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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 / 차례
시인의 말 · 5 제1부 풍경화 독사는 제 목을 문다 어떻게 살겠느냐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 자작나무 바코드를 읽다 탕약 앞에서 허공의 길 물레방아의 보법 은행나무의 말씀 산을 내려가며 공중 무덤 까치 울음 오징어들 깃대봉 오르는 길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 백구 상처가 그늘을 만든다 막다른 길 제2부 우리들의 큐비즘 우리들의 큐비즘 악보 없는 노래 가방 移葬하고 나서 공동묘지에서 환상통 검은 뼈의 폐허 견고한 죽음 카렌다 앞에서 강이 아름다운 것은 슬픈 봄날 조용필 두고 온 우물 상처를 위로하다 새, 날다 종이상자를 보면 공손해진다 제3부 봄날의 유치원 봄날의 유치원 눈치없는 고양이 결빙을 기다리며 비둘기들 평화 옥상에서 생긴 일 봄, 고양이들 말을 잘 못 배웠다 책을 방치할 때 그럭저럭 슬픔의 힘 사라진 집 점집 경주 남산 김정희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사랑에게 제4부 그 남자의 저녁 산책 그 남자의 저녁 산책·1 그 남자의 저녁 산책·2 그 남자의 저녁 산책·3 그 남자의 저녁 산책·4 그 남자의 저녁 산책 5 불안한 날 불온한 적막 소주병이 울다 천국 보이지 않는 적 진실이 만들어지는 순간 바위산 비탈에서 함부로 버린 쓰레기와 은밀한 사생활 사이 왼손잡이 시계 사회적 거리 코로나 시대의 얼굴 작품론 _ 달빛의 흐느낌 / 김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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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찌들어 시끄러운 날
일찍 일어나 하늘을 보면 부끄럽다, 미안하다 취한 듯 살아온 몸과 정신이 새벽을 더럽힌 까닭이다 지난밤엔 분노와 질투로 안에서 기어다니던 붉은 독사들이 누군가의 정수리를 물었는데 숲의 정령이 안개로 전하는 감각과 새들이 지저귀는 말씀을 여태 알아듣지 못했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숲에서 또아리를 푼 독사는 숲의 말씀과 새들의 말에 깨어나 스스로 제 목을 깨문다. --- 「독사는 제 목을 문다」 중에서 아버지가 내게 이름을 주었듯이 나의 아이에게 이름을 주었다 강아지처럼 주인이 바뀔 때마다 사람의 이름은 바꿀 수 없는 것이어서 숱한 고개를 지나 강물을 건널 때마다 이름을 생각했다 이제 세상에 나가 명함에 이름을 찍고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는 아이들아 장차 너희의 아이들에게 어떤 이름을 줄 수 있는지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고 너희 아버지가 그랬듯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 「어떻게 살겠느냐」 중에서 불로동과 황금동 사이 한때는 수많은 아담과 하와 그들의 천국이었던 골목, 오래 무화과나무 번성한 에덴여관 신세대 아담과 하와들은 번화가로 몰려가고 한낮에도 적막이 흐르는 자물쇠 굳게 채워진 에덴의 길을 걷는다 문득 머리에 무화과 열매 하나 툭, 떨어진다 탕자처럼 분탕질로 세상을 떠돌다가 어찌하여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에 목이 메이는가 가끔 늙은 청소부가 발길에 짓이겨진 무화과 열매를 쓸던 모습 무심하게 바라보았는데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일생이 십자가의 못 박음질처럼 아프게 느껴지는가 고목과 한 몸이 되어가는 앙코르와트 사원처럼 여관과 무화과나무가 하나가 되어가는, 에덴여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담아, 하고 내 이름 부르는 환청을 듣는다. ---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 중에서 눈[雪]을 배경으로 살결이 하얀 것들이 기다란 창을 든 채 하늘로 길을 내는 끝없이 긴 마을을 이룬 자작나무 숲에서 그것들의 내력을 읽는다 나는 북방의 풍경을 완상하는 관광객일 뿐이지만, 허공을 향해 타오르는 가지런한 수직의 자작나무 줄기들이 생의 이력을 입력한 바코드 같다는 생각, 북해도 설원을 가로지르는 나는 분지 끝을 에워싼 이마가 하얗게 빛나는 준령들,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일생을 북위 37도 아래서 살아온 나는 북위 43도는 초행이어서 방한복과 방한모를 쓰고도 눈길에 자주 미끄러진다 