산하여 지급한 사건)의 모욕이 왜 끝난 일이 아닌지 이 장은 조용히 증언한다. 그러나 나가사키에는 다른 얼굴도 있다. 진실을 밝히려 평생을 바친 일본인들, 사죄의 뜻으로 세운 화해의 비, 원한만이 아니라 손 내미는 사람도 함께 기록된다. 잊으라 강요받은 것들을 기억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나가사키가 남긴 숙제다. · 제3장 오사카 - 계속되는 고난과 희망의 역사 아무도 지켜주지 않을 때, 그들은 스스로를 지켰다. 교토 우토로 마을은 비행장 건설에 끌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이 모여 산 곳이다. 비만 오면 하수가 넘치고, 수돗물도 없이 차별을 견뎌야 했던 마을. 그러나 저자가 본 것은 비참함이 아니라 힘이었다. 문패에 또렷이 남은 우리 이름들, 혹독한 대가와도 끝내 바꾸지 않은 이름의 힘. 이름을 지킨다는 것은 곧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타치소 지하터널에서는 국경을 넘어선 진심과 마주하고, 오사카성 앞에서는 조선 침략의 뿌리를 되짚는다. 아파치 마을, 그리고 부락민과 조선인의 역사가 뒤엉킨 단바 망간 기념관까지, 차별의 밑바닥에서 서로를 붙든 연대가 이 장을 관통한다. 저자는 단바 망간 기념관을 ‘나의 묘지이자 우리의 묘지’라 부른다. 고난은 계속되지만, 함께 짊어질 때 희망이 싹튼다. 오사카는 그 사실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증명한다. · 제4장 히로시마 - 가장 낮은 곳에서 싹트는 평화 가장 낮은 곳에서 평화가 싹튼다. 히로시마 편은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땅 아래로 내려간다. 구레의 2단 동굴 터널, 인간 어뢰 가이텐 특공 기지, 산속 깊이 감춰진 지하 공장. 전쟁은 사람을 무기로 삼았고, 그 무기를 만드는 노동은 조선인의 몫이었다. 오타강을 따라 세워진 댐 앞에서 저자는 걸음을 멈춘다. 그중 한 곳은 ‘인골댐’이라 불린다. 시멘트 더미로 떨어진 조선인을 구하려는 순간, 작업을 멈추지 말라며 그 위로 시멘트를 부어 생매장했다는 이야기가 이 이름에 새겨져 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지만, 증언자들은 이보다 더한 일도 많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이 도시 상공에서 원폭이 터졌다.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재일 조선인이 2만 명이었다. 평화기념공원 한편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이중으로 잊힌 그 이름들을 붙든다. 저자가 지하와 강바닥에서 길어 올린 것은 절망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이다. · 제5장 오키나와 - 끝나지 않은 기억과 기록 남의 역사가 나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 있다. 오키나와는 그 순간을 기록한다. 평화기념공원이 자리한 마부니 언덕,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병원으로 사용한 곳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곡괭이로 굴을 파서 만든 20호 동굴, 처참한 살육이 일어난 도카시키섬. 전쟁의 참상은 여기서도 조선인을 비켜 가지 않았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상처는 과거형이 아니다. 섬을 뒤덮은 미군 기지 앞에서, 저자는 이 기억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본다. 그리고 이 장에서, 30년 답사의 의미가 한 점으로 모인다. 저자는 ‘한의 비’ 앞에 선다. 끌려온 이들의 주소가 새겨진 돌비에서, 그는 뜻밖에 자기 집안의 본적지(경북 상주군 낙동면 수정리)를 발견한다. 오래전 할아버지가 들려준, 일본으로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마을 청년들의 이야기가 그 순간 되살아난다. 이 여정이 왜 자신의 운명이었는지, 비로소 답을 얻은 자리다. 기억은 끝나지 않았고, 기록 또한 멈추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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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갑 작가는 30년간 일제 강제 동원과 침략의 현장을 발로 뛰며 기록해온 현장주의 사진작가이자 문필가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는 청일전쟁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남녘과 일본의 여러 지역을 아우르며, 일제 강제 동원의 역사를 한층 확장된 문제의식으로 담아냈다. 그의 치열한 작업 기저에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정과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공감, 그리고 치유를 향한 열망이 살아 숨 쉰다. 그렇기에 이 책은 한일 과거사의 실상을 깨우고 올바른 미래를 향하게 하는 큰 자양분이자 뜨거운 각성제다. 이 귀중한 기록을 어찌 읽고 보고 음미하지 않을 수 있으랴. - 박한용 (역사학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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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멈추지 않고 ‘길 위에서’ 역사의 증인을 만난 이재갑 사진가의 소중한 기록을 기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다. 이재갑 사진가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땅으로 끌려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카메라에 담아 고스란히 살려냈다. 잊혀가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오랫동안 온갖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재일 조선인, 일본 시민의 존재도 너무나 귀하기만 하다. 이제 우리는 이재갑 사진가가 걸어온 그 길 위에서 다시 평화를 꿈꿀 수 있다.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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