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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서정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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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 12


제1부 물고기 사슴

대부분의 영화도 그렇게 끝나고는 했다
흔들리던 날의 기차
백일홍 나무 아래에서
볕뉘
3월
파도와 초승달
물고기 사슴
플라밍고의 가을
구등대에서
바다의 시
별이 빛나는 시
지석강 휴게소
바다를 바라보는 담장
불빛을 향해
나 대신 나타샤가 걸어 나온다
제 자리에 있는 것들이 아름답다


제2부 달을 불러보았다

은사시나무의 실로폰
명자꽃 아래
사이
사랑이 오고 있었다
달을 불러보았다
저녁 불빛 같은
눈사람과 숟가락
기다리는 동안
천변에서 보낸 사랑
조용한 눈
산수국
무화과 소묘
오만 원
통영 김밥
나뭇잎에 부치는 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제3부 폐차장은 바람 부는 날 가야한다

거룩한 동거
홍어 한 점
오후 네 시
수선화
해 질 무렵
죽은 나무
종이의 시간
존 여자
폐차장은 바람 부는 날 가야 한다
양은이네 집
시인과 벌교
나무 아래 그녀들
조도에서
목욕탕 시계
달마라는 남자가 와서 사는 집
일곱 시에는 마실을 간다 했지요


제4부 골목에 숨어들기 위해서다

유년의 바다
숭어 이야기
은사시나무 아래의 저녁
둥글게 앉아
그해 여름
섬에서 산다
손양말
삼월이
봄밤
복자씨 달래기
섬으로 가는 삼촌
연자방아 잔소리
분꽃 전구
엄마의 냉장고
당신이랑 산다
목포
도초에서


작품론
동물적 상상력과 존재의 자리 모색 / 강나루

저자 소개 1

1968년 완도군 금일도 출생. 간호전문대와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착학과를 졸업하였다. 2009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하였다. 전남 나주중앙초등학교 보건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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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25*200*20mm
ISBN13
9788956658537

책 속으로

대부분의 영화도 그렇게 끝나고는 했다



주인공은 늙지도 않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름다웠다 조연들은 밤사이에 몸이 조금씩 불었거나 머리가 허술해졌으며 그 많던 잉어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마의 끝을 알고 있는 시장 지붕 위로 가난이 구겨진 운동화 끈을 붙잡고 있었다 월세처럼 밀려오는 내일을 계산하기에 바쁜 천변은 흘려보낸 이야기로 물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세월 속의 여우 한 마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숲으로 돌아갔다.






흔들리던 날의 기차



해안 끝의 우체국으로 가는 기차는 바람을 빗 삼아 단발머리를 날리며 오고는 하였다 야간 운행을 떠나는 간이역을 지날 때, 산허리에서 깜박이는 코스모스 암자를 떠올렸다 흔들리고 싶은 날이 더 많은 기차는 기타를 메고 달려오기도 하였다.





백일홍 나무 아래에서



사랑이 그리운 날
분홍 원피스를 빌리러 갔으나
한 벌 뿐이라서 줄 수 없다고 하고
작아서 맞지 않다고 하니

백일홍 나무 아래에서
기다림을 손끝에 얹어
날려 보내고 있다.






볕뉘*



무화과 익어가는
바다

낙지처럼
무너지는 몸으로

부여잡은
호미를

슬쩍
스쳐 가는

고갯마루.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3월



누구를 깨우는 그리움인지 너는 사방에서 피어나 향기를 내었다 연둣빛 젖꼭지들은 한사코 햇볕이 드는 쪽으로 솟구쳤다 심상찮은 얼굴의 하늘은 할 말 참고 있는 나처럼 아직 안개 속에 어깨가 가려져 있었다 허공도 차츰 싹을 틔워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는데 이대로는 말고 미루었던 이별을 꺼내 제대로 보내고 싶은 3월이다.






파도와 초승달



너는 왜 나귀에 대해서 묻는 거지 초승달이 가지고 간 쌀 한 되와 작은 냄비를 이자를 붙여서 내놓으라는데 이자 계산은 어디에서 하지 파도에 쫓겨 달리던 나귀도 나귀를 몰던 사람도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텐데 어디에 가서 만나지 나를 바닷속으로 끌고 가지 않았던 마음을 어떻게 전하지

안개 속으로 쫓아오는 평생은 초승달을 내놓으라고 해 나는 그 무섭고 질긴 것을 불릴 수 없어서 지금도 한없이 쳐다보는 중이야.





