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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 10
1장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과 독자성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과 독자성 • 16 ‘시그림’속의 의경(意境)과 서정 -최서림의 시와 그림 • 39 백치의 머리와 색맹의 눈 - 김종의 시·서·화와 예술적 상상력 • 55 시조와 그림의 간극과 동질성 - 권갑하의 시조와 달항아리 그림 • 69 문학과 인접예술의 상호 작용 - 박덕은의 문학과 미술세계 • 82 2장 감각의 충돌과 동화 시조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림 - 김민정 시조집 『누군가 부르기 전에』 • 94 그림이 시가 되고 시가 그림이 되는 자리 - 백혜옥의 시와 그림• 104 색채이미지와 사물의 감각화 -박덕은 그림시집 『당신의 저녁이 되고픈 날』• 116 임원식의 시와 컬렉션에 나타난 상호 텍스트성 • 135 감각의 충돌과 동화 - 김민정의 시조와 상호 텍스트 읽기• 164 3장 상호 텍스트적 관점으로 본 디카시 상호 텍스트적 관점에서 디카시 읽기 • 204 디카시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 - 강대선 디카시집 『추억나비』• 239 존재의 방식 모색과 생명성 탐구 - 손덕순 디카시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도』 • 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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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의 친연성과 독자성
1. 들어가면서 ‘시와 회화’의 관계에 대한 최초 언급은 글과 그림이라는 형상이 생기기 시작했던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술이 예술로 처음 등장했던 시기부터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졌다. 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그림은 말없는 시,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고 하였다. 시를 읽으면서 회화를 떠올리기도 하고 또 그림에서 시적인 부분을 찾아내기도 한다. 모든 예술이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문학과 미술이 유독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심상(心象) 때문이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형상인 심상, 즉 ‘이미지’는 반드시 시각적 이미지만은 아니다. 오감(五感)의 청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등 다양한 감각도 있다. 독서를 할 때 느껴지는 이러한 감각들을 하나의 형상으로 묶어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감각의 이미지 중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른 감각의 이미지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글에서 꽃의 향기가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는 꽃이라는 시각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해야 하고, 가시에 찔렸을 때 느껴지는 고통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나 장미를 떠올려야 한다. 모든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서 시각적 이미지가 무조건 전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청각이나 촉각적 이미지를 생동감 있게 활용하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가 필요하다. 이렇듯 이미지로 대표되는 그림이 문학과 친연성을 갖고 있다고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지를 근저에 두기 때문이다. 독서를 하는 사람에게 상상의 여지를 준다. 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감상자에게 이야기를 만들게 한다. 글과 그림은 이미지라는 특성을 매개로 아주 가까운 예술로 여겨왔다. 한자문화권에서의 시·서·화(詩書畵)의 일체론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본래 상형문자로 출발한 한자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을 갖고 만든 한자는 글자를 쓰는 행위는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과거에는 붓을 하나로 공유했다. 붓으로 시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그림 그리는 행위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인이면서도 화가였다. 오늘날처럼 문학과 미술이 각각의 장르로 완벽한 독립을 하기 이전, 전통과 근대 사이에 있던 문인과 화가들은 서로에게 이끌린 듯 어우러졌다. 2. 