문득, 길에서 황금빛 여우 한 마리 바코드 속으로 사라지는데, 그것들을 다 품고도 기나긴 겨울, 눈보라 맞으며, 바람에 맞선 참으로 오래된 기억들이 진중하다 인간의 종교보다 거룩하고 신성한 경이를 읽는다. --- 「자작나무 바코드를 읽다」 중에서 봄볕, 마당가에 앉아 탕약을 끓인다 약탕기 속 약재들이 고아지는 시간 온 집안을 휘감은 탕약내 뜨거운 약재 주머니를 짜면 어혈처럼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탕약 이것은 나의 언어여서 나는 쓰디쓴 신고辛苦의 시간을 온 몸으로 말해왔다 그러므로 탕약은 달콤한 것이어서 언제부턴가 나의 노래는 즐겁다 얼음처럼 얼어버린 혀가 물처럼 풀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쓰디쓴 탕약을 마시며 알았다. --- 「탕약 앞에서」 중에서 꼬이는 것이 삶의 목표인 등나무 마음속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꼬여 상처를 낸다 풀 수 없을 것 같은 꼬임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상처가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이 된다는 것 그 꼬임이 그늘을 만들어낸다는 것 마침내 보랏빛 향기를 피운다는 것 또한 허공이 길이 된다는 것. --- 「허공의 길」 중에서 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느릿느릿 보행을 시작했어도 스타트는 경쾌했다 한 계단 한 계단 계단을 베어 먹으며 푸른 하늘로 올랐다 생은 꺼꾸러지는 힘으로 일어서는 것의 연속이어서 둥글게 몸을 말아 쓰러지는 것에 익숙해져 침몰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허기와 결핍은 끝이 없는 것이어서 물지게 지고 생의 계단 오를 때마다 관절이 삐걱거리고 현기증으로 마음이 어질어질한데 물지게를 지지 못하는 날은 비오는 날 공사장 인부처럼 공치는 날이어서 안개가 어깨에 내려앉고 온 몸이 욱신거렸다 뒤돌아보면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했지만 지상에 닿지 못하고 걷는 허공의 길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헛걸음질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높은데 오른 적도 있고 낮게 걸어간 적도 있었다 대책 없는 길이지만 그것이 사람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 「물레방아의 보법」 중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늦가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노란 말씀들 우수수 내린다 낭만적이고 쓸쓸해 보일 수도 있는 풍경은 은행나무가 건너온 빙하의 계곡에서 햇빛 쪽으로 기울어 진화하며 오직 살기 위해 참았던 말씀들 호모 사피엔스의 햇살 좋은 날 눈부신 햇빛 받으며 휘날리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영원이란 죽지 않는 것 나이테에 새겨진 수천만 년 축약된 기억들 발목 빠지는 눈 속에서 빙판 같은 길을 건너온 적이 있는가 꽁꽁 언 입 속에서 참아온 말 삼킨 적 있는가 언젠가는 공룡이나 맘모스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 화석 속에서 선명하고 둥그런 은행나무의 말씀들, 이제 호모 사피엔스의 늦가을, 노랗게 숙성된 말씀들 펄펄 휘날릴 수 있겠는가. --- 「은행나무의 말씀」 중에서 오른쪽 무릎이 아프다 계단을 오를 때만 아프더니 이제 내려갈 때도 아프다 오른쪽 신발 뒷축이 쉽게 닳아지는 것은 단 한 번도 삶을 교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을 바라보지만 누군가는 함부로 오르지 말라고 한다 실상은 정상을 포기하려고 하는데 숨이 가빠 길에 앉아 내려다보면 필사적으로 올라온 길이 까마득하고 정상을 향해 오르는 사람들 언제부턴가 왼쪽 신발 뒷굽이 닳아지고 있는 까닭에 나의 생은 균형이 깨져 산을 내려가기 버겁다 슬개골 틈이 벌어져 통증이 다리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무소처럼 앞만 보며 이를 물고 걸어온 통점들에 침을 꽂고 약침을 놓지만 고통은 일상이 되었다 끝내 오르지 못하면서, 한때 정상을 향하느라 흔들렸던 나의 보행, 함부로 걷는 길은 올라가는 일도 내려가는 일도 무모하다. --- 「산을 내려가며」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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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의 흐느낌