물고기 사슴



늙은 사슴의 눈으로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고 있지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살지만
주어진 곳은 방 한 칸인 어항 뿐이야

거울 속에서 검게 변하는 종이를 꺼내
종이접기를 하면
나중에 별이 되기도 할까

기다림의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화장실로 뛰어갔지

꽃이 시들어가는 꽃밭에
꽃씨들이 한창인 것은
물고기가 사슴처럼 사는 일과는 또 다르지

어항처럼 빙빙 돌았던 방과 화장실
그것마저 필요 없는 곳은 어디일까

물 위에 촛불을 켜놓고
들판을 힘차게 뛰어가고 싶어.







플라밍고*의 가을



가장 슬픈 지점에서
그해 가을은 멈춰 버렸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눈동자 속으로
꿈을 꾸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신발과 가방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했을 인사가 궁금해지는 저녁이면
이 별을 잠시 스쳐 간
한 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하늘에 띄워 올린 웃음이
너무 작아서
길바닥에 남긴 발자국이
너무 가벼워서

한 점 구름으로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먼 하늘을 향해
목을 세우면

한쪽 다리를 접은 날개가
길을 내고 있었다

지상의 숙제들이
추운 별로 떠올랐다.


✽홍학






구등대에서



섬들을 뜰채로 떠서
열두 마리 굴비 선물처럼
멀리 보내고 싶은
나이가 되었을 때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보리 숭어들이
구등대를 찾아왔고
동백꽃이 꼬마전구처럼 섬을 밝히고 있었다

칭얼거리는 물결이
매실 익은 냄새를 풍기며
저녁의 품으로 안겨왔다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불빛이
구등대에 와서 머무르다 떠나고 싶어 하였다

나는 혼자 등대 속으로 걸어갔다가
울다 등대 밖으로 나왔다

다리들이 섬과 섬들을 이어가는 동안
등대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동백꽃이 바다로 떨어질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섬을 떠나는 생각을
구등대의 불빛처럼 밝히곤 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 작품론


동물적 상상력과 존재의 자리 모색
― 천화선 시집 『물고기 사슴』의 시세계


강나루(문학평론가)


1. 어떤 몸으로, 어디에서 살지에 관한 고민
한국 현대시의 긴 행간에는 제 살 곳을 잃은 존재들이 오래 머물러 왔다. 고향을 등진 유랑의 노래에서 산업화의 변두리를 견딘 민중의 언어, 인간 중심의 질서를 되묻는 생태적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시는 밀려난 생명에게 작은 거처 하나를 내어주곤 했다. 가난과 노동, 가족의 불화와 죽음이 생의 가장 깊은 곳에 물때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서 사람이 사람의 이름만으로 살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천화선 시인의 『물고기 사슴』을 읽고 나면 시인의 서정 또한 그 긴 현대시의 물길 가까운 어느 지점에서 흐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는데, 물고기의 몸에 사슴의 눈이 깃들고, 부엌을 빠져나온 숭어가 수평선을 향해 달리는가 하면 한 지붕 아래 모인 가족도 코끼리와 여우, 코알라와 곰으로 흩어져 저마다 다른 침묵을 앓는 장면이 특히 강렬하게 다가온다. 현실을 피해 짐승의 몸속으로 숨어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이름과 역할이 다 품지 못한 외로움과 욕망이 비로소 눈과 발과 지느러미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끼니를 건져 올리던 노동의 물결과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간 죽음의 물결이 한데 겹쳐, 대문 틈으로 들어와 밥상 곁에 앉고, 숟가락과 신발, 이불 밖의 맨발에도 이미 떠난 사람의 온기가 희미하게 남음으로써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지만 그의 자리를 기억하는 물과 사물이 산 사람의 하루를 오래 붙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애쓰고 있다. 즉, 천화선 시인의 시가 부재를 말하는 방식에는 이처럼 생활의 체온이 먼저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고기 사슴』은 한국 현대시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어떤 몸으로, 어디에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용하여 던지고 있다. 주어진 자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알맞은 생의 형식을 찾아갈 것인가. 이 질문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2. 동물적 상상력과 존재의 실존방식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그 환경이 언제나 자신의 본성과 욕망에 알맞은 것은 아니다. 가족과 사회가 정해놓은 자리에 오래 머물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기도 한다. 천화선 시인은 이러한 존재의 불화를 서로 다른 생태를 지닌 동물들을 결합하거나 인간을 동물의 모습으로 변형시켜 드러낸다. 천화선의 동물적 상상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표제시 「물고기 사슴」이다.