문학과 미술의 독자성 근대의 시작과 함께 서구문학과 미술이 유입되면서 문학과 미술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가장 큰 가시적인 변화는 미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양화는 이전의 붓과 벼루와는 다른 도구와 안료인 재료가 다르다. 서양화의 대표적인 안료인 유화는 기름을 물감과 섞어 쓰며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물론 최근에는 서양화와 동양화, 또는 한국화를 경계짓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서양화가 들어오면서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화가와 문인이 본격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분리되면서 ‘너와 나’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서로’의 개념이 생기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타자를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하나의 형태로 이루어진 글과 그림이 각각 문학과 미술이라는 장르로 분화되어 서로를 조망하면서 서로의 타자가 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근대적 자아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문학과 미술의 독자성에서 미술은 화면에 물감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재현한다는 고유성이 있다. 이른바 시각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와 반면에 문학은 오직 문자만을 절대적인 표현수단으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미술은 미술만의 방식으로 발전하여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깨닫고, 문학은 문학만의 방식으로 세계화의 소통하는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친연성을 유지해온 문학과 미술은 오늘날 그것들만의 독자성으로 인해 더욱 생산성을 지니게 되었다. 3.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 문학과 미술이 분리되었어도 이 두 장르의 친연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근대미술 초기의 미술비평은 모두가 문인들이었다. 문인들의 미술비평은 화가들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지지만, 화가들과는 또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 근대적 의미의 문학과 미술이 이제 막 생겨났기에 비평 행위에 대한 정의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인신공격적인 부분이 많았다. 또한 글의 대상이 작가를 향하는 것인지, 독자를 위한 것인지도 구분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가장 활발하게 미술비평을 전개한 김복진(1904~1940)은 비평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칭찬 아닌 평문은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일본 어떤 문인은 말했다마는 나는 뒤바꾸어 욕이 아닌 비평을 쓸 까닭이 없다고 한다. 칭찬하려면 쓸 것도 없이 입만 딱 닫는 것이 제일 날 것이 아니냐.” -김복진, 「제4회 미전인상기」, 〈조선일보〉, 1925. 6. 2~7.) 이러한 비평에 대한 인식으로 화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나혜석, 최우석 등의 화가들과 감정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이광수나 이종우도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의 귀국전에 대해 미술비평을 하기도 하고, 심훈도 미술비평문을 남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쓴 안석주는 미술비평뿐만 아니라 영화비평도 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개최하는 ‘선전(鮮展)’에 감상문을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미술비평은 순전히 감상문 수준으로 인신공격 등 글쓴이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 일쑤였지만, 미술비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미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었다. 지금에야 전문 미술비평가가 미술의 영역을 맡아 비평하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 때문에 문인들이 우리나라 근대미술비평의 문을 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인들이 미술비평문을 작성하게 된 동기는 간단하다. 미술비평문이 미술의 내용을 담고 있어도 글로 표현되는 비평문의 특성상 글을 쓰는 사람에게 유리했다는 점, 그리고 문인들이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열렬히 사랑했다는 것, 처음부터 계속 깔고 가는 전제는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이 아닐 수 없다. 