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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의 집2. 귀신의 집3. 부마자의 집4. 사제의 집5. 시체의 집6. 영주의 집해설 | 오컬트 자본주의와 공포의 주소지_박인성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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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가 튄 집과 불티를 품은 인간은 반드시 발아한다.” 욕망에 빙의된 나라에서 귀신 들린 부동산만큼 현실적인 공포가 또 있을까 오컬트 자본주의, 그 장르의 완성 갑작스러운 부모의 실종 이후, 주인공 ‘나’는 프린츠하우스의 유일한 주인이 된다. “그건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프린츠하우스라는 거대한 생물이 내린 결과였다. 나는 고래 뱃속에 빨려든 목각인형일 뿐이었다.”(11쪽) 그곳에 이전 집주인의 딸 ‘너(전승아)’가 세입자로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원인 모를 환시와 환청에 시달린다. “귀접이다.”(83쪽) 지인인 무당 한신을 통해, 전승아가 한 단지 안에 온갖 독충을 넣어 서로 잡아먹게 한 뒤 끝내 살아남은 한 마리에 독을 응축시켜 저주를 거는 ‘고독(蠱毒)’에 빙의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건 악귀와는 좀 달라. (…) 고독은 독을 가진 생물을 독 안에 모아 서로 다투고 죽이길 기다렸다 살아남은 한 마리로 강한 저주를 걸 수 있는 영적 무기야.”(91쪽) 하지만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원과 한이 동반된다. “예컨대 독개미를 두꺼비가 먹고, 그 두꺼비를 지네가 먹고, 그 지네를 뱀이 먹고, 닭이 뱀을 먹으며, 사냥개가 그 닭을 먹어 완성되는”(92쪽) 최종형의 고독이 바로 프린츠하우스인 셈이다. 영주의 성이라는 이름처럼 돈과 권력, 계급의 최상층을 향한 욕망은 사람들 내면에 ‘불티’처럼 잠재해 있다가 언제든 발화한다. 이처럼 『프린츠하우스』는 오컬트 호러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 서늘한 이야기가 끝내 겨누는 것은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부동산이 곧 신분이 된 사회에서 집은 가장 현실적인 욕망의 대상이자 초자연적인 공포의 무대가 된다.” 박인성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이를 “‘오컬트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해설, 294쪽), 이 작품만큼 그 공포의 실체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소설이 또 있을까. “형상에 집착하지 마라. 고독도 악귀도 악마도 결국 하나다.” 욕망은 늘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책장을 덮는 순간, 공포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고독’이라는 저주를 중심으로 부적과 주술, 굿이 난무하는 한국적 오컬트일 것이라 짐작하는 순간, 소설은 독자의 예상을 단숨에 전복한다. 비현실적이고 불가해한 현상이 이어질수록 프린츠하우스라는 견고한 세계에는 균열이 생기고, 이웃들의 실종과 죽음 뒤에 감춰진 과거의 비밀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비밀의 중심에는 악마에 빙의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구마사제 이사악이 있다. “흔치 않은 세례명이죠.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부정한 뜻이 되기도 하니까요. 제 전임 신부님의 세례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분은 본명도 이사악이셨어요.”(138쪽) “동서양이 만나는 오컬트 호러, 기대 이상이다”라는 서미애 소설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하나의 주술적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야기는 “토착 무속의 ‘고독’에서 출발해 가톨릭의 악마 ‘마몬’으로, 무당의 부적에서 라틴어 구마경과 성수·성유로 해석의 틀”(해설, 301쪽)을 확장하며 오컬트 장르의 문법을 새롭게 써 내려간다. 작품을 관통하는 ‘형상에 집착하지 마라’라는 경고처럼, 이 작품은 욕망이 언제든 다른 외피를 하고 우리를 찾아와 영혼마저 현혹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왜냐하면 ‘불티가 튄 집과 불티를 품은 인간은 반드시 발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린츠하우스』의 진짜 공포는 책장을 덮은 뒤 시작된다. “잘 읽히는 오컬트 호러 한 편을 다 읽었다고 안심하는 순간, 빙의된 것은 악마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망이었음을, 그리고 자본이라는 이름의 악령 앞에는 아직 구마사제가 도착하지 않았음”(해설, 315쪽)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에까지 침범하는 이런 공포야말로 오직 강지영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서사의 경지다. · 작가의 말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세상에 없는 악마를 소환했다. 악몽으로 마음의 빗장이 허술해진 틈을 타 남자가 짐을 찾으러 돌아오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프린츠하우스』를 완성한 뒤부터 악몽이 끊겼다. 어쩌면 내 시선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남자의 붉은색 보스턴백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겪어낸 덕에 『프린츠하우스』를 쓸 수 있었으니 내게는 전화위복인 셈이다. 혹 그곳에 눌러앉고 싶거든, 주인 무시하는 우리 고양이나 조련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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