늙은 사슴의 눈으로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고 있지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살지만
주어진 곳은 방 한 칸인 어항 뿐이야

거울 속에서 검게 변하는 종이를 꺼내
종이접기를 하면
나중에 별이 되기도 할까

기다림의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화장실로 뛰어갔지

꽃이 시들어가는 꽃밭에
꽃씨들이 한창인 것은
물고기가 사슴처럼 사는 일과는 또 다르지

어항처럼 빙빙 돌았던 방과 화장실
그것마저 필요 없는 곳은 어디일까

물 위에 촛불을 켜놓고
들판을 힘차게 뛰어가고 싶어.
― 「물고기 사슴」 전문

‘물고기 사슴’은 물속에서 사는 물고기와 들판을 달리는 사슴이 한 몸을 이룬 형상이다. 서로 다른 생태를 가진 두 동물이 결합했으므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불가능성이 작품의 의미를 만든다. 몸은 물고기이지만 눈은 사슴의 것이고, 생활은 어항 속에 갇혀 있지만 욕망은 들판을 향한다. 존재의 내면과 그가 놓인 현실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늙은 사슴의 눈으로/물고기처럼 헤엄을 치고” 있다고 말한다. 사슴의 눈은 넓은 들판을 바라보지만 물고기의 몸은 “방 한 칸인 어항”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항 속 물고기는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결국 같은 자리를 맴돈다. “어항처럼 빙빙 돌았던 방과 화장실”도 마찬가지이다. 움직임은 있으나 삶의 장소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어항은 단순한 방이 아니라 한 존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현실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기다림의/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장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기자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호출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때 기다림은 미래를 향한 기대가 아니라 삶의 결정을 타인에게 맡긴 채 유예되는 시간이다. 방과 화장실을 오가는 생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는 이름은 자신의 생을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존재의 처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서정적 자아는 거울 속에서 검게 변한 종이를 꺼내 종이접기를 한다. 검은 종이는 늙고 상처 입은 몸이며 어두워진 내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종이를 버리지 않고 접으면서 “나중에 별이 되기도 할까”라고 묻는다. 종이접기는 주어진 재료의 형태를 자기 손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따라서 검은 종이를 별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에는 이미 주어진 삶을 다른 형상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꽃이 시들어가는 꽃밭에/꽃씨들이 한창”인 것은 소멸 속에서 다시 생명이 준비되는 자연의 순환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사슴처럼 사는 일”은 자연의 순환과 다르다. 늙고 시드는 것은 생명의 질서이지만 자신의 본성과 다른 삶을 강요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서정적 자아가 물 위에 촛불을 켜놓고 들판을 달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알맞은 생의 자리와 운동방식을 찾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물고기 사슴」은 타인의 질서 속에서 살아온 존재가 자신의 몸과 욕망에 맞는 삶을 꿈꾸는 작품이다.
이러한 존재의 불화는 「거룩한 동거」에서 가족의 문제로 변주된다. 늙은 코끼리와 여우, 코알라와 곰은 한집에 살지만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대의 방문을 열지도 않는다. 시제인 ‘거룩한 동거’는 반어적이다. 가족들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겨우 동거를 지속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서로 다른 동물로 형상화한 것도 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각자가 전혀 다른 생태와 상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동물적 상상력은 「숭어 이야기」에 이르면 현실의 자리를 벗어나려는 실천적인 움직임으로 확대된다.

마을 어귀 바닷가에서 숭어 한 마리를 안고 도망쳐올 때 뒤를 따라온 바다, 파도 소리가 방문을 두드렸지 미역국에 넣은 숭어는 북두칠성으로 떠오르고 더 큰 고기를 잡고 싶었던 나는 그물을 엮었지

당신은 평상에 앉아 마당으로 낚싯대를 드리웠어 보이지 않은 눈으로 세상을 낚다가 부엌에 나를 가둬버렸지 생나무로 밥을 짓던 끼니때면 부뚜막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어

사람의 온기를 따라 물고기가 마을 가까이 온 날, 비상금을 들고 도망쳤어 등을 밀어주던 밀물과 꼬리를 잡아당기던 썰물로 지느러미를 키웠지 당신은 그제서야 낚싯대를 거두고 방으로 들어갔어