문학과 미술이 가진 장르의 특성이 문인과 화가들을 서로 끌어당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는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로 인해서 잡지가 쏟아져 나온다. 문학이 보다 활성화되는 계기를 만드는 수많은 문예지들을 창간하였다. 부자였던 최남선은 일본에서 인쇄기를 사가지고 와 《소년》지를 만든다. 잡지 만드는 일은 간단하지가 않다. 이를테면 표지 디자인, 전반적인 디자인이 필요하는데, 여기에 화가들이 참여한다. 앞에서는 미술비평에 문인들이 참여하였는 바, 이번에는 화가들이 참여하게 되어 문학과 미술은 숙명적으로 만남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1914년에 만든 잡지 《소년》의 표지에는 청년이 호랑이를 끌고 가는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은 〈동아일보〉 창간호의 디자인을 맡았다. 김동인이 1924년에 창간한 《영대》에 김관호가 속지화를 맡았다. 표지화는 우리나라 3호 서양화가 김찬열(1889~1960)이 참여한다. ‘김유방’은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김찬영이었다. 김찬영은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표지화와 장정을 도맡아 양귀비꽃을 전면에 그려 넣어 음악과 미술과 글이 함께 어우러지는 표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축시」도 직접 썼다. 화가이면서 문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문인이면서 화가였던 사람은 대표적으로 나혜석과 이상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인 나혜석(1896~1948)은 삼종지도의 틀에 갇혔던 여성들이 틀을 깨고 나오는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유교적 관념이 무너지던 시대에 목소리를 냈던 신여성이다. 수많은 글과 그림을 남겨 우리 문예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스캔들로 더 주목을 받아 안타깝다. 1910년대 일본에서 유학하여 화가로서 첫발을 딛었지만, 김동인보다 먼저 《창조》에 「약한 자의 슬픔」, 1918년 《여자계》에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내용이 세련되고 구성도 탄탄해 근대적 단편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발굴되지 않은 작품으로 1916년에 「부부」를 발표하였다. 나혜석은 문학사에서도 의미있는 문인이었지만 남성 위주의 문학사에 여성으로서 소외되어 그가 화가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강렬해 화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 시절 문인과 화가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것에 비해 후대의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상(1910~1937)의 초현실주의적 작품은 유명하다. 우리 문학사에서 확실하게 자신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건축설계사였기 때문에 설계사라는 직업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보성고보 시절 고희동의 제자로 〈선전〉에 입선하여 정식으로 화단에 데뷔하였다. 새로운 세계의 그림을 누구보다 만나고 환상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자화상으로 입상하였지만 도록만 남아 있다. 그가 유화를 그렸지만 작품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그의 그림세계를 확실하게 규명하기 힘들다. 다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신의 다방 ‘제비’에 걸어두었다는 이야기를 보면 그가 자신의 그림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이 삽화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소설 「날개」, 「동해」와 산문 「슬픈 이야기」 등에 단편적으로 삽화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린 삽화라면 글과 그림이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상은 자신의 문학세계와 같은 모더니즘 세계를 이끌어가던 동료 박태원을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글을 보조해주는 그림’이라는 안정적인 구도를 형성할 수 있게 하여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지게 한 것이다. 신문소설에서도 화가들이 삽화를 그렸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이러한 전통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왔다. 오늘날 시나리오와 그림을 혼자서 동시에 쓰고 그리는 웹툰작가들도 있다. 성공한 웹툰이 많아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일찍이 시인과 화가는 친연성을 바탕으로 함께 창작을 해왔다. 