김 동 원 (문학평론가) 프롤로그 - 비가悲歌 그의 시는 달빛의 흐느낌이 들린다. 무릇 세상 만물은 무엇인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면 소리 내어 우는 법이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한유, 「송맹동야서」). 그의 시는 늦가을 스산한 찬 기운이 뻗친다. 세상을 향한 낮은 자의 울음이 들린다. 시대의 어둠이 압화되어 있다. 차오르는 아픔과 분노의 방황이 어른거린다. 내면의 상처이자 풍경이며, 서성거리는 달빛의 그림자이다. 그의 시는 직선보다는 곡선의 아름다움이 깊다. 시적 형상화를 추구하는가 하면, 서정의 노래를 곡진하게 부르기도 한다. 좋은 시가 다 그렇듯, 그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묻고 있다. 그의 서정은 눈물과 경험의 방울로 이루어져 있다. 동생의 죽음을 통해 밑도 끝도 없는 슬픈 빙하가 된다. 그의 시작詩作은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투사와 은유가 기발하다. 그리움의 벼랑을 외로움의 공간으로 교직한다. 흔들리는 자의 꿈이 비치고, 언어로서 언어를 뛰어넘는 시도를 한다. 또한 그의 시는, 감정의 두레박에서 건져 올린 기억과 추억의 언어 놀이다. 성령을 통해 몸을 가진 인간의 한계와 초월을 추구한다. 서정시의 형식과 내용을 자신만으로 방식으로 집요하게 물고 있다. 삶의 체험을 독특한 경험으로 형상화 한다. 밝은 어둠을 지향하는 그의 시는, 천지간 외로움의 무늬다. 그의 선율은 지극至極에 이르는 범종 소리다. 그의 시는 사람 냄새가 난다. 골목과 이웃과 사회의 신음에 귀를 기울린다. 현대사의 아픔과 부조리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도 감지된다. 그의 말들은 시성詩性, poeticity이 갖는 다양한 의미망으로 짜여 있다. 수십 년 시를 써오면서 그는 창작과 비평의 다리를 건너왔다. 하여, 그의 시는 ‘새로운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좋은 시의 요건은 무엇인가’ 등등 근본적 질문이 숨어 있다. 언어의 다의성과 이미지의 복합적 구성, 묘사의 치밀함은, 그의 서정시를 읽는 또 하나의 독법讀法이다. 그의 시는 약자가 느낀 트라우마가 무의식으로 드러난다. 전시대적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그만의 독특한 어조로 재구성한다. 그의 시는 ‘대상’과 ‘주체’의 개념을 보다 심화시키며, ‘동일성의 시학’에 근접한다. 역설과 반어, 은유와 상징의 관계망을 촘촘히 깁는다. 하여, 그의 서정과 현실, 문명과 자연, 역설과 메타포는 실존주의에 가깝다. 어떤 시는, 사물의 말이 건네는 계시이자 응답이다. 전통의 운율과 한국적 정조情調가 그림처럼 펼쳐진 시도 있다. 이번 강경호 시집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는 십 년 만에 나온 역작이다. 고뇌와 지성, 삶의 긴장과 이완, 어두운 내면과 실존의 노래는, 그의 시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독사는 제 목을 문다」는 자기 파괴적 역설이 섬뜩하다. 시인과 세계와의 부조리의 틈에서 삐져나온 절규 같다. 알베르 카뮈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와의 충돌에 비견된다. 그의 이런 실존의 자기모순은 절망의 언어 같지만, 동시에 그 ‘독毒’을 자각한 지성으로의 자기 검열처럼 비친다. 스물아홉에 죽은 아우에게 바친 비가悲歌 「검은 뼈의 폐허」는 절절하다. 그의 행간 속에 퍼붓는 눈물은 하늘이 흘리는 피처럼 붉다. 피와 살이 다 빠져나간 형체도 없는 아우의 ‘검은 뼈’는 ‘폐허’다. 말로 다 울지 못한 슬픔이 생사의 은유로 풀려나온 이 시는, 절창이다. 생의 행간을 미처 건너지 못한 아우 “성호”를 향한 형의 초혼招魂은 애절하다. 그렇다. 좋은 시는, 한 편의 작품이 전체의 틀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구조화되어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의 개인 서정은, 현실의 상반된 논리 속에 세상의 담론과 연결되어 있다. 명징한 언어와 문체로 드러나기도 하고, 은유를 통해 언어 속에 깊이 감추기도 한다. 부름과 응답 부름은 침묵을 깨는 첫 음절이고, 응답은 그 음절에 피어나는 두 번째 숨이다. 부름은 너를 만들고, 응답은 나를 완성한다. 하여 “아담”과 “하와”는 그에게 거대한 은유다. 