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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떨리는 마음으로
감각적 지성 단테 0 남아 있는 얼굴들, 단테를 그린 화가 1 눈에 보이는 대로-조토 디본도네 2 선으로 드러낸 단테의 숨결-산드로 보티첼리 3 육신이 요동치는 영혼의 세상에서-루카 시뇨렐리 4 글을 눈으로 듣기-페데리코 추카리 5 읽고 그리고 새기며-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6 지옥에서 피어오른 격정의 그림자-외젠 들라크루아 7 꿈속이 현실로-살바도르 달리 8 언어의 오래된 부활-로버트 라우션버그 9 지옥문 저편의 망령들을 불러내며-오귀스트 로댕 10 신비롭게 흩어진 사랑의 색채-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11 흑백 화면의 묵직한 감동-폴 귀스타브 도레 12 장막 너머 일렁이는 지옥-윌리엄 블레이크 13 소름 끼치는 명암의 대위법-알베르토 마르티니 14 단테를 순례하는 사유의 소리-프란츠 리스트 15 여기, 지옥-샌도 버크 닫는 말: 함께 걷는 순롓길 |
朴商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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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옥을 볼 수 없지만 이미지는 떠올릴 수 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고통에 찢겨나가는 울부짖음, 육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 시커멓게 내려앉은 공기, 뒤엉킨 뱀들의 징그러운 가죽, 망령들이 들이키는 구정물의 역한 맛까지. 이런 이미지들은 어디서 왔을까. 단테의 『신곡』은 우리가 살아서는 느낄 수 없는 세계를 느끼게 해준다. (…) 단테는 청각, 후각, 미각, 촉각까지 동원하여 초월적 내세를 감각적 세계로 변용한다. 그리고 화가들은 그 여러 감각을 한순간의 시각 이미지로 붙잡아 확정한다. 그들의 그림에는 불길과 울부짖음, 냄새, 뱀 가죽, 오물의 느낌까지 담겨 있다. 이런 역동적 공감각 효과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단테의 언어였다.
---p.8 많은 화가가 단테의 얼굴을 그렸다. 삶이 얼굴을 만들기에, 얼굴을 통해 그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글이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 단테의 얼굴이 단테의 글을 상징한 지 오래다. 그의 얼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생각에 잠긴 우수 어린 눈과 고집스러운 매부리코다. 사랑과 추방, 유랑과 사유, 고독과 실천으로 점철된 삶과 글이 거기에 담겨 있다. ---p.23 독일의 비교문학자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얇으면서도 묵직한 책 『단테』에서 단테를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 대목에서 나의 시선은 ‘하늘’보다 ‘바라봄’에 더 오래 머물렀다. 하늘이 단테를 끌어올려 인도하는 구도가 아니라 땅을 딛고 선 단테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추구하는 구도가 떠오른 것이다. 단테는 현세에 처한 인간의 구원을 염원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늘을 우러르기보다 현세를 사는 인간을 돌아보고 드러내려 했다. ---p.40 이야기와 감정을 선과 색채로 고스란히 ‘환원’하기 위해서는 기계적 변형이 아니라 자기만의 해석이 필요하다. 보티첼리는 그림의 제재를 조토처럼 자연주의적으로 화폭에 옮기기보다 고유한 해석을 거쳐 재구성했다. 그러나 자연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기에 제재는 표면에 그대로 남고, 해석은 어딘가로 숨어들어서 그림의 오라를 결정한다. 이것이 보티첼리 그림의 심오한 미적 깊이다. 그 깊은 곳에 『신곡』이 놓여 있다. ---p.74 가죽 껍질만 남은 자화상을 그리던 미켈란젤로는 한 세상 살며 누렸던 탄탄한 명성이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속절없이 스러져가리라 생각했다. 때로는 붓을 놓고 강으로 달려가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강물을 몇 시간씩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붓을 들었다. 그의 나날들이 더 이상 강물처럼 그저 흘러가지만은 않기를 바랐을 테다. 자기가 그린 자화상을 앞에 놓고도 자신의 죽음을 영원한 저편 어딘가로 실어보내고 싶었으리라. 