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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정말 바뀌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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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어떻게 대한민국의 국기가 되었는가?
제1절 태극기 그림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 도서역에 대하여 2. 도서역의 세 계통 ① 유목의 태극 그림 ② 주돈이의 〈태극도〉 ③ 소옹의 〈복희팔괘방위도〉 3. 태극 그림의 발전 ① 주희의 태극 그림 ② 황공망의 〈복희선천시화지도〉 ③ 래지덕의 〈원도〉 ④ 조휘겸의 〈천지자연지도〉 ⑤ 조중전의 〈고태극도〉 4. 대한민국 태극기는 중국의 〈고태극도〉를 조금 변형시킨 것이다 제2절 태극기는 어떻게 대한민국의 국기가 되었는가? 1. 태극기의 제정 경위 ① 조선 국기를 최초로 거론한 청의 황준헌 ② 조선 국기로 중국의 〈고태극도〉를 제안한 청의 마건충 ③ 중국의 〈고태극도〉를 현행 태극기 모양으로 결정한 영국의 제임스 ④ 일본 땅에서 처음으로 게양된 태극기 2. 태극기의 변천 과정 ① 일본 『시사신보』에 실려 있는 조선의 국기 ② 고종이 국기로 공포한 당시의 태극기 ③ 임시 정부 당시의 태극기 ④ 미 군정 때 제작한 태극기 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의 태극기 제3절 태극기는 잘못 그려져 있다 1. 태극기는 어느 부분이 잘못 그려져 있는가? ① 음양의 그림이 잘못되어 있다 ② 음양의 색깔이 바뀌어 있다 2. 잘못 그려진 태극기가 국기로 정해진 원인은 무엇인가? 태극기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개념 제1절 태극이란 무엇인가? 1. 『장자』에 처음 등장하는 태극 용어 2. 『주역』 「계사전」의 태극은 점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 3. 한당 시대 유학자들은 태극을 '원기'로 해석하였다 4. 위진 시대 현학가들은 태극을 '무'로 해석하였다 5. 송명 시대 신유학자들의 태극에 대한 해석 ① 주돈이……태극은 기 ② 소옹……태극은 수 ③ 장재……태극은 기 ④ 주희……태극은 리 ⑤ 주희 이후의 태극 개념 6. 조선 성리학자들의 태극에 대한 해석 ① 여말 선초의 태극 개념 ② 조선 초기의 태극 개념 ③ 조선 중기의 태극 개념 ④ 조선 후기의 태극 개념 제2절 음양이란 무엇인가? 1. 춘추전국 시대의 음양 개념 2. 진한 시대의 음양 개념 3. 위진과 수당 시대의 음양 개념 4. 송명 시대의 음양 개념 제3절 괘란 무엇인가? 1. 괘란 무엇인가? 2. 효란 무엇인가? ① 효의 명칭과 의미 ② 효의 기원 3. 팔괘를 그린 사람과 그 시대 4. 팔괘의 기원 5. 팔괘의 성질과 팔괘가 상징하는 것 대한민국의 국기는 바꿔야 한다 제1절 태극기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 1. 영조 책봉례 봉사도의 태극 그림 ① 왜 감리 두 괘만 그려져 있는가? ② 음양의 그림은 왜 그런가? ③ 봉사도의 태극 그림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④ 태극기 전문가의 이상한 해석 2. 그릇된 국기 선양 ① 감은사 기단석의 태극 도형이라는 것 ② 태극기 도형이 새겨져 있다는 고려 말의 범종 ③ 국기선양회의 태극기에 대한 인식 수준 3. 태극기에 대한 억지 해석 제2절 대한민국의 국기는 바꿔야 한다 1.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2.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희극 3. 껍데기뿐인 국기 교육 4. 우리에게는 우리 것이 없는가? 5. 예상되는 독자들의 몇 가지 질문에 미리 답함 6. 동해물이 온 바다를 뒤엎고 백두산이 하늘을 찌르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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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무엇이 문제인가
국기가 갖는 존엄성과 태극기가 갖는 문제점은 구별되어야 한다. 더욱이 통일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는, 국기로서의 태극기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태극기'가 '국기'였다고 해서 '태극기=국기'라는 도식이 저절로 성립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태극기가 도대체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1) 태극과 음양과 괘가 우리 민족의 상징인가? 우리는 우리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부른다. 태극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흰색 바탕의 가운데에 원으로 표현된 '태극', 원 안의 위아래에 위치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음양', 사방 대각면에 배열된 네 개의 '괘'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태극기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그림이자, 개념인 '태극'과 '음양'과 '괘'는 과연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데 적합한 것일까? 태극·음양·괘로 이루어진 태극기 그림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태극기 그림의 형성 과정을 살피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태극기 그림은 중국 도서역(圖書易)의 〈선천도(先天圖)〉 계통의 그림으로, 북송 시대 소옹의 〈복희팔괘방위도(伏羲八卦方位圖)〉가 명대에 〈고태극도(古太極圖)〉로 발전되었고, 이것이 다시 조선 말에 태극기로 변형된 것이다. 도대체 『주역』의 점치는 과정을 표현한, 이름도 낯선 그림들을 변형하여 한국 국기로 삼아야 될 이유가 없음을 저자는 치밀한 증거와 고증을 통해 밝히고 있다. 태극기 그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태극과 음양과 괘의 개념은 무언가 위대하고 신비로운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자. '태극'이란 용어는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점괘를 얻는 최초의 근원으로서 점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고, '음양'은 처음에는 '양달'과 '응달'이라는 자연계의 대수롭지 않은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였다. '괘'는 중국 주(周) 초기에 점을 치기 위해 그려진 부호였다. '태극'과 '음양'과 '괘'는 상고 시대 중국 민족의 지혜의 산물이었고, 중국 고대 철학사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개념들이지만, 도대체 우리 민족의 정서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우리의 정체성을 되묻는 개념임을 저자는 중국과 한국의 철학사를 종횡무진 관통하며 밝히고 있다. 2) 태극기의 제정 과정, 알고 보면 치욕스럽다.