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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I 약학의 역사에 남아 있는 선물 같은 순간
1 부 고통과 감각 1장 타이레놀, 친숙함의 함정 2장 아스피린, 프레이밍 효과 3장 마약성 진통제, 코브라 효과 4장 국소 마취제, 그릿 5장 수면 마취제, 설계된 잠 2 부 생존과 공포 6장 항생제, 마법의 탄환 7장 백신, 인간과 질병의 계약 8장 스페인 독감, 최종 수사 보고서 9장 인슐린, 인슐린의 역설 10 장 비타민, 리비히의 나무통 3 부 욕망과 균형 11 장 경구 피임약, 내 몸의 버튼 12 장 체중 조절제, 기름통이 가득 찬 자동차 13 장 탈모 치료제, 정보 피라미드 바닥의 희망 14 장 우울증 치료제,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 에필로그 | 선물 같은 순간을 기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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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없이 질문을 삼키기만 하던 그때, 나의 진로를 결정해 준 한 장의 사진을 만났다.
“왓슨과 크릭이 이 사진을 보고 DNA 구조를 밝혔다.” 화면에 뜬 것은 흐릿한 점들이 X자로 번진 흑백 사진이었다. 내가 아는 DNA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저게 어떻게 이중나선이 된다는 걸까. 한참을 망설이다 질문했고, 돌아온 답은 명쾌하고 잔인했다. “그걸 해석해내는 게 과학이고, 자세히 알고 싶으면 대학원에 가야 한다.” 프롤로그 〈약학의 역사에 남아 있는 선물 같은 순간〉, 4~5쪽 편의점에서 껌처럼 쉽게 살 수 있는 약 한 알이 감정과 공감 능력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이 약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누명을 쓰고 60년 넘게 버려졌던 역사나, 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친숙하다는 이유로 쉽게 잊힌다. 은박 껍질을 뜯어내는 그 번거로움이, 약을 캔디처럼 여기는 인간의 인지적 지름길을 향해 국가와 제약사가 쳐둔 방어선이다. 약과 독을 구분하는 것은 성분이 아니라 ‘용량’과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경계심’이다. 그렇다면 이 경계심을 무디게 하는 ‘친숙함’이라는 감각은, 과연 약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1장 〈타이레놀, 친숙함의 함정〉, 26쪽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십만 종의 식물 중 인간의 통증을 이토록 강하게 잠재우는 성분을 가진 것은 사실상 양귀비뿐이다. 수십만 분의 1이라는 극악의 확률을 뚫고 나타난 이 ‘화학적 열쇠’를 두고,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 착각해 왔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우리의 뇌는 양귀비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엔도르핀’이라는 내생적 안식처를 이미 마련해 두었을 뿐이다. 양귀비의 모르핀은 그저 그 정교한 시스템에 우연히 들어맞은 ‘가짜 열쇠’였던 셈이다. 얀센이 이 가짜 열쇠를 극한으로 갈아 펜타닐이라는 마스터 키를 만들었으나, 고통을 지우려 했던 그 효율적인 칼날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3장 〈마약성 진통제, 코브라 효과〉, 58~59쪽 팬데믹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2019년의 코로나19 역시 우리 앞에 새로운 사건 파일을 던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눈을 감고 싸우지 않는다. 요한 훌틴이 얼어붙은 땅에서 찾아낸 진실, 토벤버거가 복원한 몽타주, 그리고 길리어드팀이 만든 수갑은 인류가 질병이라는 영리한 범인에게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약(Medicine)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이 오래된 수사 기록을 복기하는 과정이다. 적의 이름을 정확히 부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놈의 발목을 묶을 수갑의 원리를 이해할 때, 비로소 인류의 생존이라는 가장 오래된 계약은 유효하게 지속될 수 있다. 8장 〈스페인 독감, 최종 수사 보고서〉, 143쪽 과학은 당뇨병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던 병에서 ‘삶을 스스로 관리하는 병’으로 그 패러다임을 바꿨다. 인슐린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류애에서 출발한 약이 산업의 힘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했고, 동시에 그 산업의 논리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을 남겼다. 9장 〈인슐린, 인슐린의 역설〉, 162쪽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GLP-1 약물들이 결국 외부에서 넣어주는 ‘모방 호르몬’이라는 점이다. 우리 몸은 외부에서 호르몬이 계속 들어오면, 스스로 호르몬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 점차 덜 작동하는 방향으로 적응한다. 비싼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 약을 중단하게 되면, 억눌려있던 식욕이 다시 증가하고 본래의 GLP-1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리바운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환자들은 결국 살이 찌는 공포에 갇혀, 상당한 비용 부담을 감수하며 인체 호르몬을 ‘구독’하는 늪에 빠지게 될 수 있다. 12장 〈체중 조절제, 기름통이 가득 찬 자동차〉, 225쪽 하지만 데이터의 해석에는 언제나 함정이 존재한다. 