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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사라진 천란
제2장 인간 대 인간 제3장 붉은 꽃잎 대롱대롱 제4장 드러난 진실 제5장 홀륜하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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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신중록의 눈에 불안한 기운이 스쳤다. 김설은 가질 만큼 가진 자가 저런 눈빛을 보이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배를 보이며 도망치는 뱀을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반딧불만 해진 음성으로 신중록이 속삭였다. “분명 석혜가 키우던 난이었네. 그게 어떻게 여기 한양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예사 난초가 아니라네. 조선 팔도에 단 하나뿐인 천란이야. 내 은밀히 알아보니 선생 댁에서도 난초가 사라졌다더군.”
--- p.11 다리가 없는 시체였다. 한쪽은 정강이, 다른 쪽은 허벅지가 빠져 있었다. 허연 무릎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여름 복달더위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부레처럼 부푼 얼굴에 머리카락이 어지러웠다. 시체 냄새에 눈 속까지 아렸지만 두 사람은 누가 볼 새라 손을 재개 움직여 그물을 발라냈다. 그물에 딸려 올라온 작은 게들이 배 바닥을 돌아다녔다. 게는 시체의 입에서도 기어 나왔다.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 p.27 “무당 노릇을 못 하게 돼요?” 자기 얘기하는 걸 들었는지 무당이 이쪽을 쏘아보았다. 헉! 김설은 급히 눈을 내리고는 후룩 국수를 삼켰다. “누가 굿당에 불을 질렀답니다.” 무당의 왼쪽 얼굴은 화상으로 완전히 문드러져 있었다. 시골에 향약이 퍼지면서 무당을 박해한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굿당에 불까지 지를 줄이야. “유생들은 잘된 일이라 했습니다. 을그미가 부녀자들을 꾀어 요망한 풍속을 퍼뜨린다고 못 마땅해했거든요. 아버님께서도 몇 번인가 을그미네를 부르셔서, 아니, 아닙니다.” --- pp.52-53 “두 분의 죽음을 두고 최홍 같은 자가 그런 식으로 말을 꾸며내다니 놀랍군요. 최홍은 저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를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가령.” 고채가 김설의 손에 낀 반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자기가 김 선생님 목숨을 살려드린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김설은 입을 닫았다. 발 뒤에서 정진허가 엿듣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문득 어제 낮에 월향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룻밤 시중을 든 적이 있다고 해서 네 보기에 진허는 어떤 사내 같더냐, 하고 묻자 잔을 빼앗아 홀짝 마시고는 월향이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고로 배신자가 더 비참한 법이지요.” --- p.71 쾅!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김설이 일갈했다. “아가씨도 제발 정신 차리세요!” “김 선생님, 조리 있게 말씀해보세요. 알아들을 수 있게 말입니다.” “말했잖습니까. 저 자식이 이만과 박희를 죽인 겁니다. 그리고 이젠 이 고씨 댁을 노리는 거라구요.” “그렇다고 치세. 그러니 그만 가봐.”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정진허가 말을 받았다. 튕겨나가 다시 덤비려는 김설을 제지하며 고채가 물었다. “정 진사가 두 분을 어떻게 죽일 수가 있습니까? 배에 타지도 않았는데.” --- p.149 김설은 그렇지 않아도 석혜의 제자들을 만나볼 요량으로 참석한다 답신을 보냈다. “자네는?” 정진허에게 되묻던 김설은 황급히 눈을 돌렸다. 별일도 아니었다. 하겸이가 정진허를 쳐다보면서 입에 자두를 무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자두를 베어 물자 과즙이 하겸이의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잘생긴 턱에서 자두물이 뚝뚝 떨어져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김설은 갑자기 하겸이가 무서워졌다. --- p.197 “서울까지 온전히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대로 입기현을 떠나시면, 김 선생님께는 너무 많은 적이 생깁니다.”“하, 그렇군요. 내가 잊고 있었군요. 당신은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였지. 내가 이렇게 멍청하니 맨날 이용이나 당하지. 크크크.” 헛웃음에 어깨가 들썩이자 빈 소매가 덜렁거렸다. “자네 미쳤나! 어서 아가씨께 용서를 구하게.” 정진허가 말을 맺기도 전에 고채가 말했다. “절대 잊지 마세요. 앞으로는.” 앞으로? 앞으로라고? 김설이 몸을 돌렸다. “당신과 더 이상의 앞으로는 없어. 절대!” --- p.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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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살인과 음모의 뒤를 캐는
