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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무대가 차려지다
1. 두 강 사이의 땅 2. 소리꾼이 있어야 잔치가 된다 3. 활터, 또 하나의 무대 2부. 소리판의 사람들 1. 소리를 남기지 못한 사람들 2. 소리를 나른 사람들 3. 배움을 잇지 못한 사람들 4. 소리 뒤켠 사람들 5. 소리를 지킨 사람들 3부. 이 땅이 낳은 명창 1. 소리 인생을 돌아보며, 그가 그리워한 것 2. 정정렬이 자란 땅은 따로 있었다 3. 정정렬 나고 춘향가 다시 났다 4부. 이름으로만 남은 가객 1. 남도에 박동실, 북도에 이기권 2. 숨어야 했던 사람들 3. 무당이 된 여자, 첩이 된 여자 5부. 소리를 먹여 살린 만석꾼 1. 함라 삼부자의 시대, 그 뒤에 남은 것 2. 소리꾼들의 든든한 뒷배 3. 끝내 소리를 놓지 못한 조해영 6부. 소리는 살아남았다 1. 오정숙과 배기봉, 평생의 인연이 되다 2. 오정숙, 스승의 가르침을 완성하다 3. 오정숙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것들 에필로그 --- 본문 중에서 |
金盛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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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을 우리는 명창이라고 부른다. 그들에 대해 예의를 갖춘 호칭이다. 그러나 향창(鄕唱)이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향창은 중앙 무대에 서지 못한 채, 한 지역에서 평생 소리를 하며 살아간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좀 더 쉬운 말로는 ‘또랑광대’다. 큰 무대가 아니라 동네에서,잔칫집 마당에서, 노인회 총회 혹은 활터 잔치 때 소리를 했던 사람들이다. 이 책은 향창들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대체 누가, 어디서, 어떻게 판소리를 즐겼을까. 그 소리는 또 어떻게 퍼져 나갔을까. 답을 좇다 보니 자연스레 한 시기, 한 지역으로 좁혀졌다.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과 폐허의 시대를 지나, 산업화가 한창이던 1980년대까지. 그리고 이리(裡里)를 중심으로 함라, 웅포, 황등, 삼기, 함열, 용안, 망성을 두른 금강 변, 익산 서북부 지역이다. 문제는 자료였다. 향창들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신문기사 한 줄, 사진 한 장조차 드물었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부터 구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기억에 의지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복원하는 일이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말하는 증언들이 있었다. 그 충돌을 굳이 하나로 봉합하지 않고 나란히 두기로 했다. 정정렬 명창의 출생지를 두고도 증언들이 엇갈렸는데, 그 엇갈림조차 그대로 옮겨 두었다. 정답을 찾는 일보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지역 사람들이 함께 기억해 온 판소리의 삶을 엮어낸 구술사에 가깝다. 강매실은 어렸을 적부터 공옥진 명인의 부친 공대일 선생한테 소리를 배웠다. 신이 들린 어머니를 따라 명산대찰을 떠돌다가 장항에 정착했을 때가 스무 살이었다. 다시 소리공부를 시작하다. 매일 도선(渡船)을 타고 군산으로 건너가 최난수 선생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 도선에서 만난 남자가 남편이 되었다. 힘과 체구가 장사인 남편은 어린 자식 둘을 남기고 급사했다. 가진 게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갑 잔치와 경로당 노인 잔치, 동갑계 잔치가 남아 있어서 강매실은 먹고살 수 있었다. 세상이 변해 잔치판이 종적을 감추자 더는 흥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치매가 찾아왔다. ‘남광대’는 익산시 황등에서 살았다. 황등의 옛날 사람들은 ‘남광대’를 다 기억한다. 황등은 일제강점기부터 개발된 석산으로 유명하다. 황등 ‘돌쟁이’들이 ‘이리’에 나가지 않으면 룸살롱이며 금은방이며 ‘메이커 옷’ 가게들까지 장사가 안 될 정도였다. 그만큼 돈이 ‘시글시글’한 곳이었다. 남광대가 향창으로서 먹고산 배경이었다. 이 이야기들을 기억 속에서 소환해 낸 이가 바로 김갑태다. 비상한 기억력으로 옛 시절의 장면들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풀어내는 남다른 재주를 지닌 이다. 왼쪽 눈은 어려서 솔가지에 찔려 시력을 잃었다. 그 눈으로 평생 이 땅의 소리꾼들을 지켜보았다. 그가 소리를 배운 이가 바로 남광대였다. 남광대에게서 사설을 한글로 베껴 적으며 소리를 배웠다. 정정렬의 춘향가 레코드도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그 레코드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 뒤에도 그는 익산에서 열리는 ‘국창 정정렬 추모 익산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 몇 차례 출전했다. 광주의 임방울 대회에도 두어 차례 출전했다. 소리를 사랑한 것이었다. 이기권 명창의 생몰연대와 가족관계가 비로소 드러났다. 그는 정정렬에게 배웠고, 홍정택 등 많은 제자를 두었다. “남에는 박동실, 북에는 이기권”이라는 말은 두 사람이 각각 전남과 전북을 대표하는 소리꾼이었음을 말해준다. 늘 댄디한 신사 차림이었고, 초대받지 않은 자리 외에는 일체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기권의 가계는 탄탄한 예맥(藝脈})을 이루었다. 이기권의 맏형 이칠권은 스물하나로 요절하였지만 피리를 불면 “저 공중에서 소리가 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생하고 노느니 이칠권하고 논다”고 할 정도여서, 잔칫집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인력거가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기권의 예맥은 두 세대를 이어가지 못한 채 사라졌다. 사회적 편견과 냉대를 견디지 못한 후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들이 예인집단으로 승화·계승되지 못한 것이 시대적 한계였는지, 개개인의 선택이었는지, 필자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남광대, 이동권, 추석봉, 강매실, 명바우, 공바우, 나창순, 백준기. 이 책이 시작할 때 불렀던 이름들이다. 다시 끝에서 한 번 더 불러본다. 오갑순 여성농악단의 공연도, 김성수 선생의 계면성음도, 곰보 소리꾼의 강짜도, 강매실의 치매(癡呆) 속에 묻힌 마지막 기억도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흩어졌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아니다. 이름을 적어두는 것. 그것이 필자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악 애호가로서 그 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