시인은 시각적 예술을 통해서만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이미지를 독자의 눈앞에 나타나게 하고, 화가는 구도를 결정하기 위해서 문학의 주제에서 영감을 끌어내었다.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새겨진 무늬를 노래했던,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언뜻 보는 것만으로도 시와 회화가 자매예술로써 표현의 목적과 수단에 있어서 서로 경쟁관계를 맺고 있지만, 끊임없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의 예술론, 필로스트라투스(AD 약 2,3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학자)의 『회화』, 또는 이탈리아의 전통에서 『단테의 신곡』(「연옥편」의 열 번째 노래에 나타나 있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수태고지상), 복카치오의 『환영(幻影)의 사랑』, 아리오스토(1474~1533, 이탈리아의 서사시인)의 『광란의 오르단도』 등의 조형적 기술을 고려하면 수긍이 간다. 시인 포스콜로(1778~1827, 이탈리아 시인)의 『자비』에까지 이르면, 이 작품에서 시인은 안토니오 카노바(1757~1821, 이탈리아 조각가)의 조각을 모델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눈치오의 육감적인 심상은 라파엘 전파(前波)의 화가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화가들은 문학체계로부터 여러 가지 착상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영국의 경우 초서(1340~1400, 영국 시인), 『명예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명사들의 기념비 묘사』, 스펜서(1552~1599, 영국 시인)의 시와 셰익스피어(1564~1616)의 『루크리스의 능욕』에서의 운문으로 된 회화적 묘사에서부터 키츠가 티치아노(1477~1576, 이탈리아 화가), 풋생(1594~1655)의 장대한 구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시구에 이르기까지 같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화가는 제재에 대한 암시를 얻었으며, 한 장 한 장의 작품의 주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벽화나 천정을 장식하는 데 있어서도 작가들이 창작한 디자인을 따랐다. 보티첼리(1445~1510, 이탈리아의 화가 겸 조각가)의 〈봄〉, 〈비너스의 탄생〉, 〈비방(誹謗)〉, 또는 지오르지오네(1476~1510, 이탈리아의 화가)의 작품 일부가 해당된다. ‘시는 그림 같은 것’이라는 신조는 시인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였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밀접하게 결부되는 경우에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회화가 실증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벤존슨(1572~1637, 영국의 극작가)은 “회화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나 진리에, 또 시의 모든 지혜에 해로울 뿐”이라는 말—『베니스상인』에 있는 음악에 관한 유명한 시행(詩行)을 연상케 하는 말—을 필로스 트라투스(170~247, 로마 철학자)로부터 한 구절 번역한 뒤 곧장, “회화는 하늘이 발명한 것으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자연에 가까운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거장들의 덕택으로 이룩된 위신에 힘입어 ‘회화’는 자매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시’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시인들은 감각적인 묘사를 함에 있어서 화가와 우열을 다투기 위해 많은 열정을 쏟았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시인들은 화가에 대해서 막연한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18세기 영국 시인들은 화가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으며, 이탈리아 미술의 걸작들을 직접 보고, 걸작들의 복제물이나 그 원화를 수집하였다. 회화의 복제물의 고안이 18세기의 영국 문화에 끼친 역할은 인쇄술의 발명이 전 세계에 끼친 것과 같다고 샤프츠베리(1671~1713, 영국 문필가 겸 윤리학자)가 말했을 때 이는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이리하여 화가들은 한곳에 모아놓은 판테온Pantheon이 형성되어, 기라성처럼 늘어선 저명한 화가와 저명한 작품들이 그 시대의 취미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 회화의 전성기인 19세기 초에는 미술 감상의 취미가 문화인 집단에 흠뻑 젖었다. 키츠가 리 헌트(1784~1859, 영국의 시인 겸 수필가)를 본따서 시각예술에 대한 취미를 몸에 익힌 것은 전적으로 복제물을 통해서이다. 