역사추리 소설이다 소년 급제하였으나 스물여덟 되도록 관직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던 유생 김설은 어느 날 놀라운 제안을 받는다. 입기현이라는 마을에 내려가서 죽은 석혜 선생이 갖고 있던 천란이라는 난초를 가져오면 대갓집 사위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는 것. 그저 시골 마을에 내려가 난초를 찾아오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김설은 살인사건과 마주한다. 석혜 선생의 죽음은 사고가 아닌 살인으로 의심되고, 심지어 죽은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계속 마을 사람들을 드리운다. 사고인가 살인인가. 살인이 맞다면 범인은 누구이며 의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천란이 사라진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은 우연인가 함정인가. 이 책은 이성과 감성, 현실과 망상, 욕망과 명분 사이의 간극을 추적하는 심리추리 소설이다 입기현 마을은 참으로 기묘했다. 분명 평화롭기 이를 데 없다 들었는데 수면 아래 살기가 도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여인 고채는 마을을 먹여 살리는 거상이자 실질적인 수장이다. 한쪽 얼굴이 일그러진 무당 을그미는 불쑥불쑥 나타나 김설의 혼을 빼놓는다. 성균관 동문 정진허는 어찌해서 이처럼 작은 마을에 내려와 있는지 수상하기 이를 데가 없고, 민하겸은 미끈한 낯으로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홀리고 다닌다. 김설은 그저 석혜 선생 죽음의 내막을 파헤치고자 했는데, 사라진 난초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이해 못할 상황에 맞닥뜨린 채 죽음의 위험에까지 빠졌는가. 그는 성균관에서 배운 리(理)로 세상을 해석하려 하지만, 이 마을에는 김설이 배운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만 통하는 낯선 질서가 있다. 이것은 곧, 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원칙이다. 이 책에는 입체적 캐릭터들의 병립과 대립이 살아 있는 정념의 소설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네 사람이 있다. 김설, 확증편향에 빠진 유생. 고채, 병법을 읽고 실행하며 실질적으로 마을을 통치하는 거상. 정진허, 세상을 냉소하면서도 구원을 꿈꾸는 귀족. 민하겸, 누구에게나 유혹적이지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미청년. 이 네 사람의 관계는 병립과 대립으로 얽혀 있다. 함께 걷다가도 손을 놓고 서로를 공격한다. 나란히 마주 서서 관계를 이어가다가 엇, 하는 순간에 조선 중기 수직적 관계 공식을 따른다. 누가 범인인가. 누가 누구를 속이는가. 그는 진심인가. 그녀는 진심인가. 끝없이 의심하고 캐묻고 돌아섰다가 잡아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선과 악, 옳고 그름, 적과 동지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다. 각자의 욕망과 판단, 상처와 망상이 충돌하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리의 세계》는 감정에 따라 흘러가는 일종의 정념의 소설이다. 이 책은 누가 무어라 해도, 사랑 이야기다 김설의 고채에 대한 감정은 어지러이 굴곡지다. “이 집 아가씨는 뭐랄까, 좀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나?” 모두가 절세가인이라 칭하는 고채의 첫인상을 두고, 김설은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더니 한순간 주책없이 고채에게 빠져든다. ‘고채는 속세의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를 감싼 공기만 다른 세상의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김설은 이제 저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고채를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좇던 김설은 더는 숨길 수 없이 빠져 끝내 자신만의 착각과 확신으로 상대에게 활을 날린다. “하, 그렇군요. 내가 잊고 있었군요. 당신은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였지. 내가 이렇게 멍청하니 맨날 이용이나 당하지. 크크크.” 김설은 말 그대로 고채에게 미쳐간다. 김설이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과 고채에게 미쳐가는 과정은 똬리를 틀어 올리듯 하나로 엮이어 극의 마지막까지 독자의 심장을 조인다. “그 여자는 나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나를 무너뜨릴 생각이었을까?” 김설은 처음엔 고채를 의심했고, 그다음엔 두려워했고, 결국엔 사랑했다. 그 사이에서 김설은 무너지고, 정의와 진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리의 세계》는 결국 사랑 이야기다. 사랑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고,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며, 그 둘이 구분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 이르면 역사와 추리, 무엇도 아닌 사랑만이 기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