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
1. 악은 죽음보다 발걸음이 빠르다 - 소크라테스의 재판
2.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예수의 재판 3. 무덤도, 초상화도 없는 프랑스의 성녀 - 잔 다르크의 재판 4.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 토머스 모어 재판 5. 마녀의 엉덩이에는 점이 있다 - 마녀재판 : 화형당한 100만 중세 여성의 운명 6. 그래도 지구는 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 7. 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재판 8.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 비시정권의 수반, 필리페 페탱의 재판 9.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한 전쟁 -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10. 외설인가 명작인가 - D.H. 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재판 |
朴元淳
|
진실의 승리를 가르쳐주는 재판의 기록
--- 99/12/26 조창완(chogaci@hitel.net)
인생의 항로라는 것이 우스워서 나도 두 번의 재판에 관여해본 적이 있다. 한번은 내가 살던 집의 전세금 반환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회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나에게 재판정의 인상은 필요이상의 권위로 뭉친 법원과(그들 역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기 이야기를 쓰면 소설 한권은 되고 남을 듯한 수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다.(물론 그것은 인생담이지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재판이라는 과정은 결코 정당하게 무엇이 평가받는 자리는 아니다. 여러 가지 사례를 봤지만 재판은 법령에 익숙한 사람들이 갈등이 생긴 사람들에게 그 법령을 적용한 후에 결정을 내주는 역할을 한다. 솔로몬 같이 현명한 사람도 없지만 솔로몬 같은 권위 역시 없는 것이 법관이다. 그들의 인생을 봐라. 고액의 임금을 받는 다지만 세상의 갈등을 들어주다가, 끝나간다. 거기에 실수로 잘못된 죄를 주장하거나 잘못된 판결을 내렸을 때는 적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한다.
그들이 성장했을 때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적지 않은 책을 읽었지만 법관이나 변호사가 쓴 책중에서 읽을 만한 책을 본 적이 없다. 설혹 그들중에 괜찮은 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글은 자신의 직업에 관한 것이기 보다는 자신이 특별한 관심사들이 중심이 된 것이 대부분이다. 박원순 변호사의 책은 나의 그런 선입견을 깨줄수 있는 책이 될 수 있을까하느 호기심에서 선택됐다. 박변호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접했고, 직접 인사는 안했지만 발치에서 적지 않게 본 분이다. 물론 그분의 인생은 인권변호사나 시민운동가로서 어느 법관에 못지 않은 족적을 가진 분이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신 분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세기의 재판이야기'라는 부제를 담고 있는 책 답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재판을 모두 다루고 있다. 우선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소크라테스다. 그리스 철학자로서 젊은 이들을 기만하고 타락시켰다는 죄로 독배를 마신 인물. 책에서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죽음을 달게 받았던 소크라테스를 설명하고, 악처 크샨티페를 옹호한다. 두 번째 인물은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다. 책은 예수의 사형 과정과 이 사형의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는가, 유대인에게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진행된다. 세 번째 인물은 오르레앙의 처녀 잔다르크의 재판에 관한 것이다. 프랑스를 구했지만 무능한 샤를 7세로 의해 포로가 되고, 코숑주교의 연출로 재판 받아 마녀로 화형 받은 인물. 결과적으로 영국의 손아귀속에 프랑스를 구했으며 나중에 앙드레 말로가 '그대를 기억할만한 무덤도 초상화도 없지만 영웅의 진정한 기념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았던 이여!'라고 추앙한 그녀의 어처구니 없는 재판 과정을 검증하고 있다. '유토피아'의 저자로 알려진 토마스 모어의 기록이 다음이다. 법통을 지키지 않다가 헨리 8세에 의해 참수당한 토마스 모어의 기록이다. 이후에도 마녀사냥이란 명목으로 희생당한 여인들, 지동설로 인한 재판과 그 재판이후의 모습으로 더 유명한 갈릴레이, 드레퓌스, 로젠버그,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외설성으로 비판받은 로렌스 등이다. 다른 재판도 유명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은 지식인들의 양심에 관한 문제등으로 더욱 알려진 재판이다. 이 사건의 주역 드레퓌스는 1900년대를 앞둔 프랑스군은 독일과의 격전에서 처참한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을 찾다가 착하디착한 장교 드레퓌스를 간첩혐의로 몰아 넣는다. 유태인이기도 한 드레퓌스에 대한 프랑스의 조작은 점입가경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가장 극적인 주역은 언론이다. 그는 모든 불명예를 안고 1895년 2월 21일 적도 해안의 악마도로 유유형된다. 이후 당시 사건 담당자가 물러나고 다른 인물이 부임한 후 간첩혐의의 주역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사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에 위기를 느낀 관련자들은 전임 담당자가 사실을 주장하자 그까지 궁지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진실의 신은 살아있었고, 언론인 클레망소가 프랑스의 양심에 호소하며 드레퓌스를 변호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이 사건의 종장을 찍은 것은 작가 에밀 졸라다. 그는 '나는 고발한다'는 제하에 글을 썼고, 마크 트웨인 등 외국에서도 비판이 빗발쳤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고 1906년에야 무죄가 선고된다. 그리고 졸라가 그 글을 쓴지 100년이 되는 1998년 1월 12일 시라크대통령은 에밀 졸라의 저택앞에서 기념 팻말 부착식을 거행한다. 진실을 말하려는 지식인들에게 이 사건은 가장 중요한 귀감이 된 사건이다. 책의 장점은 저자가 선입견이나 자신만의 신념에 의하지 않고, 세기의 재판들을 그대로 풀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특색이 거의 없고, 있는 그대로를 실증하려는 자세가 확실하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은 인류역사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갖고 있는 인물이어서 작은 전기(傳記)의 모음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반면에 약점은 각 이야기들을 연결하는 공통선이 없고, 지나치게 무디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수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지나치게 무뎌 선과 악의 판단 경계까지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 것 같다. |
|
예수는 홀로 섰다.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악의에 찬 재판관과 방청객 앞에서 예수는 혼자일 뿐이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하리라던 베드로만 멀찌감치 서 있었다. 극악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답변은 위엄과 진실을 지키고 있었다. 묵비권을 적절히 행사하며 어려운 질문을 따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명쾌하게 답변했다.