그의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는, 성령聖靈과 환청 사이에 존재한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시공에 홀로 서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서 방황한다. “불로동과 황금동 사이” “에덴 여관”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다. 그 어디쯤에서 “탕자”는 홀연히 하느님의 부름을 듣는다. 말씀은 누구나 들을 수 없고 아무에게나 들리지 않는다. 그는 길을 가다가 온 우주로부터 갑자기 ‘말씀’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태초의 하느님의 음성을 그만의 방식으로 들었다. 무한의 깊이로, 영성의 심연으로, 오묘한 신神의 사유와 방법으로 그는 누설한다. 불로동과 황금동 사이 한때는 수많은 아담과 하와 그들의 천국이었던 골목, 오래 무화과나무 번성한 에덴여관 신세대 아담과 하와들은 번화가로 몰려가고 한낮에도 적막이 흐르는 자물쇠 굳게 채워진 에덴의 길을 걷는다 문득 머리에 무화과 열매 하나 툭, 떨어진다 탕자처럼 분탕질로 세상을 떠돌다가 어찌하여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에 목이 메이는가 가끔 늙은 청소부가 발길에 짓이겨진 무화과 열매를 쓸던 모습 무심하게 바라보았는데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일생이 십자가의 못 박음질처럼 아프게 느껴지는가 고목과 한 몸이 되어가는 앙코르와트 사원처럼 여관과 무화과나무가 하나가 되어가는, 에덴여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담아, 하고 내 이름 부르는 환청을 듣는다. -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 전문 왜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몸을 무화과잎으로 가렸을까?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일생이/십자가의 못 박음질처럼 아프게 느껴”진 걸까. 왜, 그의 시를 읽으면 ‘십자가는 단순한 형벌의 상징이 아니라, 끊어진 다리처럼’ 외롭게 보이는 걸까. 그는 왜 ‘빛과 어둠’을 끌어안고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었을까?’. 시는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신神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성령의 시는 영접과 비밀에 속한다. ‘울음’은 깨어 있는 자에게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이다. 아담의 원죄를 예수가 대속한 것처럼, 시인 강경호도 세상의 아픔을 위해 통곡한 걸까.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신 것처럼, 그는 길을 가다 홀연 “아담아, 하고” 그분의 부름을 듣는다. 그것은 “환청”이 아니라 ‘계시’처럼 들린다. 마치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한 최초의 호명呼名이자 최초의 시처럼 들린다. 원죄가 벌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처럼, 말씀은 그 자체가 구원의 은유다. 천문天文 시를 쓴다는 것은 ‘허공’에 ‘길’ 내기다. 무엇인가. 시를 논한다는 것은,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의 탐색이다. 그는 객관적 상관물 “등나무”를 통해, 사람살이의 형식과 내용이 결국은 ‘허공’에 맞물려있다는 진리를 말한 셈이다. 이 물음은 그의 시 세계가 현실성과 동의어를 이룬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시는 꼬여 있는 것들을 푸는 방식이다. 그의 시법은, 등나무의 “꼬임”이 그렇듯, “상처”를 통해 “보라빛 향기”로 퍼지는 작업이다. 꼬이는 것이 삶의 목표인 등나무 마음속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꼬여 상처를 낸다 풀 수 없을 것 같은 꼬임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상처가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이 된다는 것 그 꼬임이 그늘을 만들어낸다는 것 마침내 보랏빛 향기를 피운다는 것 또한 허공이 길이 된다는 것. - 「허공의 길」 전문 그는 묻는다. “왜 허공은 시의 길이 되는가?”. 시는 형식과 내용의 두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허공의 길」이 될 때만 가능하다. 