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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
성민선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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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약속 장소 7
펄 35
굴다리 59
화과자 85
마지막 식사 117
지반침하우려구역 145
알터에고 169
집 193
블루마운틴 219

해설 소진과 허기의 직소퍼즐, 그 너머의 풍경 | 이주은(문학연구자) 248
작가의 말 _ 273

저자 소개 1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과 보건학을 공부했다. 2008년 『한국소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문학사상』 신인상, 5·18문학상을 수상했다. 몸에 새겨진 기억과 허기, 억압에 관심이 있으며 그러한 조건들로 변화하는 삶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135*200*17mm
ISBN13
9788982183911

책 속으로

사람들은 이제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어딘가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차가운 땅바닥에 맨발을 디딘 채 서 있었다. 이제 연극이 끝났으므로 진짜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은 끝없이 불어왔고 몸은 차갑게 식어갔으며 모든 게 멈추려 하는 것처럼 잠이 몰려왔다. 그 순간 침몰하는 의식 속에서 좀처럼 열리지 않던, 내 앞에서 꽉 잠긴 채 닫혀 있던 호텔의 방문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내가 그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깊은 산속 백팔 개의 계단 위에 있는 것처럼 그곳은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 p.29~30

차가운 물에 하얀 뼈들을 담가놓으면 고통이 드러나듯 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엄마는 그 뼈들을 하나하나 보듬으며 물로 씻어 내렸다. 커다란 들통에 담겨진 뼈들은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냈고 집 안 가득 김발을 피워 올리며 고요히 끓어올랐다. 엄마는 오랫동안 고아낸 사골 국물을 나에게 먹였다. 뼛속 깊이 응축된 한이 비명처럼 서려 있는 국물을 먹다 보면 고통을 털어낸 넋이 내게로 다가와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는 것 같았다.
--- p.83

먼 곳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길이 떠오른다. 황혼 무렵 어머니는 어디로 갔던 것일까. 세월이 흘러 나 역시 집을 나가 거리를 헤매며 돌아다니곤 했다. 해 질 녘이면 바람이 심하게 불어왔다. 그것은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처럼 스산하게 들렸다.
--- p.135


오래전에 급하게 연필로 써 내려간 듯한 글씨들은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가버린 사랑만큼이나 모호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분명 작가는 아닐 것이다. 작가라면 자신이 기록한 아이디어를 이런 식으로 내다 버리지는 않겠지. 아마 지나치게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거나 끝내 아무런 성취도 이뤄내지 못한 가련한 습작생일 가능성이 컸다. 오랜 시간 읽고 쓰며 수없이 망설이다가 어느 날 불현듯 그는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책들을 모조리 내다 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렸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켜켜이 쌓여 있는 무거운 짐들을 털어내기 위해 오래된 일기장을 버리듯 자신의 꿈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나는 끝내 이 책을 버리고 만 가련한 습작생을 생각하며 그가 쓴 글들을 바라보았다.
--- p.243~244

출판사 리뷰

소설집이 하나의 풍경화를 완성하는 직소퍼즐이라면, 성민선의 소설집에 흩어진 각각의 퍼즐 조각들은 ‘소진’과 ‘허기’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그러나 직소퍼즐의 흥미로운 점은 조각들이 전부 맞춰졌을 때 각각의 조각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완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진되고 허기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들을 모두 읽은 뒤, 이 소설집의 끝에서 독자들이 마주하는 풍경은 각각의 조각들이 담지하던 이미지의 파편 그 너머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운 풍경이다.

성민선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소진’된 이들이다. 「약속 장소」의 화자는 수없이 면접을 보았지만 거절당했으며, 「펄」의 화자는 혼자 딸을 돌보기 위해 여러 일자리를 거치다가 매춘을 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뒤로한 채, 모종의 이유로 이들은 거리를 돌아다닌다. “무엇인가에 매달려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고 있”는 것에서 피로가 온다면, “무엇인가에 매달려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고 있다가 놓치고 말았다는 허망함”, 그것은 곧 소진이다. 이들은 각각 애인과 딸을 잃었고, 또한 일자리를 잃었다. 「약속 장소」의 화자가 “어쩌면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 역시 살아가기 위해 좀 더 삶을 버티기 위해 필요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듯, 삶을 버티기 위해 꼭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쳐버린 이들은 모두 소진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소진된 두 화자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자 “그림자조차 허락되지 않는 삭제된 인간”이 되어, 그저 걸어 다닐 뿐이다. 그것은 목적을 향한 이동이 아닌 더 이상 선택 가능한 경로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속되는 움직임이다.