몸집을 키운 수평선이 찾아 왔어 마을과 바다의 경계에서 살았던 숭어가 크게 자랄 거라고 믿고 끝없이 달려왔던 중이야.
― 「숭어 이야기」 전문

「숭어 이야기」는 바닷가 마을에서 살아온 한 여성의 생을 숭어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서정적 자아가 숭어 한 마리를 안고 도망쳐오자 바다는 파도 소리로 방문을 두드린다. 미역국에 들어간 숭어는 “북두칠성으로 떠오”른다. 끼니를 위한 물고기가 방향을 알려주는 별자리로 바뀌는 것이다. 이는 가난한 생활의 한복판에서도 더 넓은 세계를 향한 욕망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큰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엮는 행위 역시 자신의 삶을 넓히려는 의지와 관계된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의 현실은 부엌에 갇힌 삶이다. “당신”은 평상에 앉아 마당으로 낚싯대를 드리우며 세상을 향하지만 화자를 부엌에 가둔다. “보이지 않은 눈”은 실제의 신체 조건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한 여성의 욕망과 고통을 보지 못하는 관계의 맹목성을 드러낸다. 평상과 부엌은 두 사람의 삶을 가르는 공간이다. 한 사람은 바깥을 향해 낚싯대를 던지고, 다른 한 사람은 생나무로 밥을 지으며 가족의 끼니를 감당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부뚜막을 두드리며 노래한다. 이 노래는 폐쇄된 공간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는 생의 형식이다. 마침내 비상금을 들고 집을 떠난 그는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지느러미를 키웠”다고 말한다. 밀물은 등을 밀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고, 썰물은 꼬리를 잡아 과거의 자리로 되돌리려 한다. 화자는 이 상반된 힘 속에서 자신의 생존기관을 길러낸다. 주어진 조건이 사라진 뒤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밀고 당기는 현실 속에서 나아갈 힘을 만드는 것이다.
화자가 집을 나서자 ‘당신’은 낚싯대를 거두고 방으로 들어가는 한편, 부엌에 갇혔던 사람은 바깥으로 나가고 세상을 낚던 사람은 안으로 물러난다. 이 공간의 전도는 두 사람을 지배해온 관계의 질서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몸집을 키운 수평선’은 그 뒤에 얻어진 세계의 크기이다. 다만 화자가 수평선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수평선이 찾아왔다는 점에서, 그것은 단순한 탈출의 성과라기보다 움직이기 시작한 존재에게 비로소 열린 삶의 가능성이다.
숭어가 헤엄치지 않고 ‘끝없이 달려왔던 중’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물고기의 달리기는 물과 땅, 생태와 역할의 경계를 깨뜨리는 역설이다. 「물고기 사슴」의 물고기가 어항 속에서 들판을 꿈꾸었다면, 「숭어 이야기」의 숭어는 그 불일치를 몸의 운동으로 바꾼다. 하나가 욕망의 자각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욕망의 실천이다. 그러나 ‘중’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그 실천은 완결된 해방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생의 도정이다.

3. 바다와 섬의 장소성
천화선 시인의 시에서 바다는 시적 주체가 태어나고 성장한 원초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그 바다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동해야 했던 곳이며,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간 죽음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고향을 떠난 뒤에는 어머니와 남편의 기억을 불러오는 그리움의 장소가 된다. 이렇듯 천화선 시인의 바다는 생명과 죽음, 상처와 위안이 함께 놓인 양가적인 공간이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바다라는 이름으로
시를 아무리 써도
비워졌다가 금방 채워지는 날들을
배웠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제아무리 밥을 먹어도
그리움이 채워지지 않았던
날들 마냥

아침이면 멀리 나갔다가
해가 져야 돌아오는
어머니의
천년 등대 같은 시를
바다에서 건져 올리고 싶었다.
― 「바다의 시」 전문

화자는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태어나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바다가 보이는 집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게 하지만 화자에게는 가난과 노동의 기억이 먼저 깃든 장소이다. 아침이면 멀리 나갔다가 해가 져야 돌아오는 어머니의 삶이 그 바다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바다를 통해 “비워졌다가 금방 채워지는 날들”을 배웠다고 한다.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밀물이 다시 채우듯 바다는 비움과 채움을 반복한다. 그러나 인간의 그리움은 자연의 순환처럼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제아무리 밥을 먹어도” 그리움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진술은 육체의 허기와 마음의 허기를 대비시킨다.
어머니는 “천년 등대”로 형상화된다. 등대는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고 귀환의 방향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바다에서 노동한 어머니 역시 가족의 생을 지켜낸 등대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천년 등대 같은 시를/바다에서 건져 올리고 싶었다”는 소망에는 바다에 잠긴 어머니의 시간과 노동을 시의 언어로 되살리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이 작품에서 바다는 어머니를 잃은 부재의 장소이면서 그 기억을 다시 건져 올릴 수 있는 시적 공간이다.
「섬에서 산다」에서 바다는 더욱 일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루에 앉아 풋고추에 상추쌈을 하려는데
바닷물이 대문 틈 사이로 들어왔다