허공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고, 내용에 기대지 않는다. 삶 또한 상처와 견딤을 통해 조화를 꿈꾼다. 아무도 하지 못한 방식을 통해, 그만의 목소리로 시법을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이다. 등꽃 향기가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은, 허공이 비어 있기에 가능하다. 시는 꽉 찬 진술에서 오기보다 말해지지 않은 틈, 곧 여백의 미학이다. 삶 또한 상처가 약이 되듯, 그의 시관詩觀은 실패함으로써 좋은 시를 얻는, ‘불가능의 가능’을 드러낸 셈이다. 시 「허공의 길」은, 꾸밈이 없는 문장文章을 통해 놀라운 문채文彩를 얻었다. 큐비즘, 혹은 강경호는 미술 평론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언어가 색채의 이미지에서 깨 낸 방식임을 알아채야 한다. 그는 이 세계를 하나의 ‘미술 작품’으로 구경한다. 「우리들의 큐비즘」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한때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예술의 전당에” 가곤 했다. 그는 “피카소와 클레”를 통해, 전혀 낯선 시법을 배우곤 하였다. 피카소의 큐비즘은 단순히 그림의 양식을 바꾼 운동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꾼 사건이다. 마치 시인 이상李箱이 “큐비즘”에 경도되었듯, 강경호 역시 대상을 하나의 시점으로 보지 않고, 앞과 옆, 안과 밖, 현재와 기억을 한 화면에 겹쳐 놓는다. 그의 시법이 사물을 “해체”하고 다시 “재구再構”하는 관점을 취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방학 때면 아이들 데리고 떠나온 서울에 鄕愁처럼 갔네 서초등 예술의전당에 갔네 아이들은 아직 철이 없어 코가 다리에 붙고 눈이 배에 붙도록 참으로 행복했네 피카소와 브라크를 보면 큐비즘은 장난감이거나 놀이터였네 해마다 열리는 예술의전당 거장전 유독 큐비즘이 마약 같았는지 몰라 미술대학을 졸업한 아이들은 서초동 부근에서 분석적으로 살고 있네 우리 내외도 둥글고 뾰족한, 기하학을 보면 분해하고 싶어지는 버릇을 갖게 되었네 세상이 뿔났어도 둥글게 보기로 했네 서초동 예술의전당 앞을 지나다 보면 오래된 큐비즘이 오늘의 큐비즘과 만나 세상을 해체하고 재구再構하고 싶어지는지 몰라. ― 「우리들의 큐비즘」 전문 큐비즘은 20세기 초 파리에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사조이다. 전통 회화 방식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사물을 뜯어보았다. 즉, 재현의 예술에서 구성의 예술로 넘어간 셈이다. 강경호의 시 역시, 보이는 것 너머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영향을 받은 셈이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언어를 복사하지 않고, 시간의 색으로 “기하학”으로 “분해”한다. 빛의 파편을 쪼개고, 감정을 입히고, 언어의 측면을 잘라낸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인체를 해체하여 새로운 현대미술을 열어젖혔듯, 그의 가족 모두는 세상을 입체의 예술로 바라본다. 마치 시법을 직선으로 보지 않고, 분열되고 중첩된 세계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사물은 하나의 의미만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대미술의 큐비즘이 그랬듯, 현대 시 또한 ‘다층적 의미의 혁명’이며 ‘다초점의 혁명’이다. 언어를 찢어 새로운 세계에 다시 붙이는 방식이야말로, 강경호가 자신의 시법에서 시도한 큐비즘의 접목이다. 객관적 상관물 객관적 상관물은 T. S. 엘리엇이 말한 것처럼, 어떤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고도 사물·상황·사건의 배열을 통해 필연적으로 그 감정을 일으키는 장치다. “늙은 어미”의 「가방」은 “캥거루”의 아기 배 주머니에 비유된다. 그 낡은 가방이 자식을 먹여 살린 “밥”이라니, 서러운 은유다. 그 낡은 가방은 한 발짝 더 나아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닿는다. ‘가방’은 어미의 품이자, 눈물을 흘리는 어린 자식의 뒷배가 된다. 이 시는 서정시의 본령에 뿌리 박고 있다. 사물에 대한 응시를 통해 감정의 묘사를 세밀히 복원한다. 