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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것이 마사다 성이다 4 마사다 성에 대하여 8 1. 도전 2. 탐사대의 임무 3. 발굴 작업 개시 4. 유적들 5. 북방의 궁전-별장 47 6. 대형 목욕탕 84 7. 창고 96 8. “아파트먼트” 또는 수비대 건물 9. 비잔틴 회당 120 10. 서궁 126 11. 포곽벽 152 12. “미크베”-침수 세례 목욕실 176 13. 두루마리 성경 180 14. 유대 회당과 두루마리 성경들 194 15. 최후의 방어자가 남긴 것 208 16. 발굴물을 통해 본 마사다의 역사 221 17. 마사다 언덕의 저쪽 224 18. 극적인 최후 250 19. 마사다 성 발굴의 선구자들 258 20. 발굴 작업의 자원자들 278 옮긴이의 뒷글 291 미주 293 |
Yigael Ya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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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 동안 발굴을 하면서 우리 발굴단은 일반 대중이 가해 오는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적지를 마 사다 방문객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몇 가지의 까닭으로 하여 우리는 이 유적지 의 관람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간단하다. 즉 우리가 적절한 안내를 방문객들에게 제공해 줄 방법이 없었으며, 또 발굴한 것들을 그냥 방치함으로 써 손상시켜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었다. 우리 발굴단은 옛날의 유물에 대해 적 절한 존경심을 지니고 취급하도록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유적을 관람하 게 할 만큼 대담해질 수도 없었고 방문객 들이 어딘가 자기들의 흔적을 남겨 놓 기 위해 유적지를 함부로 해치도록 방치해 둔 채 유적지를 공개할 수도 없었다. 1964년 5월 1일 첫 봄철에 발굴을 끝내고 우리가 마사다의 하부 유적지를 떠나 던 바로 그날 많은 노동자들이 마사다에 도착했다
--- p.58 요세푸스는 마사다의 최후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그는 모든 죽은 시체들을 획 둘러보았다. 스스 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혹시라도 여태까지 완전히 죽지 못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나 않나 해서였다. 모두가 숨졌음을 확인하고서는 그는 궁전에다 불을 놓았고 손에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의 칼로 자기 몸을 깊숙이 찔러 친지들 옆에 쓰러져 죽었다 --- p.67 우리 발굴단이 고온 욕실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마루 밑을 발굴 했을 때 나타났다. 그 마루 밑에는 또 다른 마루가 있었다. 두 마루 사이에서 200개 이상의 작은 기둥이 발견됐는데 그 기둥의 대부분은 이 점토 벽돌이 고 온 욕실의 지하 난방실인 마루 밑 난방 장치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모두가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 p.85 발굴의 결과로 비잔틴 시대에 여기에 정주한 사람들은 마사다에서 살았던 소수 그룹의 수도승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마치 그 당시 수도승들이 도시에 서 떨어진 먼 은신처, 가급적이면 사용할 마땅한 건물이 있는 은신처를 찾아서 5세기 혹은 그 이 후에 유대 광야의 여러 곳에 안착했던 것 같았다. 마사다에 있는 수도승들은 마사다 정상에 흩어져 있는 작은 암자에서 거주했다. 몇 사람 은 동굴에서도 살았는데 우리가 발견한 것에 의하면 벽에 칠해져 있던 십자가 를 봐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7세기 초에 페르시아, 족 모슬렘이 이 나라를 정 복함으로써 이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 이후로 마사다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 p.127 헤롯왕이 마사다에 지은 그의 저택에서 조차 그의 가족과 유대인들의 감 정을 거스르지 않으려 했고, 또 그 때문에 그 시대에 관습적으로 많이 그리던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그 곳의 모자이크에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재미있 는 사실이다. 우리가 발견한 모자이크에는 기하학적인 도안이 있었는데 이것 은 그 당시의 희랍 문화권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고 특히 1세기 전 반에 델로스(Delos : 소아시아의 한 섬)에서 널리 사용하던 것이었다. --- p.137 마사다의 궁전들-즉 북쪽 궁전, 서쪽 궁전, 그 밖에 다섯 채의 소궁들은 다 음과 같이 말한 요세푸스의 판단을 무엇보다 더 웅변적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써, 즉 마사다는 헤롯왕과 그의 가족이 위급한 때를 대비해 도피처로 사용할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그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다른 도시에서 익숙해 져 있던 그런 수준의 생활 조건이 다 구비되어 있는 왕궁이었다는 사실이다. --- p.150 매우 어려웠다. 길이가 1,400야드나 되는 성벽은 완전히 붕괴되어 낭떠러지의 안팎으로 흩어져 있어서 포곽벽이 있는 성벽 전체가 마치 마사다를 감고 있는 거대한 암석의 고리 같이 보였다. 일이 너무나 많고 작업도 어려워 수십 명의 지원자(전 인력의 반수)가 파괴된 성벽을 정리하는 데만도 11개 월이 걸렀다. 그 성벽을 발굴하기 이전의 모습이 위 사진에 나타나 있는데, 이 것은 남쪽 지역의 일부이다. 위의 것이 성벽의 대표적인 예이다. 성벽이 이중이 었음을 명확히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발굴을 끝내고 보니 이중 성 벽이 발굴 후 같은 지역을 찍은 사진과 대조되면서 그 면모를 뚜렷이 드러냈다. --- p.158 이 의식용 침수 욕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히브리 어로 미크베(Mikve)라 함.- 이 발견을 정기 기자 회의에서 발 표했는데, 제2성전 시대기27의 미크베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곧 나라 전역에 퍼 지게 되었으며, 특히 정통 종교계와 “탈무드 학자”28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 p.176 탐사를 시작한 지 몇 주간 안 되어 최초의 두루마리 성경을 발견했을 때 의 기쁨이란 가히 짐작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최초로 성경이 발견된 곳은 포 곽 성벽 안의 한 방에서 였다. (포곽 성벽에 대한 도표에 서 밝혔듯이 방이 모두 1,039 개 였다.) 파편 더미를 6피트 이상이나 치우자 겨우 바닥 가까이에 이를 수 있었 다. 그 방은 불에 타지 않았던 까닭에 용기나 의복, 매트, 바구니, 가죽 제품 따 위의 많은 수집품이 남아 있었다. --- p.181 가장 흥미 있는 발견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 발견은 정말 그 건물 이 유대인 회당으로 쓰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뒷 독방을 조사하는 동안 우리 조사단 중에서 건축가였던 더나예브스키와 멘 젤 두 사람이 그곳에서 발견한 두 원주기둥의 밑 둥의 거리를 재고 두 마룻장 사이에 퇴적된 내용물을 조사했다. 그렇게 하면서 점차로 절단 면적을 넓혀 가 다가 우연히 둘둘 말린 두루마리 성경을 발견했다. --- p.201 모두 합쳐 우리는 마사다에서 두루마리 성경, 분리 종파 성경, 경외서 등 두 루마리 부분 14개를 발견했다. 두루마리 성경 연구나 제2기 성전 시대의 문학 연구 면에서 볼 때 마사다에서 발굴한 것 중 가장 귀중한 발견 물들이었다. 두루마리 말고도 또 다른 중요한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패각이나 도 자기 조각들인 이 도자기는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되던 필기도구이다 --- p.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