오래전에 죽은 단테처럼 자신도 오래 전에 죽은 자가 될 테지만, 자기가 밤마다 단테의 시를 읽듯 누군가도 계속해서 자신의 그림을 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p.122 ‘점멸하는 존재성’은 단테의 지옥에 거주하는 흐릿한 영혼들을 매우 적절하게 불러낸다. 존재를 지속하는 연옥의 영혼이나 존재를 발산하는 천국의 영혼과 달리, 지옥의 영혼은 존재를 상실한다. 지옥의 영혼은 말하고 기억하고 고통을 느끼고 사연을 들려주지만, 늘 결여된 상태다. 있다 없다 사이를 오가며 존재의 연속성을 놓치면서, 자신을 영원히 갱신하지 못하면서, 몸이 녹아내리고 말이 부서지고 기억은 깜박거린다. ---p.148 지옥이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지옥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죄인을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앞에 선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자각하도록 일깨우기 위해서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을 결코 생략할 수 없다면, 그 질문은 인간은 어디로 나아가는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p.171 마르티니는 환상적 영감을 꿈으로 빚어내면서 비교 불가의 독보적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그는 스스로를 꿈 속으로 해방시킨다. 그를 놓여나게 하는 힘은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을 넘나드는 결정적 요인이기에, 마르티니는 단테의 순례에 온전히 동참한다. 마르티니와 단테 사이의 경계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풀어헤쳐져 사라진다. ---p.246 버크는 단테가 구사했던 신성한 언어를 현대의 대도시 건축과 풍경으로 변주한다. 천국의 영혼들을 거룩하게 묘사하는 대신,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나누는 대화와 사유의 순간을 포착한다. 하늘의 빛은 도시의 철골과 유리에 반사된 불빛으로 대체된다. 버크의 천국은 더 이상 초월의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차가운 빛이 반사하는 현대인의 일상이다. ---p.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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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조각, 음악
그리고 글로 되살아나는 『신곡』 예술가들이 읽은 단테는 저마다 달랐다. 어떤 이에게 『신곡』은 신과 인간, 죄와 구원에 관한 종교적 세계였고, 어떤 이에게는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시대와 현실을 비추어볼 수 있는 창이자, 끝없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광대한 세계였다. 같은 작품을 마주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단테와 『신곡』은 서로 다른 얼굴로 그려졌다. 저자는 열다섯 명의 예술가를 따라가며 『신곡』이 언어에서 출발해 다른 예술의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을 살핀다. 단테가 말로 그려낸 세계는 화가의 선과 색이 되고, 조각가의 형상이 되고, 음악가의 선율이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신곡』의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시각적 공간으로 옮겨놓았다. 그는 「지옥의 지도」를 그리며 단테가 내려간 지옥을 깔때기 모양의 구조로 펼치고, 지옥의 아홉 고리를 층층이 이었다. 보티첼리가 조감한 지옥은 커다란 한 장의 이미지가 된다. 이는 단테가 말로 구축한 세계를 어떻게 하나의 화면 안에 질서화할 것인지를 화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한 결과다. 오귀스트 로댕은 「지옥의 문」을 빚어냄으로써 『신곡』의 지옥을 인간들의 몸이 뒤엉킨 거대한 조형 세계로 바꾸어놓는다. 뒤틀리고 매달리고 추락하는 인물들은 단테가 묘사한 지옥의 고통을 끊임없이 이어지는 움직임으로 재생한다. 단테가 지옥을 여행하며 묘사한 인간과 세계는 조각가의 눈에 이식되고 불퉁한 덩어리는 새로운 지옥의 형상으로 깎이고 주조된다. 헝가리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이탈리아를 순례하며 단테의 작품을 읽었고, 그가 겪은 고난과 좌절, 구원과 타락의 감정을 음악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 결실이 「단테를 읽고 나서」다. 리스트는 『신곡』을 읽으며 자기 내면에 일어난 떨림을 음률로 표현했다. 