늙은 어미 캥거루를 닮은 가죽 밑으로 혈관이 흐르고 생이 무거워질수록 가벼워져 가죽이 닳아지고 보푸라기 일어나 당장 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어머니의 가방은 밥이었다 장에라도 갔다 오시는 날은 가방에서 국화빵 냄새가 났다 손수건을 꺼내 어린 아들의 눈물을 닦으며 울지마라 이 가방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하며 가방에 나를 품으셨다 어머니의 가방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였지만, 나는 철없는 물고기여서 해일이 일 때마다 양수처럼 꼬옥 안으셨다 오늘은 요양병원 침대에다 가방을 부려놓고 자물쇠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라도 나는 다 안다 통성기도 하는 어머니의 입을 닮은 틀니 한 벌과 일생을 함께한 성경 한 권 그리고 약봉지가 든, 그 가방 속에서 여전히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 「가방」 전문 그 옛날 아들에게 가장 든든했던 어미는, 이제 “요양병원 침대에” 「가방」을 부려놓고 누워 계신다. 머지않아 ‘어미’는 요단강을 건너겠지만, 시인 아들만큼은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다 눈치채고 있다. 평생 낀 “틀니 한 벌과/일생을 함께한 성경 한 권/그리고 약봉지”라는 진실을. 어쩌면, 밤하늘 떠 있는 보름달도, 우리가 저마다 메고 가야 할 ‘가방’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이승에서 저승 사이 다섯 개의 강이 나온다. ‘비통과 슬픔의 강’, ‘비탄의 강, 또는 통곡의 강’, ‘불의 강’, ‘증오의 강’ 마지막 ‘망각의 강’이다. 누구나 인간은 어느 날, 그 ‘가방’을 메고 강들을 차례로 건너야 한다. 강경호의 「가방」은 억지로 언어를 구부리거나 풍경을 구겨 넣지 않는다. 가슴 속 눈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심성을 풀어놓았다. 언어의 지나친 기교, 현학적 시법에 비껴 있는 그의 세계는, 바다의 수평선처럼 아득하게 다가온다. 초혼가招魂歌 초혼은 “죽은 자를 다시 부르는 의식”이자, 사라진 것의 현존을 재구성하는 시작법의 오래된 방식이다. 강경호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비극적 절경은, 아우의 죽음을 부활의 ‘언어’로 불러낸 몇 편의 시다. 「移葬하고 나서」, 「공동묘지에서」, 「검은 뼈의 폐허」, 「견고한 죽음」, 「환상통」은 현대시의 보기 힘든 성과이다. 박목월의 「하관」, 송수권의 「산문에 기대어」에 비견되는 이 탁월한 작품은, 비통과 절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절절하게 새겼다. 비록 동생 “성호”의 몸은 흩어졌지만, 그 혼만은 여전히 ‘형’의 심장을 흔든다. 살아남은 자가 자기 안의 ‘부재의 현존’과 마주한 절규다. 곁에 있을 때보다 사라진 뒤에 더 강렬하게 묻게 되는 초혼은, 시의 패러독스다. 특히 「공동묘지에서」와 「검은 뼈의 폐허」는 이 시대 보기 드문 서정시의 수작이다. 가을볕 아래 묘지들이 따스하다 유년에 새 둥지를 찾아다니던 아우와 함께 쏘다녔던 마을 뒷산 가을이었던가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녘 공동묘지 어디선가 새 한 마리 날아오르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 내리는 공동묘지에 버려진 항아리 속 작고 어여쁜 아기 꽃신 한 켤레 살과 뼈는 녹아버리고 고무신만 남아 엄마를 부르는 것 같았다 오늘은 무성한 숲속을 더듬거리다가 공동묘지에 들어섰다 더 늘어난 무덤들 앞에 박힌 비석에 새겨진 낯익은 이름들이 낱낱이 떠오르는데 한쪽 귀퉁이 흙이 흘러내린 아우의 무덤 그 앞에 서서 오십 년 전 어린 아우와 함께 들었던 산중에서 아이 우는 소리, 이승이 그리운지 묘지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들 그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 「공동묘지에서」 전문 강경호의 「공동묘지에서」를 읽어 가는 중에,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어린 시절 죽은 “아우”와 “새 둥지를 찾아다니던” 추억은 사무친다. “공동묘지”에서 들은 “아이 우는 소리”는, 환청의 균열이 더 그로테스크하다. 이런 존재론적 뒤틀림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가장 순수한’ 상태를 낳았다. 죽은 동생과의 기억의 잔향이야말로, ‘울음의 형식으로밖에 되살릴 수 없는 환유인지도 모른다. 그 옛날 동생과 함께 본 “살과 뼈”가 다 녹아버린, “비 내리는 공동묘지에 버려진 항아리 속/작고 어여쁜 아기 꽃신 한 켤레”는, 초현실주의를 보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검은 뼈의 폐허」는 실존의 마지막 극사실화를 채색하였다. 