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된 과정 역시 알고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태극기는 두 번 국기가 되었다. 한 번은 조선 말 청의 간섭을 받던 시대에 한 중국인의 제안에 의해 태극·팔괘 도식의 〈고태극도〉가 조선 국기로 수용된 후,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바다 위 일본 배 안에서 한 영국인(James)의 수정에 의해 그 형태가 태극·4괘 도식으로 둔갑하여 국기가 되었다. 또 한 번은 해방 후, 일제로부터 올바른 민족 교육을 받지 못했던 식민지 지식인들에 의해 태극기는 대한민국 국기가 되었다. 【1-1】조선이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 국기의 도식을 처음 말한 사람은 청의 황준헌(黃遵憲)이었다. 그는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조선은 중국의 용기(龍旗)를 그대로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아무런 반발 없이 황준헌이 종용한 대로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에게 주청하였다. 이홍장은 조선 왕의 '용을 그린 네모난 기(畵龍方旗)'가 중국과 비슷하므로 국기로 삼으라 하였다. 조선의 국기를 중국의 속국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삼으려 한 저의를 드러낸 것이다. 이후 국기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는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의 전권부관 김홍집과 청의 사신 마건충(馬建忠)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의 필담 내용은 『청국문답(淸國問答)』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제1차 회담 마건충은 이응준이 손수 그려 보여준 국기 도식이 일본 국기와 비슷하여 혼동되고, 황준헌이 말한 중국 용기 또한 타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의 국기는 '흰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白底靑雲紅龍)'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고, 용의 발톱을 네 개로 하면 청의 용기(다섯 발톱)와 구분될 것이라고 하였다. 김홍집은 그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제2차 회담 김홍집은 1차 회담의 '홍룡청운'기가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고, 홍색 바탕에 청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원을 사용한 도식을 국기로 할 것을 마건충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마건충은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 대답도 없이, 바탕은 흰색, 가운데는 태극 그림, 바깥 둘레에는 팔괘를 사용한 도식(〈고태극도〉)을 조선의 국기로 할 것을 명한다. 이에 김홍집은 명을 받들었다. 【1-2】마건충이 〈고태극도〉 도안을 조선의 국기로 제안한 지 불과 2개월 뒤,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일본은 제물포조약 당시 임오군란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였다. 박영효는 이 때문에 일본에 사죄하기 위해, 일본 배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이 때의 4개월간의 사행(使行) 일을 기록한 『사화기략(使和記略)』이라는 일기책을 남겼는데, 『사화기략』을 통해 태극기가 본래의 〈고태극도〉에서 4괘가 빠지고, 괘가 왼쪽으로 45도 각도로 기울어지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다. ① 메이지마루 선중에서 수신사 일행은 태극·팔괘 도식의 〈고태극도〉를 가지고 영국 영사 애스턴과 영국인 선장(제임스)과 함께 국기에 대해 상의하였다. ② 메이지마루 선장이 〈고태극도〉에서 팔괘의 분포가 조잡하고 불분명하며, 다른 나라들이 이를 보고 제작하는 데 매우 불편하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팔괘 중 4괘를 없애버리고 나머지 4괘를 네 모퉁이에 그려 넣을 것을 제의하였다. ③ 이 영국인 선장이 처음으로 태극기 대·중·소 3본을 그렸다. ④ 원래의 〈고태극도〉 도안은 선장의 말에 따라 군주의 기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2】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문교부에서 국기의 도식과 규격을 통일하기 위하여 1949년 1월 14일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열어 각계에서 위원을 선임할 것을 결정하고, 2월 3일 42인의 국기시정위원을 위촉하였다. 이들은 당시 제출된 5개의 태극기 도안(5개의 도안은 모두 태극 도형인데 괘나 음양의 위치 정도만 달랐음)을 심의하여, 이 가운데 제3도안을 채택하여 국기로 결정하고, 10월 12일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드디어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서 공포하였다. 이때 채택된 제3도안이 바로 오늘날의 태극기이다. 정부 수립은 태극기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국기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일제로부터 올바른 민족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식민지 지식인들에 의해 태극기는 우리 민족의 그 무엇도 상징하고 있지 않으면서 이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로 결정되었다. 태극기는 거론―제안―결정―사용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우리 민족의 주체성·우리 민족의 정체성·우리 민족의 상징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부여됨이 없이 대한민국의 국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처럼 그동안 우리가 알고 싶지 않았던, 은폐되어 있던 태극기 제정 과정을 낱낱이 밝히며, 우리의 주체성과 정체성, 민족의식을 질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