가령, 타이레놀을 먹고 두통이 해소됐다고 해서, 두통의 원인이 타이레놀 결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라는 개념이 있다. 총을 먼저 쏘고, 탄착군이 모인 곳에 과녁을 그린 뒤 정확히 명중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패턴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패턴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관계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14장 〈우울증 치료제,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 24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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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년의 누명을 쓴 진통제와 '영웅'이라 불린 마약
타이레놀의 성분 아세트아미노펜은 1893 년 권위 있는 생리학자에게 위험한 물질로 지목된 뒤 오랫동안 외면받았다. 누명을 벗긴 사람은 생화학자 브로디와, 박사 학위도 없던 연구 보조원 액설로드였다. 반대로 바이엘은 모르핀에 아세틸기를 붙인 물질에 '영웅'이라는 뜻을 담아 헤로인이라 이름 짓고, 중독 없는 약이라고 광고했다. 아스피린은 분자가 거의 그대로인데도 시대마다 자연의 진통제, 산업의 혁신, 빼앗아야 할 적국의 자산, 심혈관 예방약으로 다르게 읽혔다. 진통제와 마취제를 다루는 1 부는 약의 운명을 바꾼 것이 성분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약국 선반 위의 흔하게 볼 수 있는 약을 다시금 보게 한다. ▼ 천연두와 맺은 계약, 1918 년 독감의 수사 기록 2 부는 감염병과 당뇨병, 영양 결핍을 다룬 약의 역사를 장마다 다른 틀로 풀어낸다. 항생제 장은 병원균만 골라 맞히는 '마법의 탄환 을 찾는 여정이고, 백신 장은 천연두와 인류의 관계를 강제 계약에서 시작해 면책 조항과 약관 변경을 거쳐 1980 년 계약 종료에 이르는 한 편의 계약서로 읽는다. 스페인 독감 장은 수사 보고서다. 1951 년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스물일곱 살 대학원생 훌틴은 46 년 뒤 일흔셋의 나이로 다시 그 땅을 찾아 '루시'라 이름 붙인 희생자의 폐 조직을 채취했고, 이 시료로 1918 년 바이러스의 유전체가 복원되었다. 노벨상 상금을 나누고 특허를 1 달러에 넘긴 인슐린 미담의 이면, 각기병을 막으려던 일본 해군의 식단에서 카레라이스가 퍼진 사연도 이어진다. 연표를 외우는 부담 없이 과학사의 굵직한 장면을 이야기로 만나게 한다. ▼ 피임약에서 위고비까지, 욕망과 만난 약 1960 년 경구 피임약은 환자가 아닌 건강한 사람의 삶을 설계하려고 승인된 첫 의약품이 되었다. 3 부는 이처럼 약이 치료의 영역 밖으로 나와 욕망과 만나는 장면을 다룬다. 몸을 자동차에 빗댄 체중 조절제 장은 갑상선 호르몬, 제 1 차 세계대전 때 폭약에 쓰이던 DNP 에서 시작해 약 18 조 원의 배상 기금을 남긴 펜펜, 대규모 임상시험 끝에 퇴출된 리덕틸, 주 1 회 주사로 시장을 바꾼 위고비까지 살을 빼려는 시도가 치른 대가를 보여준다. 탈모 치료제 장은 후기와 소문이 검증된 정보를 밀어내는 시장을, 우울증 치료제 장은 항우울제와 ADHD 치료제에서 우연히 발견된 효과를 설명하려고 나중에 이론을 세운 과정을 짚는다. 기대와 과장이 뒤섞인 약 앞에서 무엇을 묻고 따져야 하는지 알려준다. ▼ 실패한 실험에서 태어난 약, 기록에서 지워진 이름 리도카인은 실패한 농약 연구에서 나왔다. 보리의 해충 방어 성분 그래민을 농약으로 만들려던 연구는 살충 효과가 없다는 결론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화합물에서 국소 마취제의 가능성을 본 에르트만은 학부생 뢰프그렌과 연구를 이어갔지만, 연구비를 대던 회사가 등을 돌리자 그마저 손을 뗐다. 혼자 남은 뢰프그렌은 밤에 강의해서 번 돈으로 시약을 샀고, 학부생 제자 룬드퀴스트와 함께 오늘날 국소 마취제의 표준이 된 리도카인을 만들었다. 저자는 이 과정을 심리학자 더크워스가 말한 '그릿', 곧 방향을 바꾸지 않는 열정과 멈추지 않는 끈기로 읽고, 학부생 제자들과 꾸려가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기록에서 밀려난 이름도 함께 불러낸다. 아스피린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는데도 공식 기록에 역할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아이헨그린, 밴팅보다 몇 달 앞서 췌장 추출물의 효과를 발표하고도 외면당한 파울레스쿠, 비타민 B1 을 처음 분리하고도 '비타민'이라는 개념을 세운 공을 유럽 과학자에게 내준 스즈키 우메타로가 그들이다. 위대한 발견이 몇몇 천재만의 몫이 아니었음을 일깨운다. ▼ 약국 조제대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설명 2009 년 신종플루가 번지던 때, 거점병원 약국에는 평소의 서너 배에 이르는 처방전이 밀려들었고 거의 모두가 타미플루였다. 내성을 걱정하는 환자들에게 저자는 끝까지 복용하라는 원론적인 답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책의 Lab box 에서 저자는 그때 다 하지 못한 설명을 뒤늦게 건넨다. 바이러스 효소의 아미노산 하나가 바뀌면 왜 타미플루가 듣지 않는지를 구조 그림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책 곳곳에는 현장의 기억도 담겼다. 영업사원으로 리덕틸을 팔던 시절, 퇴출로 이어질 임상시험이 막바지였는데도 현장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고백이 있고, 영국 노팅엄의 드럭스토어에서 이부프로펜 열 알이 50 펜스에 팔리던 풍경이 있다. 약을 둘러싼 과학과 산업을 안쪽에서 지켜본 저자는 독자에게 약을 이해할 언어를 쥐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