너를 덥썩 안아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은 뜨거운 눈물 검은 뼈에 떨어질 때 눈물이 많았던 너도 울고 싶었을 것이다 살이 녹아 뼈에 붙은 검은 흙을 털어내는 손길이 애잔하다 한때 ‘형’하고 불러주었던 입술과 지긋하게 나를 보아주었던 눈은 사라져 검은 뼈의 폐허뿐이어도 착하게 살았던 짧은 일생을 기억하기 때문에 너는 죽었어도 내가 숨 거두는 날까지 살아있을 것을 믿는다 부서지고 망가진 것을 폐허라고 부른다면 검은 뼈만 남은 너는 분명 폐허이지만 오롯한 정신을 담았던 두개골과 새를 쫓아 아버지의 산을 누볐던 튼실한 다리뼈와 발은 아버지의 산을 기억하겠구나 쉽게 부서지는 아우의 유골을 하얀 종이 위에 퍼즐 맞추듯 짜맞추며 완성된 너의 일생에 내 눈물을 보탠다. - 「검은 뼈의 폐허」 전문 죽은 아우의 「검은 뼈의 폐허」를 본 형의 흉중은 어땠을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통곡이 무너진 자리에서 터져 나온 비가悲歌일 것이다. “살이 녹아 뼈에 붙은 검은 흙을 털어내는” 형의 “애잔”한 “손길”은 비현실 같다. 금방이라도 죽은 아우가 “형”하고 부를 것만 같은 환시가 보인다. 이때 그 형은 지워진 한 인간을 본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크기 앞에서 느끼는 압도―즉, 숭고미일 것이다. 살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난 뼈의 존재는, 멈춰버린 아우의 시간을 확인시킨다. 그렇다. 「검은 뼈의 폐허」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눈물 이전의 울림으로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에필로그 - 고백 이번 강경호 시집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에서, 가장 역설적인 시는 「사랑에게」가 아닐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후회’와 ‘울음’, ‘위로’와 ‘사랑’으로 고백한 이 시는, 공동체 전체의 상처와 기억의 구조를 다뤘다. 특히 우리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역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국가 폭력과 억압이 실제 하였고, 그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후대의 윤리적 판단이 된다. 역사가 증명하듯, 권력은 종종 불편한 과거에 대해 망각을 강요한다. 그러나 산자는, 반드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해야 할 책무가 있다.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의 회복이야말로, 그의 「사랑에게」가 가리키는 “광주”의 표지판이다. 변명하고 싶었는데 위로하고 싶었는데 40년이 되도록 말하지 못했다 이제쯤 변명해도 될까 상처 입은 사랑을 어루만져 줄 수도 있을까 그러나, 나는 사랑 앞에서 딴짓만 하는가 천 편의 서정시를 쓰면서도 너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는가 절벽 끝에 배수진을 치며 고립무원의 섬이 되었을 때, 얼마나 외롭고 절망했을까 光州, 너의 이름을 부르며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내 사랑이여. - 「사랑에게」 전문 국가 폭력의 직접적 체험으로 인한 그의 “상처”는 침묵의 시였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는 근원을 건드린다. 그의 행간은 피의 침묵, 부재의 이미지, 부서진 시간, 반복되는 기억, 이름 없는 죽음이 보인다. 가족과 이웃이 희생되는 장면을 목격했을 그 무수한 죽음에게, 강경호는 살아남은 자의 참회록을 쓴다. 고향 “광주”에게 바친 이 노래는 세대를 넘어선 슬픈 울음이 들린다. 오랜 시간 ‘사회적 낙인과 고립’은 광주인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정의의 역사는 기억한다.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질문을 우리에게 묻는다. 광주인에게 그때의 그 트라우마는, 아직도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 밖에도 이번 강경호 시집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는, 매 시편마다 죽음에 대한 비극적 인식과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가 가득하다. 