지옥의 통곡에서 시작해 연옥을 지나 천국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흐름은 저음에서 고음으로 상승하는 흐름으로 구현된다. 『신곡』은 그려지고, 빚어지고, 소리로 옮겨지며 몸을 바꿔 되살아난다. 한편 예술가들이 단테에 몰입해 창작을 이어나갔던 과정을 읽다 보면, 우리는 이 책에 열다섯 명의 예술가와 함께 또 한 사람의 단테 애호가가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오랜 시간 단테를 읽고 또 읽으며 그에게 다가가려 한 연구자, 이 책의 저자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감각으로 단테를 되살려냈고, 저자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다시 단테에게 다가갔다. 이 책 위로 포개진 단테를 향한 애정은 독자에게도 또 한 명의 단테 애호가가 되어보기를 권한다. 다시 열리는 단테의 세계 『신곡』, 영원한 고전 단테는 청각, 후각, 미각, 촉각까지 동원해 내세를 묘사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지옥은 오늘날 우리가 곧장 떠올리는 지옥의 이미지를 대표할 만큼 선명하게 그려졌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고통에 찢겨나가는 울부짖음, 육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 시커멓게 내려앉은 공기, 뒤엉킨 뱀들의 징그러운 가죽, 망령들이 들이키는 구정물의 역한 맛.” 그리고 화가들은 단테가 사용한 여러 감각을 “한순간의 시각 이미지로 붙잡아 확정”했다. 그러나 이것이 원작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은 아니며, 저자는 ‘다르게 그리기’의 힘이 발생하는 작품들에 특히 주목한다. 『신곡』을 그린 많은 화가가 단테가 제시한 진리를 충실하게 따르려 했다면, 가령 블레이크는 단테의 세계에 기꺼이 자신의 유희와 상상력을 끼워넣었다. 단테의 지옥에 등장하는 마귀는 엄숙한 악마가 아니라 가면무도회에서 막 빠져나온 듯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고통으로 가득한 자살자의 숲조차 생동감 넘치고 기괴한 세계로 변한다. 또한 샌도 버크는 단테의 지옥 순례를 현대 미국의 도시 풍경 속에 옮겨놓는데, 폐기물과 쇼핑몰, 패스트푸드점, 교통체증과 광고판, 오염된 도시와 소비사회의 풍경은 이곳이 곧 단테가 말한 지옥이 아닌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블레이크가 단테의 세계를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비틀어 ‘또 다른 지옥’을 열었다면, 버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지옥을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도시 한가운데로 가져온 것이다. 700년 전 시인의 상상 속에 존재했던 지옥이 재해석되는 순간, 『신곡』은 더 이상 과거의 내세를 이야기하는 책에 머물지 않는다. 단테의 질문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질문이 되고, 우리는 단테의 세계를 읽는 동시에 지금 여기의 세계를 읽게 된다. 저자가 열다섯 명의 예술가를 따라가며 거듭 주지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저자는 원작을 비틀고, 우회하고, 때로는 희화화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들어서고, 『신곡』이 확정된 진리로 “정착”하는 대신 지금 우리에게 “중계”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작품을 해석하고 해설하는 일은 고전을 화석화하지 않고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며, 그렇게 단테는 하나의 기원이면서도 유일한 정답이 되지는 않는다. 예술가들이 『신곡』에서 자신만의 진리를 추출해냈듯이, 『신곡』은 그것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린다. 단테의 언어는 그로써 가능성의 언어가 되고, 700년의 시간을 건너 또 다른 예술가의 감각을 일깨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세계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언어가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보게 하는지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단테와 열다섯 명의 예술가, 그리고 그들 사이를 잇는 저자와 연결될 때, 우리는 단테와 신곡이 재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볼 뿐만 아니라 영원한 고전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