제집 인양 드나들어서
신발을 가져가기도 하고
빨랫줄 밑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더니
오늘은 함께 한술 뜨러 왔나 보다

밥 한 숟갈을 던져주자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드는 바닷물

된장국 한 수저를 건네자
초저녁달이 맛을 본다

바다로 간 남편
간간이 안부를 물으러 찾아온 것 같아
집을 떠나지 못하고 산다

숱하게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러 오는
저녁이 있어서

외로운 섬 하나 화초처럼 기르며
그 안에서 산다.
― 「섬에서 산다」 전문

이 작품에서 바닷물은 대문 틈으로 들어와 한집에 사는 식구처럼 행동한다. 신발을 가져가고 빨랫줄 밑에서 쉬었다가 밥상 곁으로 다가온다. 화자가 밥 한 숟갈을 던져주자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된장국 한 수저를 건네자 초저녁달이 맛을 본다. 자연은 멀리 있는 풍경이 아니라 생활의 밥상에 함께 앉는 존재이다.
풋고추와 상추쌈, 밥과 된장국은 화려하지 않지만, 구체적인 삶의 온기를 보여준다. 이 밥상에 바다와 달이 들어오면서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동시에 부재한 사람도 생활의 자리로 돌아온다. 화자에게 바닷물은 “바다로 간 남편”이 안부를 물으러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바다는 남편을 데려간 죽음의 장소이다. 그러나 그 바닷물이 다시 집으로 들어와 남편의 기척을 전한다. 그러므로 바다는 상처를 만든 대상이면서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안의 형식이 된다. 화자가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바다를 통해 간간이 돌아오는 남편의 안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죽음의 장소와 기억의 장소가 하나로 겹치는 것이다.
마지막에서 화자는 “외로운 섬 하나 화초처럼 기르며/그 안에서 산다”고 말한다. 섬은 외부와 단절된 고독의 공간이다. 그러나 화자는 그 섬을 버리거나 탈출하려 하지 않고 화초처럼 기른다. 화초를 기른다는 것은 물을 주고 햇빛을 살피며 오래 돌보는 행위이다. 따라서 외로운 섬을 화초처럼 기르는 것은 자신에게 남겨진 고독과 상처를 방치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돌보는 태도이다. 천화선의 시에서 상처는 완전히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자신의 생 안에서 감당하고 보살펴야 할 기억이다.
바다의 이러한 양가성은 「바다를 바라보는 담장」에서도 확인된다. 다시마를 채취하다 손가락을 잃은 인물의 등은 꺾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안의 바다가 철썩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의 바다는 노동을 강요하고 몸을 훼손한 고통의 현장이다. 그러나 내면의 바다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생명성의 표지이다. 다시 말해 천화선 시인의 바다는 인간에게 상처를 입힌 현실인 동시에 그 현실을 견디게 하는 생의 힘이다.

4. 사물의 기억과 버려진 것들의 이름
죽음은 한 사람의 육체적 시간을 끝내지만, 그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까지 끝내지는 못한다. 죽은 사람의 체온은 그가 사용하던 사물과 몸을 돌보았던 손길 속에 오래 남아 있다. 천화선 시인은 죽음을 관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입과 발, 손과 숟가락 등 구체적인 몸과 사물을 통해 애도의 정서를 형상화한다.
「눈사람과 숟가락」에서 화자는 “자물쇠가 잠긴 것 같은” 입을 두 개의 숟가락으로 벌려 미음을 넣는다. 평범한 식사도구인 숟가락은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붙들기 위한 돌봄의 도구가 된다. 작품 속 눈사람은 “태어난 시간보다 더 오래 녹고 있”다.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지만 부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눈사람이 녹는 시간은 남은 사람이 견뎌야 하는 애도의 시간이다.
「손양말」에서도 죽은 사람을 향한 돌봄은 계속된다. 화자는 이불 밖으로 나온 맨발을 두 손으로 감싼다. 그 발이 “저 세상을/쉬지 않고 걸어가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손이 실제로 저세상을 걷는 발을 따뜻하게 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 때문에 두 손으로 발을 감싸는 행위는 더욱 애절하다. 죽음 이후에는 현실적인 돌봄이 가능하지 않지만 사랑의 감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그의 시에서 사물은 아무런 감각도 지니지 않은 무생물이 아니다. 숟가락과 이불, 신발과 밥상은 죽은 사람의 손길과 체온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온다. 사람은 떠났지만, 사물은 남아 그가 살아온 삶을 증언한다. 이는 곧 시를 쓰는 행위가 곧 사물에 깃든 이름과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행위로 승화하는 것이다.