당시 리 헌트는 화가와 시인을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마구 대비하는 데 정신이 없었으며, 스펜서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헌트는 스펜서에게서 티치아노,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루벤스, 레니, 라파엘, 코레지오 등과 그 밖의 화가들의 특징을 인정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시인과 화가 모두가 고대의 조각상으로부터 힌트를 얻고, 역사와 신화로부터 배운 여러 특성과 상징을 근대인에게 적용함으로써 당시의 주제를 이상적인 것으로 높였다. 이런 습관은 군주들의 신성(神性)의 특징을 가진 자로 표현했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제국의 시대에서 시작되어 안토니오 카노바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이 조각가는 나폴리 후국의 페르난도 4세를 지혜와 교양의 여신 미네르바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18세기 회화에서 시로, 시에서 회화로 같은 주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혀 지각하지 못하였다. 이런 종류의 상호관계는 서구의 어떠한 문학을 실례로 삼아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시인이 시를 쓰고 있을 동안 한 사람의 어떤 화가를 의식하고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시론(詩論)과 시의 기법에 있어서 유사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화가와 시인의 유사성이 발견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렇듯 문학과 미술, 즉 시와 회화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 온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에도 이른바 ‘자매예술’의 모습으로 상호 관계하는 친연성을 가졌다. 4.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의 예 현대에 와서도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화가들이 문학, 주로 시에서 얻은 영감이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경우도 있다. 문학인이 미술작품이나 미술가의 삶에서 영감을 얻거나 자신의 체험을 시로 형상화시키는 경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필자는 시인이 서양미술사의 대가들과 우리나라의 몇몇 회화작품에서 시적상상력을 펼쳐 시적 발화한 시편들을 연구하였다. 『미술과 문학의 만남』(에코미디어, 2015)과 그 후속편인 『미술의 상상력을 통한 시적 발화』(에코미디어, 2022)가 그것들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성찰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도종환도 「세한도」 시에서 추사의 삶의 서사를 ‘세한도’의 이미지를 자신의 삶과 대비시켜 새롭게 거듭나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친다. 이중섭의 그림 또한 시인들에게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작품이다. 이중섭의 친구 구상은 이중섭이 죽은 뒤 10여 년쯤 지난 날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난했지만 어린아이처럼 맑은 그의 영혼을 위로한다. 이중섭의 고향 후배인 김광림 시인은 이중섭이 전쟁 중에 캔버스와 물감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이중섭을 위해 장교의 신분으로 군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담배 은박지를 제공하여 이른바 은박지 그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김광림은 「이중섭 생각」 연작시를 통해 이중섭을 회고하며 천진난만한 그를 호명한다. 불교 포교를 위해 중국에서 고려에 들어온 ‘십우도’를 시적 제재로 삼은 시인들도 여럿이다. 그동안 십우도는 우리 현대시에서 수용되어 다양한 의미를 낳았다. 한용운, 목정배, 조오현, 고은, 윤구봉, 김용태, 김지하, 박제천, 강현국, 김영산, 권대웅, 박형준, 그 외 많은 시인들이 대웅전 뒤편 벽에 그려진 십우도를 시 속으로 끌어들였다. 한용운의 「심우장」은 그림 속의 소를 찾아 가는 목동을 통해 소를 찾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는 과정의 깨달음을 묘파한다. 즉 소가 자신이라는 것과 자신을 찾아가는 본질을 잘 드러낸다. 조선시대 조광조와 함께 개혁 드라이브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의 화를 입은 양팽손은 낙향하여 「산수도」, 「소상팔경」을 그려 이상주의와 은일한 삶을 표현하였다. 더불어 그는 「학포당 은둔 유감」, 「화김대유구경형(和金大柔絿庚兄)」 등의 시를 직접 써서 기묘사화 이후 좌절한 심경과 김대유에게 보낸 화답시에서 당시 조선사회상을 염려하는 탄식과 묵묵히 선비의 길을 가려는 정신을 투사시킨다. 그림과 시의 경계를 두지 않았던 조선 선비의 일면을 읽게 해준다. 