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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장수와 나
1월 16일생 결계의 방 벌레 대왕 나를 부르는 소리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매혹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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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덜컹거리자 남자는 휘청거리며 옆에 있는 의자를 짚었다. 그의 처진 두 눈이 졸고 있는 할아버지 머리에 향한다 싶더니, 순식간에 갓을 벗겨냈다. 예의범절 따윈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아리는 숨을 삼켰다. 도둑일까? 남자는 느긋하게 제 모자를 벗고 그 갓을 썼다. 창문에 그 모습을 비추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가 끌어 내렸다가 하더니 이내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긴 팔을 뒤로해 궤짝 안에 중절모를 집어넣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그 누구도 남자의 행동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아리만 빼고.
---「모자 장수와 나」중에서 다가갈수록 드리워진 푸른 불빛이 점점 위로 번졌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뚝뚝. 나뭇가지 위에서 피가 빗방울처럼 떨어져 웅덩이를 이루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자 가지에 달린 둥그런 무언가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일렁이는 빛들에 창백한 얼굴들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홉뜬 눈들과 찌푸린 얼굴, 뒤틀린 입술 새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의 머리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렸다. ---「모자 장수와 나」중에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전등으로 근처 바닥을 비추며 무언가를 찾았다. 얼마를 맴돌았을까, 켜켜이 쌓인 낙엽 사이로 푸른 방수포 끄트머리가 보였다. 그것을 걷어내자 위에 깔렸던 낙엽이 우수수 흩어지고 그 밑으로 깊게 판 구덩이가 나왔다. 그 속엔 이미 다른 여행 가방이 있었다. 남자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 위에 자기가 가지고 온 가방을 던져 넣었다. 위이잉, 잠겨 있던 날벌레들이 날아올랐다. ---「1월 16일생」중에서 “내일은 귀신날이니 어디 다니지 말고 여기에 있어. 오후엔 집마다 귀신 쫓는 연기를 태울 것이니 다니기에 좋지 않다.” ---「1월 16일생」중에서 에덴아파트 103동. 나는 중개사를 따라 오래된 아파트로 들어갔다. 햇살이 들지 않는 중앙엔 서늘한 공기가 괴어 있었고 오래된 건물 특유의 역한 냄새가 났다. 코를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입구 맞은편으로 승강기와 계단이 보였다. 여자는 양옆으로 이어진 복도 중 오른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검은 힐이 바닥을 또각또각 때렸다. ---「결계의 방」중에서 여자의 두 눈이 번뜩였다. “마귀로부터 살려면 내가 마귀로 살아야 하는 거야.” ---「결계의 방」중에서 영달은 손을 휘둘러 인중으로 날아드는 벌레를 잡아채려고 했다. 벌레는 굼뜬 움직임을 비웃듯이 위잉 소리를 내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영달이 눈도 깜빡이기 전에 뜨거운 김을 내뱉는 입속으로 날아들었다. 헉, 하고 숨을 삼키자 그것이 목 안으로 깊숙이 기어들어 갔다. 콜록콜록. 기침이 터졌다. 목 안에서 그것이 왱왱 껄끄럽게 휘돈다. ---「벌레 대왕」중에서 정체불명의 곤충, 즉 갑충-20이 가축을 넘어 사람에게까지 감염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청수시에서 지난 금요일에 발견된 20대 여성의 사체를 부검한 결과 체내에서 갑충-20이 발견되었습니다. 갑충-20은 호흡기 경로로 중추신경계에서 감염을 일으키고 인간을 숙주 삼아 개체 수를 늘린 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갑충-20을 각별히 주의할 것을 요하며 확실한 방역 대응책이 마련될 때까지 외출을 자제하고 부득이하게 외출할 시에는 마스크를 착용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벌레 대왕」중에서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에서 내쉬는 숨이 답답했다. 선풍기 바람도 들어오지 못하는데, 주기도문 외는 소리는 집요하게 따라왔다. “하늘에 계신… 이름이… 거룩히… 흑흑…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흑흑.”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도에는 울음소리가 더해지고 발음도 뭉그러졌다. 너무도 소름이 끼쳐 눈을 떴다. 벽에 붙은 빨간 숫자 03:30.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잠이 가신 눈을 비비며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느껴지는 바깥은 고요했다. 어둠 속에서 흐느끼며 주기도문을 외던 이는 보이지 않았고 기도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지척에 있는 가로등의 창백한 불빛 밑으로 날아드는 날벌레만이 살아 있는 전부 같았다. 나는 잠시 밖을 내다보다가 베란다 문을 닫았다. ---「나를 부르는 소리」중에서 뚝뚝. 진득한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눈을 들어 여자를 올려다봤다. 여자가 퉁퉁 부르튼 입술을 벌렸다. 검은 입속이 크게 드러나고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소리 질렀으나 밖으로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입을 벌린 채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나는 힘을 내어 몸을 움직였다. 엎드리고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쾅 하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계단 끝에서 넘어졌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여자는 나를 쫓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소리」중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도망가자면 마을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어야 했다. 다시 돌아가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쨍그랑. 창문이 깨지고 뭔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희는 화들짝 놀라 슈트 케이스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절대로. 도희는 이를 악물고 안개가 낀 숲으로 향했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중에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벽돌집이 자세히 보였다. 나무를 촘촘히 심어서 고개를 요리조리 움직이고 눈에 잔뜩 힘을 줘야지만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작은 문과 벽에 친 격자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넝쿨. 그리고 1, 2층에 난 창문. 2층 창문에서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누군지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혹시 자신을 기다리는 교수님일 수도. 