「결빙을 기다리며」는 무분별하게 파괴되어 가는 지구 환경 시다. “빙산 조각을 타고” 가는 “북극의 곰”은,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낳은 결과이다. 이 장면은 세계가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생명체임을 증거 한다. 결국 곰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는, 섬뜩한 사이렌이 들린다. 한편 「그 남자의 저녁 산책·1」 연작 시리즈는, 통제되지 않는 현실과 부조리에 대한 시로 읽힌다. “커다랗고 험상궂은 개”는 부조리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만약, 개가 위협적이고 개 주인이 책임을 회피한다면, 사회적 약속은 무의미하다. 이런 갈등과 긴장은 타인에게 불편함과 위협이 된다. 종종 시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나운 개는, 인간 내부의 억압된 충동, 폭력성, 불안을 상징한다. 아마 강경호는 패러독스를 통해 인간이 자기 안의 야생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시는 밤새워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듭한다. 행과 연 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보석 같은 시어를, 자르고, 쪼고, 갈아서 빛을 낸다. 좋은 서정시가 그렇듯, 그의 이번 시집은 눈물과 그늘진 사회와 역사의 압화이다. 사실주의의 기법으로 표현한 동생의 죽음과 행간 묘사는 탁월하다. 현실보다 더 시적인 장소가 없음을, 이 시편들은 잘 보여준다. 한편, ‘광주의 상처’를 통해 시인의 몸이 역사를 관통하는 통로임을 확인케 한다. 살다 보면,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그의 시는 상상력과 절제된 압축의 작업이다. 달빛의 흐느낌을 비가의 형식으로 노래하는가 하면, 부모 형제에 대한 애절한 사무침이 있다. 또한 그의 풍경의 갈피 속에는 불타오르는 아픈 내면의 지층이 놓여 있다. 기억과 추억 사이 그의 시는, 「사라진 집」처럼 바람의 흐느낌과 외로움의 눈물이 비친다. 모든 ‘비움’은 길 위에서 ‘성령’으로 완성된다. 한 번 세계를 통과한 존재가 자기 바깥을 경험한 뒤, 다시 자기 안으로 접히는 방식이다. 하여, 그의 시는 가득 찬 말이 아니라, 말과 말씀 사이, 존재와 실존 사이 ‘텅 빈 사유’의 깊이와 무욕을 드러낸다. 비어 있기에 오히려 충만한 돌아가는 자의 노래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 서서 그가 반추한 쓸쓸함은, 고독한 자의 우수다. 그에게 슬픔은 개인과 공동체의 비극에서 겹친다. 하여, 강경호의 시 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타인의 상처를 존재의 언어로 끌어올린, 이 시대 마지막 서정시의 증언자로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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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시집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는 십 년 만에 나온 역작이다. 그의 시는 상상력과 절제된 압축의 작업이다. 달빛의 흐느낌을 비가의 형식으로 노래하는가 하면, 부모 형제에 대한 애절한 사무침이 있다. 또한 그의 풍경의 갈피 속에는 불타오르는 아픈 내면의 지층이 놓여 있다. 기억과 추억 사이 그의 시는, 「사라진 집」처럼 바람의 흐느낌과 외로움의 눈물이 비친다. 모든 ‘비움’은 길 위에서 ‘성령’으로 완성된다. 한 번 세계를 통과한 존재가 자기 바깥을 경험한 뒤, 다시 자기 안으로 접히는 방식이다. 하여, 그의 시는 가득 찬 말이 아니라, 말과 말씀 사이, 존재와 실존 사이 ‘텅 빈 사유’의 깊이와 무욕을 드러낸다. 비어 있기에 오히려 충만한 돌아가는 자의 노래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 서서 그가 반추한 쓸쓸함은, 고독한 자의 우수다. 그에게 슬픔은 개인과 공동체의 비극에서 겹친다. 하여, 강경호의 시 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타인의 상처를 존재의 언어로 끌어올린, 이 시대 마지막 서정시의 증언자로 규정된다. - 김동원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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