현대시인들의 작품들은 미술가들이 남긴 작품에서 때로는 미술가에 대한 예의와 저주, 미술가들의 삶과 작품에서 시인 자신들의 삶을 대입시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비밀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또한 미술작품이 시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고 심미적 즐거움을 준다.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던 서양미술사의 대가들인 렘브란트, 마네, 모네, 반 고흐, 뭉크, 피카소, 모딜리아니, 루오, 에곤 실레, 샤갈, 고갱, 그리고 조각가 자코메티, 로댕 등의 작품을 통해 영감을 얻거나, 개인적 체험, 사회 현실 상황 등 다양한 주제로 시를 쓴 현대 시인들이 있다. 즉 ‘미술의 상상력을 통한 시적 발화’로 자신만의 개성있는 시를 쓴 시인으로는 최승호·김옥성·강인한·이윤설·김정란·조연호·박의상·정진규·이초우·이승하·전문수·김혜순·강경호·이성복·이영애·고재종·유재영·이승훈·고현정·강현국·홍일표 등이 있다.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이 미술작품을 통해 새로운 상상력으로 시를 써서 우리 시문학사를 풍요롭게 해 왔다. 한편, 문학과 미술, 즉 시와 회화와의 친연성을 가진 시인들도 여럿 있다. 이들은 시인이지만 회화를 통해 자신의 시세계를 새롭게 형상화시키고 있는데, 김종·박덕은·이지엽·서림·강경호, 권갑하, 백혜옥 등은 시와 회화가 지닌 각각의 장르적 특성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일구고 있다. 다음은 문학과 미술의 친연성 중 문학을 통해 영감을 얻어 회화작품이 탄생된 예이다. 멀리 가까이 강 하나 바라본다 지난 세월 허물 짓지 않았어도 한눈에 가다서다가 보이는구나 맑다가 흐리다가 산맥들 불끈불끈 말달리다가 물에 뜬 뗏목처럼 잠수하다가 정신 못 차리게 눈비 오다가 이 골 저 골 물줄기 반갑다 오랜만이다 소리치다가 천둥번개에 풍성에 자심한 일기불순이 피다 지다를 반복했구나 얼다 녹다를 거듭했구나 가도 가도 젖은 몸 흐르다 보니 어깨동무 산맥들이 마중왔구나. - 김종, 「江의 습작 -남북 동행을 위하여」 전문 김종 시인의 「江의 습작 -남북 동행을 위하여」라는 작품이다. 시적화자는 강을 바라본다. ‘강’은 ‘허물 짓지 않은 존재’로서의 기표로 작용한다. 산맥들 사이를 흐르는데, 눈비가 내리고 ‘천둥번개’와 ‘바람과 눈’에 마치 꽃처럼 “피다 지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얼다 녹다를 거듭”한다.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흐르는 강의 역사성을 말해준다. 바다를 찾아가는 강은 “젖은 몸 흐르다보니/ 어깨동무 산맥들이 마중”나오기도 한다. 김종 作, 〈여섯개의 예쁜 가슴〉 이 작품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처럼 남북한이 이념을 넘어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 남북 동행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시를 그림으로 재해석한 회화작품이 〈여섯 개의 예쁜 가슴을 가진 강물〉이다. 이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깨트리고 있다. 우선 큰 맥락에서는 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마치 종이상자를 펼쳐놓은 듯한 모습이다. 외곽의 띠를 두른 듯한 녹색이 있고 그 안에 색종이를 이용해 입체성을 강조한 주로 붉은 색 원圓이 청색계통의 강물로 보여지는 이미지가 속에 놓여있다. 청색조는 마치 어머니의 양수처럼 흐르고 그 위에 놓여있는 둥근 원은 양수 속 태아처럼 느껴진다.(물론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종 작가는 여섯 개의 둥근, 그러나 마치 엽전처럼 원의 중심이 뚫린 주로 붉은색(노란색, 녹색의 색종이도 있다) 원들을 ‘가슴’으로 상징화시키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가슴’은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 어떤 사물(생명체 포함)의 핵심일 수도 있고 ‘정신’을 내포할 수 있다. 김종 작가의 이 그림에서 ‘가슴’은 어떻게 해석해도 그것은 수용자의 상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슴’을 ‘강물’의 한 부분으로 강물을 움직이는 기제임은 분명하다. 이 작품에 대한 메시지가 어떠하든 김종 시인의 시 「江의 습작 -남북 동행을 위하여」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민족문학의 가장 큰 과제인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 해소라는 차원에서 살펴보면, ‘강물’이라는 매개체가, 또한 강물을 움직이게 하는 ‘가슴’이 지향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강산의 아름다운 골짜기를 북에서부터 남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되어 흐르는 것, 즉 통일 지향의 메시지를 지닌 것이 김종 작가의 〈여섯 개의 예쁜 가슴을 가진 강물〉이라고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추상미술형식을 띤 이 작품에서 ‘여섯 개의 가슴’이 지닌 의미는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시(詩)를 미술작품으로 형상화시켜 시의 외연을 새로우면서도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시적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조형미를 펼치는 회화 또한 다양하고 독특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낳고 있음도 볼 수 있다. 