「화과자」와 「굴다리」, 「마지막 식사」에는 모두 허기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허기는 배고픔을 넘어 어떠한 의미로도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자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허기 앞에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서둘러 메워버림으로써 스스로 안정되고자 한다. 「화과자」의 지수에게 ‘허기’는 곧 ‘공포’로 귀결된다. 지수는 허기를 느낄 때마다 자신의 몸이 줄어들어 결국에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진다. 이러한 공포는 지수로 하여금 지훈과 결혼하도록 만드는데, 지수는 키가 큰 지훈과 함께라면 자신 또한 더 이상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수는 아이를 낳은 뒤 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그럼에도 지수는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는데, 그는 죽은 이후에도 재혼한 남편과 아들의 곁에 머물며 그들의 일상을 지켜본다. 이들을 지켜보던 지수는 이내 다시 한 세계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빛의 세계”로 가면 항상 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허기를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수는 다시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를 선택한다. 이내 그는 지훈과 그의 재혼한 아내 사이의 딸로 다시 태어난다. 지수의 이러한 선택은 아들의 허기에 응답하기 위해서이다.

「굴다리」에서 임신을 한 화자가 찾는 것은 사골국이다. 그런데 이때 사골국은 단순히 화자의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다. 사골국을 마시며 화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소를 잡는 날이면 화자의 아버지는 의식을 치르듯 기도를 하고, 어머니는 마치 “상처”를 보듬듯 소뼈를 하나하나 씻어 내리며 사골국을 끓인다. 이처럼 화자는 사골국을 먹는 동시에, 그 안에 응축되어 있는 “희생물”을 향한 기도와 제의, 어루만짐의 시간을 느낀다. 그에게 사골국은 “뼛속 깊이 응축된 한이 비명처럼 서려 있는 국물”로 감각된다. 화자의 허기진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타인의 죽음과 고통, 그리고 애도의 시간이다. 이처럼 허기는 화자의 몸을 타인의 흔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타자가 들어올 수 있는 빈자리를 품은 몸, “굴다리처럼 어두운” 화자의 “자궁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허기를 품은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 혹은 그 무엇—심지어는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공간의 개체—들과 얽혀 있다. 「지반침하우려구역」에서 광수와 민석은 서로의 몸을 로프로 묶은 채 폐광 안을 수색한다. 광수가 로프를 움켜쥐면 민석의 몸은 당겨지고, 민석에게 떨어진 돌은 다시 광수에게로 가서 부딪힌다. 탄광촌 지역의 지반이 끝없이 침하되고 있다는 설정 역시 이러한 얽힘의 필연성을 드러낸다. 광수가 민석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 역시, 단순히 민석이 광수로 하여금 카지노의 당첨금을 받지 못하게 한 것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는 과거 그들의 아버지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과도 얽혀 있다. 2대에 걸친 광수의 원망은 “석탄처럼 까맣고 단단한 응어리”가 되어 “광수의 가슴속에서 버석거”린다. 이내 광수는 당첨금을 줄 테니 살려달라는 민석의 제안에도, 자신과 민석을 연결하던 로프를 끊음으로써 로프에 매달려 있던 민석을 죽인다. 그가 끊어내고자 한 것은 단순한 로프가 아닌, 로프가 표상하는 “운명”이다.

