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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흙냄새 나는 유년의 삶과 풍경 가장 먼 기억의 문을 열다 개구리참외 국화빵이 남은 자리 달빛 내린 마실길 배내소와 동행 만리방천에 묻힌 이야기 제2부. 어머니의 등불, 스승의 길 가난을 닦아낸 소매 끝 그 곁에서 삶을 낳고 있었네 약장수로 변장한 어머니 장롱 속에 피어난 사랑 그해 겨울이 남긴 빈자리 반짇고리의 비밀 달집 아래 깃든 어머니의 기원 제3부. 인연이 길이 되어 풋과일의 용서, 익어간 마음 기름 냄새, 향수(香水)가 되던 날 시제(時祭) 가는 길 죽전만당(竹田晩堂), 인연의 길 반세기의 강을 건너다 설산(雪山)에 흐르는 요롱 소리 제4부. 세월 속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 아는 만큼 보인다 덜 익은 사과의 지혜 왕피천에 남겨 둔 여름 세월을 건너온 봄날 제5부. 다시, 사랑을 배우다 먼 이웃사촌 선유도(仙遊島), 다시 모인 우리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산타 할아버지의 비밀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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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참외의 단맛만 기억했지만, 지금은 그 단맛 뒤에 스며 있던 아버지의 땀맛과 짠내를 안다. 푸르스름한 껍질 속에 노란 속살을 품은 개구리참외처럼, 그 밭에는 말없이 익어 가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p.35 그렇다. 그 염소는 새끼를 낳을 수 없는 숫염소였다. 그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 사실은 그토록 애지중지 키워 온 내 꿈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여름 내내 배 밑이 불룩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숫염소의 징표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혹시 중개꾼이 일부러 속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스쳤다. 그 순간 염소를 바라보며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 와중에 먹물을 들인 흑염소는 아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염소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였다. 그것이 내 삶의 일부라고. 꿈은 무너졌지만, 삶은 또 다른 길을 가르쳐 주었다. 숫염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첫 스승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염소를 산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한걸음 앞으로 옮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p.102 숫염소는 끝내 새끼를 낳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보다 더 귀한 ‘새끼’를 내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설픈 실패의 경험은 내게 ‘책임감’이라는 새끼를, 좌절의 눈물은 ‘삶의 지혜’라는 새끼를 품게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오늘의 나는 그 시절 염소가 남긴 또 다른 새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기억의 조각들은 오래도록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p.108 바늘은 세 개였다. 그리고 날계란도 세 개였다. 그것은 귀한 손님이 오셔야 비로소 꺼내 놓던 것이었고, 아버지의 밥상에나 드물게 오르던,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으로 스승의 은혜에 정중한 인사를 대신하셨던 것이다. ---p.142 선생님은 그 시절의 많은 기록을 꺼내어 들려주셨다. 비가 많이 와 대초리 냇물이 불어나면 우리를 일일이 등에 업고 건너 주시던 일, 분단 이름을 꽃 이름으로 지었던 일, 연못가 글짓기에서 누가 일등을 했는지, 누가 코를 많이 흘렸는지까지 줄줄이 말씀하셨다. 반세기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마주한 스승의 기억력 앞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희끗한 머리칼을 뒤로한 채 국민학교 5학년 코흘리개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 시절 우리가 딛고 건넌 것은 차가운 냇물이 아니라, 제자를 향한 스승님의 든든한 등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p.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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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있었지만 사람이 있었고,
사람들의 온기로 한 소년은 삶을 배웠다” 『새끼 낳은 숫염소』는 경상남도 거창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박종덕 저자가 칠십 평생의 기억을 길어 올린 생활 에세이다. 국민학교 교실의 장작난로와 양철 도시락, 장날의 국화빵과 뻥튀기, 소 등에 울리던 요롱 소리, 삼베를 짜던 베틀과 밀주 단속을 피해 감춰 둔 막걸리 항아리까지. 저자의 기억 속 풍경은 한 개인의 추억을 넘어 가난과 산업화의 시간을 지나온 한 세대의 생활사로 확장된다. 이 책이 오래 머무르는 곳은 ‘가난’ 자체가 아니다. 척박한 모래땅을 일구어 가족을 먹여 살린 아버지, 삼베를 짜고 막걸리를 빚으며 살림을 꾸린 어머니, 장롱 속 귀한 곶감을 손주에게 내어 주던 외할아버지, 어머니날 받은 바늘 세 개에 대한 답례로 날계란 세 알을 선생님께 보내던 어머니까지. 가진 것은 적었지만 서로의 마음과 손길로 삶을 이어 가던 사람들의 온기가 책 곳곳에 배어 있다. 책의 제목이 된 이야기는 이 책의 정서를 가장 잘 보여 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은 사방공사에서 두 달간 일하고 받은 밀가루 다섯 포대 중 일부를 팔아 염소 한 마리를 산다. 새끼를 낳으면 그것을 밑천 삼아 다시 공부할 수 있으리라 꿈꾸었지만, 정성을 다해 키운 염소는 새끼를 낳을 수 없는 숫염소였다. “숫염소는 새끼를 낳지 못했지만, 나는 그 곁에서 책임과 지혜, 다시 일어서는 마음을 낳았다” 소년에게는 허탈한 실패였지만, 세월이 흐른 뒤 저자는 그 시간을 자신을 키운 삶의 밑거름으로 돌아본다. 뜻대로 되지 않은 경험조차 결국 한 사람을 성장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유년의 고향 풍경에서 부모와 스승의 사랑, 벗과 형제의 인연, 가족과 손주에 대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국화빵 한 봉지, 참외 한 조각, 곶감 몇 알처럼 소박한 기억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독자에게 어린 날을 불러내고, 다음 세대에게는 부모와 조부모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