“네가 유대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가야바의 질문에 예수는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함으로써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빌라도에게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답변은 로마제국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반역죄에 해당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가 자신의 왕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부질없는 변론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버젓이 말해왔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하고 역공을 펴기도 하였다. 예수는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무리한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최선의 변론이며 방어였다. 예수는 위대한 변론가였다. 4대 복음서에는 마흔한 가지의 기막히게 훌륭한 비유들이 나온다. 파종과 수확, 참고 기다리는 농부, 겨자씨, 문지기, 재판관에게 가는 길, 누룩, 보물, 자비로운 고용주, 두 아들, 감독에 임명된 종 등 보석 같은 비유를 보면 예수가 언어의 연금술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독일 튀빙겐 대학 신학교수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노작 '예수의 비유'는 이 마흔한가지의 비유를 자세하게 비교분석한 뒤 그것이 하나도 어그러지지 않고 아귀가 꼭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비유들임을 논증하였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맞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그가 얼마나 기민한 사람이며 임시변통에 능한지 알게 해준다.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라는 악마의 요구에 대해 그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엎드려 절하면 세상의 모든 왕국을 주겠다는 등 악마의 또 다른 유혹에 대해서도 예수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이미 구약에 정통한 예수가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함 말을 인용하여 악마를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사후에 덧칠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변설은 가히 탁월하다. 그 야만적인 재판에서 자신보다 더 훌륭한 변호사는 있을 수 없었다. 군더더기 변론은 예수의 위대함에 오히려 손상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이미 운명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물음에는 쌍올가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인하면 신성모독이요, 부정하면 사기꾼이 되었다. 어떻게 대답하든 목숨은 이미 적의 수중에 있었다. 예언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 p.50 |
|
십자가에 매달인 예수, 두 발과 두 팔을 심자가에 못박힌 채 죽음을 기다리던 예수, 예언된 운명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복음서에 적힌 간단한 기록을 보면 단지 그가 엄청난 고통을 느꼈으리라는 점만 짐작할 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느님께 '홰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 만약 그의 외마디 절규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지 '신의 아들'일 뿐인 예수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기계처럼 고안된 운명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그를 숭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아들'로서 느끼는 그 고통의 무게와 깊이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고, 고마움과 동시에 엄청난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 p.56 |
|
모어는 미끄러운 단두대로 올라가면서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행관, 나는 자네를 위해서 기도하겠네. 제발 나를 안전하게 부축해 올라가 주게. 내려올 때는 나 혼자서 잘 내려올 테니까.' 그리고 사형집행에 임하는 집행관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또 다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형집행 전에 머리를 쑥 내밀며 자신의 수염이 잘려지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토머스 모어가 사형당하기 전에...) --- p.133 |
|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진실을 향한 행군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엑스트라, 그가 바로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인간의 권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주는 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 그 정의가 이제 의미없는 빈말이 되어버렸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다.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때, 관용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때,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위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 --- p.229-230 |
|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진실을 향한 행군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엑스트라, 그가 바로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인간의 권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주는 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 그 정의가 이제 의미없는 빈말이 되어버렸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다.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때, 관용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때,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위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 --- p.229-230 |
|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는?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 '콩쥐와 팥쥐' '신데렐라와 계모' '춘향과 변학도'가 오늘날 드라마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사람들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숨죽여가며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내 안에서 싸우고 있는 몇 개의 나' - 닮고 싶은 나와 닮고 싶지 않은 나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는 더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민.형사 재판이건, 정치 재판이건 모두 그렇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재판들 - 정치 재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역사적 재판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은 차원이 또 다르다. 재판의 결과는 삶 아니면 죽음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모어, 소크라테스는 '타협을 해 목숨을 구할 것인가, 말것인가' 고민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단두대의 이슬로 한 사람은 독배를 들고지상에서 사라진다. 소크라테스의 재판부터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재판까지 이 책에 등장하는 열 개의 법정드라마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인류의 양심을 시험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독자들은 사건 현장을 넘나들며 역사책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생생한 역사의 진면목과 만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택한 이유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자는?' '잔 다르크가 화형 당한 죄목은?' '중세에 마녀가 많았던 까닭은?' '로젠버그 부부는 진짜 간첩이었을까?' 등등 새로운 역사 읽기를 즐길 수 있다. 이야기의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재판과 처형 과정에서 잔 다르크 등이 보여주었던 태도이다. 말 한 마디에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진실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설사 죽음이 기다리더라도. 덧붙여, 토머스 모어 등을 법정에 세워 모욕하고 처형했던 자들이 어떻게 역사에 오명만 남기고 퇴장하는지 '역사의 희생자'들이 어떻게 성인으로 영웅으로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는지 그 면면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