「알터에고」의 배경은 오월의 봄이다. 모든 걸 뒤덮은 황사는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경주마들의 말발굽이 일으킨 것인지, 혹은 그저 이 계절에 으레 따라붙는 풍경일 뿐인지 불분명하다. ‘알터에고’는 소설에 등장하는 경주마의 이름으로, ‘사내’는 알터에고를 소개하며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터에고는 또 다른 나(alter ego)라는 뜻이오. 그만큼 절친한 친구란 뜻이지. 당신과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요.” 그런데 우리는 정말 모두를 ‘또 다른 나’로 여기며 절친한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심지어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학살한 자조차도? 반대로, 내가 과거 누군가의 가족과 친구들을 학살했다면, 나는 과연 그의 친구가 되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어쩌면 서로가 서로의 알터에고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내가 너의 가족을 죽였고, 너에 의해 나의 친구들이 죽었다는—에 대한 ‘망각’뿐인 건 아닐까?

소진과 허기는 공통적으로 ‘비어 있음’의 상태를 내포한다. 이러한 ‘비어 있음’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채움’을 가능케 하는데, 이는 새로운 ‘채움’을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을 소진시킴으로써 ‘비어 있음’의 공간을 발생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소진된 주체는 기존에 그를 이루던 것들을 소진함으로써 텅 비어버린 주체가 되고, 이러한 ‘비어 있음’은 허기를 발생시킨다. 그렇기에 성민선의 소설 속 소진된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때 허기진 존재를 새로이 채우는 것은 기존에 그를 채우던—그리고 소진된—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그러나 소진을 곧 새로운 건설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공사가 중단된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던 설계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주체는 미완의 구조물처럼 방치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러한 공간에는 항상 잡초나 먼지, 비둘기, 노숙인, 낙서 등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집」에서 사내가 방치된 공사 현장에 들어가 살듯, 공사가 중단된 “텅 빈 건물”에는 원래대로라면 예정되지 않았을 존재들—가령 “하루 종일 바깥을 떠돌던 개들”과 같은—이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소진은 그렇게 텅 빔으로써 기존의 설계도가 상상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블루마운틴」에서 역시 결국 ‘블루마운틴’에 오르는 것은 화자가 아닌,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 상태”인 ‘그녀’이다. 그런데 이러한 ‘블루마운틴’을 향한 산행은 결코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를 보며 화자는 바람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모래 알갱이를 떠올린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결코 자기의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모래 알갱이”는 “바람에 실려 멀리까지 날아온 모래 알갱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모래알의 이동이 결코 혼자 이루어지지 않듯, ‘그녀’의 등반 또한 타인과의 얽힘 속에서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바람’에 실려 블루마운틴에 오르게 된 ‘그녀’는 “타인의 허기를, 고독을 나누어 짊어지겠다는 만용을 뿌리치”지 않은 허기지고 소진된 주체, “지친 표정”의 주체이다.

“지친 표정”의 ‘그녀’가 서 있는 곳은, 푸른 안개가 밀려드는 눈 덮인 블루마운틴이다. 그곳은 화자가 말하는 완전한 고독의 종착지가 아니다. 타인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열리게 된 블루마운틴. 그곳은 다름 아닌 ‘소진과 허기 너머의 풍경’이다.

추천평

「블루마운틴」에서 생의 이면을 안다고 자부하는 세속적 소설가는 순수한 열정만으로 사랑과 문학의 미망 속으로 걸어가는 어떤 존재를 가엾게 바라본다. 흔한 알레고리는 성민선 소설의 절박함, 자의식과 관련해서라면 특별한 맥락을 얻는다. 벌거벗은 채 도살장과 매음굴, 쓰레기 하치장의 도시를 떠도는 여인의 존재적 결핍과 허기는 긴박한 문장의 호흡에 실려 서사를 압도한다.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여인은 또 다른 여인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끝내 ‘화과자’의 약속 장소에 도달한다. 「약속 장소」 「펄」 「굴다리」 「화과자」는 기원을 위조하는 소설의 오래된 거짓말에 기대어 결핍의 환상이 빚어내는 강렬한 인간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광장의 촛불(「펄」), 오월 광주의 기억(「알터에고」)은 그 처절한 존재의 바닥이 인간다운 삶에 대한 전면적 목마름에 이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소설에 반복 출현하는 나비 이미지는 갈망의 절실함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옹호한다. 성민선 소설의 ‘블루마운틴’은 문학의 언어에 대한 성실하고 끈질긴 헌신을 통해 그 푸른빛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뜨거운 첫 소설집이다. -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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