다음은 문학과 미술을 함께 운영하는 박덕은 시인의 시와 회화를 살펴본다. 박덕은 작가의 「열정·34」를 읽는다. 밀어내도 바람처럼 밀려와 가득 채우는 그게 뭘까 속삭이듯 감싸안고 얼래며 살살 다독이는 그게 뭘까 눈물 콧물 사이로 끼어들어 설치며 낑낑 앙탈대는 그게 뭘까 마음도 영혼도 휘저어 훑어내어 휙휙 내리치는 그게 뭘까. -박덕은, 「열정·34」 전문 박덕은 시인은 「열정」 연작시 한 권 분량을 쓴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치는 시인이다. ‘열정’이라는 관념이 지닌 추상성이 그의 시적 특성이어서 이 작품 또한 구체적인 ‘열정’이라는 감정의 표정이 매우 추상적이다. “밀어내도/ 바람처럼 밀려와/가득 채우는// 그게/ 뭘까” 등의 어떤 대상에 대한 질문의 반복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에 깃든 ‘마음’과 ‘감정’에 대해 궁금해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 말미에서조차 “마음도/ 영혼도/ 휘저어 훑어내어/ 휙휙 내리치는// 그게/ 뭘까.” 하고 궁금해 한다. 물론 시 제목 「열정」으로 보아 ‘열정’의 구체적인 표정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에게 ‘열정’이라는 다양한 감정과 표정을 스스로 읽어낼 수 있도록 질문형식으로 된 시작품이다. 그렇다면 박덕은 시인은 ‘열정’을 회화로 어떻게 형상화 하였을까. 박덕은 시인은 추상미술 화가이다. 최근에 그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박덕은미술관’을 개관되어 그가 본격적인 추상미술 작가임을 확고히 하고 있다. 〈열정〉이라는 제명을 가진 이 작품은 가로로 된 직사각형 화면에 사방에 흰 띠를 두르고 황색, 청색, 연두색, 분홍색 등의 원색을 자유롭게 칠하고 그 위에 백색의 점을 찍었다. 그리고 화면의 중앙에 주로 적색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불의 혀처럼 보이는 화염을 그리고 있다. 관념 박덕은 作, 〈열정〉 적으로 ‘열정’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주로 적색의 불꽃 형상 속에 청색, 황색, 그리고 어두운 갈색조가 섞인 이 그림은 추상회화로서의 순수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화면 외곽의 다양한 색조와 그 위에 찍힌 점묘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을 파괴시키고 있어 참신하다. 이처럼 박덕은 작가의 회화 〈열정〉은 흔히 시화詩畫의 부속물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회화작품으로서의 독자성을 지닌다. 다음의 예는 회화작품을 보고 난 뒤 영감을 얻어 시를 쓴 경우이다. 최승호는 렘브란트의 회화작품에서 영감을 자신의 유년의 체험을 떠올려 쓴 시이다. 르네상스의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는 끔찍하다. 해체된 소의 고깃덩어리는 인생의 부질함을 나타낸 것으로 당시 그가 그렸던 우아한 모델들의 피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거칠지만 사실적인 뻘건 고깃덩어리는 사지가 잘린 채 도살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장기는 모두 제거되고 갈빗대가 보인다. 죽음이 공중에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서 어떤 여인이 꿈틀되고 있다. 고깃덩어리에 조명이 집중되어 기괴하게 느껴진다. 렘브란트 作, 〈도살된 소〉, 1665 이 그림을 보고 난 후 최승호 시인은 유년기에 춘천 공지천 모랫둑 위의 마을에 살면서 집 근처 도살장에서 죽어가며 비명지르는 소의 절규를 떠올린다. 고깃덩어리가 피를 흘린다 칼로 친 핏물들이 구멍을 다 털어놓고 도마 위에 남은 피를 내붓는다 수술대 위에서 제왕절개 수술로 꺼낸 붉은 핏덩이 화사한 봄날 각혈하고 죽은 시인 누구나 피를 흘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칼이 심장을 베지 않아도 조용히 마취의 피를 쏟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붉은 고깃덩어리여 그렇게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발이 묶인 채 꽥꽥거리다 조용해지는 도살용 돼지들과 시퍼런 낙인이 찍힌 채 도살장에서 끌려나오는 살덩어리들 나는 기름걸레 같은 창자를 입에 물고 서로 찢느라 퍼덕거리는 까마귀들의 싸움을 인간의 마을에서 본다. 그렇게 그렇게 서로 물고 찢으며 죽어가는 것이다. 붉은 고깃덩어리여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의 두개골을 늙은 백정이 강물에 헹구듯이 나의 피가 어쩔 수 없는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핏줄들이 칼에 떨고 있는 밤이다 고깃덩어리가 피를 쏟는다 칼로 친 핏줄들이 구멍을 다 열어놓고 남은 피를 내뿜는다 칼금이 무수한 도마 위에서 -최승호, 「붉은 고깃덩어리」 전문 렘브란트의 회화 〈도살된 소〉를 보는 순간 최승호는 “걸레 같은 창자를 입에 물고 서로 찢느라 퍼덕거리는 까마귀들의 싸움” 같은 인간들의 삶을 연상시켰다. 