동해는 구부러진 길을 따라 차를 오른쪽으로 몰아가다 다시 멈췄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중에서 사락사락사락. 동해는 시선을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빛이 채 닿지 않는 어둠을 보며 사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빛으로 인해 굴곡진 어둠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동해는 방충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에 가느다란 거미줄이 들러붙었다. 손등으로 치웠지만 밀려났던 줄은 다시 얼굴에 부딪혔다. 손가락으로 그걸 붙들어 당겼다. 그 끝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줄이 팽팽해졌다. 동해는 좀 더 힘을 줘 잡아당겼다. 투툭투툭. 손에 그것이 뜯겨 나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미줄이 아니라 울타리에 뿌리를 내린 넝쿨일까. 동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털어냈다. 손에 잡힌 건 긴 머리카락 뭉치였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중에서 “뭐든 말만 해. 이제 그대도 나의 가족이니.” “가족….” 아득한 그 말이 왜 그리 달콤할까. “저는 무얼 해드려야 하는가요?” 서은의 물음에 감은 눈이 서은의 뒤를 향했다. “네 고통을 나에게 주면 돼.” ---「매혹」중에서 “동제 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러나? 이번 동제는 매년 하던 제사와 달라. 사 년에 한 번씩 이뤄지는 큰 제로써, 신실하지 못한 이들만 망하는 그런 날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일이라고. 준비는 당연히 완벽해야 해. 그분이 만족하실 만큼 완벽해야 하지. 알아들어? 한 해 농사가 아니라 무려 사 년간의 농사가 달려 있어. 사 년 동안 흥하느냐 흉하느냐가 달려 있다고!” 그사이 충혈된 이장의 눈이 곽 씨에게 향했다. 곽 씨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매혹」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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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장수와 나」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총칼에 할머니를 잃은 소녀 ‘아리’는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마적들로 인해 기차 안은 쑥대밭이 되고, 혼란 중에 아리는 수상한 남자에게 소중한 보따리를 도둑맞는다. 보따리를 되찾기 위해 남자를 쫓아 들어선 깊은 숲속에서 아리는 영원히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 「1월 16일생」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산속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재회한 동생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그 무엇이라 해도 절대 동생을 해치지 못하게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나’의 앞에 수상한 남자가 나타난다. 「결계의 방」 ‘월영시’에 취직하게 된 ‘나’는 본가를 나와 새로 방을 얻는다. 하지만 이 방의 모든 것이 낯설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특히 어디선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사각사각사각 긁어대는 소리는 더더욱. 「벌레 대왕」 ‘영달’은 억울하다. 일을 좀 슬렁슬렁 했기로서니 새파랗게 어린 공사판 동료에게 흠씬 얻어맞다니. 또 술을 사러 들어간 근처 마트에서는 행색이 남루하고 취했다는 이유로 슈퍼맨처럼 키가 훤칠하고 품행이 번듯한 남자 직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수모도 여기까지일 것이다. 이제 그는 뱃속에 ‘군단’을 품었으니. 「나를 부르는 소리」 ‘나’는 공동주택 ‘월영빌라’에서의 삶이 지옥 같다. 한밤중 누군가 크게 내지르는 소리에 잠을 깨는 등 주변 이웃들의 생활 소음에 끝없이 노출되고, 보고 싶지 않은 장면까지 목격하게 된다.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의 머리채를 휘어 잡고 집으로 끌고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 같은. 그리고 그날 이후 어디선가 계속 주기도문 외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를 죄에서 사하여 주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동해’는 출장으로 ‘부광시’를 찾았다가 오랜 은사님의 집에 묵게 된다. 스승의 집으로 향하는 길, 스승의 딸을 찾는 ‘도희’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날 한밤중 동해가 묵는 손님방 창가에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내려온다. 마치 나를 찾아달라는 듯이. 「매혹」 서은 부부는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사업에 실패한 이후 남편은 서은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손을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네가 많아 천룡리라 이름 붙었다는 이 마을의 여자들이 마을의 오랜 신앙의 대상이라는 ‘천녀’에게 서은을 데려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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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설화, 고전소설 등
‘원형’의 가장 독창적이고 장르적인 해석 귀신을 치료하는 ‘수상한 한의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와 인간 소녀의 만남 등 이미 널리 사랑받고 있는 전작들을 통하여 배명은 작가는 신화와 설화 등을 현대적이고 장르적인 감각으로 재해석, 재구성함에 있어 독보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왔다. 이 책의 첫 수록작 「모자 장수와 나」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로 시간 배경을 옮기고 우리 고유의 도깨비 중 하나인 갓귀를 등장시켜 다시-쓰기하였다. 두 번째 수록작 「1월 16일생」은 죽은 자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는 우리 전통의 ‘귀신날’과 야광귀라는 존재 설정을 통하여 흥미로운 서사를 구축했다. 표제작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로 널리 알려진 라푼젤 메르헨에서 모티프를 얻어 쓰였다. 라푼젤이 갇혀서 자랐다는 높은 탑은 측백나무와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으로 재해석된다. 작가는 그것에 내재한 고립성과 폐쇄성을 통하여 혐오와 억압이 가져오는 공포를 선명하게 그려내었다. 우리가 언제나 ‘원형’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하고,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내면의 깊숙한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래 전해 내려온 원형을 장르의 문법에 맞게 재해석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작금의 현실을 독창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해내는 배명은 작가의 놀라운 내공을 경험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