죽음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서로 물고 뜯기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용되었다. “화사한 봄날 각혈하고 죽은 시인”의 모습처럼 “누구나 피를 흘리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그렸다. 이렇듯 짐승이든 사람이든, 삶이나 죽음도 모두가 피와는 무관할 수 없는 것이 태생적으로 겪어야 하는 슬픔과 비극을 화자는 묘파하고 있다. 피를 뒤범벅한 채 태어난 생명이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피를 부르는 모순되고 슬픈 생명의 순환을 시인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내밀하고 깊은 사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작품을 보고 난 후 김승희 시인이 그 느낌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作, 〈모나리자〉, 1503년~1515년 사이 이 작품은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라를 위하여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이다. 모나리자의 ‘모나’를 이탈리아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어서 ‘리자’는 조콘라 부인의 이름이니 모나리자는 ‘리자부인’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등의 자연스러운 미소 때문에 유명해진 이 그림은 여전히 모나리자의 미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제공하고 있다. 김승희 시인은 모나리자를 통해 무엇을 읽었을까? 어마어마한 살덩어리 막을 수 없는 증식의 반죽덩어리 물속에서 퉁퉁 불은 듯한 부풀어오른 얼굴에 손가락을 넣어봐 밀가루의 무저갱으로 아득히 빨려들어가는 손가락 야식증후군일 거야 몽유의 발걸음은 냉장고 속으로 출렁출렁 빨려들어 가고 해적선, 밤의 약탈로 메워지는 입, 통닭 한 마리를 밤에 혼자 다 먹었다니까 먹은 기억은 못하지만, 아침에 쟁반에 수북한 닭뼈들, 그것과 출렁거리는 뱃살만이 유일한 증거, 낮이면 하얀 실크에 십자수를 놓는 얌전한 수예가인지도 몰라 한밤중엔 머리를 풀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폭식증의 여자 미소, 어두운 심해의 우울증에서 뻗어나오는 방만한 미소, 무시무시한 살덩어리가 움직이는 출렁거리는 비만의 미소, 몸을 증오하고 먹음직스런 세상의 모든 것을 증오해야 하는, 파묻히고 싶은 매몰의 죽음 충동을 일으키는, 뚱뚱한 여인의 환상의 끝은 매몰, 함께 죽자고 할 수는 없을 거야, 함께 죽을 순 없을 거야, 뚱뚱한 매몰의 끝은 천국인지, 지옥인지, 나는 숨쉬고 싶다, 뚱뚱한 턱과 산맥만큼 부풀어오른 가슴에 파묻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나리자, 야식증의 어마어마한 모나리자, 간신히 숨쉬는 모나리자 비만 진료소 벤치에 앉아 있는 미소의 어머니 - 김승희, 「뚱뚱한 모나리자」전문 모나리자는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을 표현하였다. 특히 미소는 신비스럽다. 이 유명한 미소는 관심과 무관심을 동시에 함축하며, 비현실적이고도 추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보는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승희 시인을 만나 모나리자는 뚱뚱한 여자가 되고 만다. 김승희 시인의 발칙한 상상력이 정숙한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뒤틀어버린 셈이다. “어마어마한 살덩어리” “야식증후근” “낮이면 하얀 실크에 십자수를 놓는 얌전한 수예가” “한밤중엔 머리를 풀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폭식증의 여자” “무시무시한 살덩어리가 움직이는 출렁거리는 비만의 미소” 여자는 우울증에 걸려 “몽유의 발걸음은 냉장고 속으로 출렁출렁 빨려들어가고” “통닭 한 마리를 밤에 혼자 다 먹”는다. 세상에 대한 불만, 자신에 대한 불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폭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이다. 이러한 우리 사회는 병적이다.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의 상징이랄 수 있는 ‘뚱뚱한 모나리자’를 통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인간의 탐욕을 드러낸다. 5. 나가면서 현대에 와 문학과 미술은 엄연히 독립된 장르를 자리매김하였다. 문학은 언어예술이 갖는 자유로운 표현방식으로 형상화되고, 미술은 시각언어의 질료인 물감과 다양한 염료를 통해 선·형태·색채 등으로 소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미술은 예로부터 하나였던 기억을 잊지 않고 서로가 영감을 주며 다채롭게 발전하고 있다. 문학과 미술은 그것들만이 지니고 있는 독자성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독특한 개성을 지켜나가면서도 한편으로 오랫동안 어우러지듯 함께 해온 친연성을 바탕으로 예술세계의 새로운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할 것이다. 앞으로는 두 장르가 융·복합적인 방향으로 더욱 다양하게 변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