폐차장에 들어설 때
다친 무릎을 감싸준 이불 같은 눈길이 있었다

한때 등나무 아래로
반찬 그릇이 왔다 갔다 했던 남자는
폐차장의 사장이 되었고
여자는 다른 데서 제 앞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몰래 넣어 놓은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들킨 것부터
잘못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어렵게 찾은 영화관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서
천정에 불이 켜지고 말았다

버려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폐차장은
바람 부는 날 가야 한다

한 생을 다 달리고 나면
눈물보다 더 오래 가는 슬픔을
바람은 꽃으로 피우고 있었다.
― 「폐차장은 바람 부는 날 가야 한다」 전문

이 작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한 생을 다 달린 뒤 폐차장에 버려진 자동차의 운명을 겹쳐놓는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한때 등나무 아래로 반찬 그릇이 오가던 시간이 있었다. 반찬을 주고받는 소박한 행위 속에는 직접 말하지 못한 두 사람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몰래 넣어놓은 편지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고, 어렵게 찾아간 영화관에서도 손 한번 잡지 못한 채 천장의 불이 켜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 감정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완성되지 못한 사랑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의 기억은 한 생을 다 달리고 폐차장에 들어온 자동차의 모습과 겹쳐진다. 자동차는 한때 사람과 사연을 싣고 수많은 길을 달렸지만 폐차장에서는 고철과 부품의 값으로 평가된다. 한 존재가 지나온 시간이 사회적 효용의 기준에 의해 지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폐차장에서 “버려진 것들의 이름”을 듣는다. 이름은 한 존재를 다른 것과 구별하는 고유한 표지이다. 버려진 것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익명의 폐기물로 취급된 대상을 다시 하나의 생으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자동차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더라도 그것이 지나온 길과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폐차장은/바람 부는 날 가야 한다”에서 바람은 버려진 것들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눈물보다 더 오래 가는 슬픔”을 꽃으로 피운다. 이는 고통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존재의 생의 이력을 시의 언어로 되살리는 일이다. 천화선 시인의 현실 인식은 이처럼 생활의 장소와 사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의 시는 가난과 노동, 여성의 억압과 가족의 상처를 거대한 사회적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생나무로 밥을 짓는 부엌, 닫힌 방문, 잘려나간 손가락과 쑤시는 무릎, 낡은 신발과 숟가락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물과 상처 입은 몸에는 한 인간이 감당해 온 현실의 시간이 퇴적되어 있다.
이 시에서 전면에 나타나는 환상들은 현실을 지우는 장치가 아니라, 비환상, 사실의 언어가 붙잡지 못한 상처와 부재를 되살리는 형상성이다. 즉, 천화선 시인의 환상이 밥상과 미역국, 맨발과 폐차장 같은 구체적인 삶에 붙어 있는 까닭에 그것은 공허한 장식으로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5. 상처를 끌어안고 찾아가는 생의 자리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물고기 사슴』은 동물적 상상력과 바다의 장소성, 사물의 기억을 통해 한 존재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자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장소도, 가족과 사회가 맡겨놓은 역할도 아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산다고 해서 어항이 그의 온전한 세계일 수는 없다. 한 여성이 오랫동안 밥을 지었다고 해서 생나무 연기로 가득한 부엌이 그의 본래 자리일 수도 없다. 오래 머문 자리와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는 다르다. 천화선은 그 차이를 동물의 몸과 생활의 공간이 빚는 불화 속에서 드러낸다.
「물고기 사슴」의 서정적 자아는 어항 같은 방을 돌면서 들판을 욕망하고, 「숭어 이야기」의 화자는 부엌을 벗어나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지느러미를 키운다. 전자가 주어진 삶과 내면의 욕망 사이의 불화를 자각한다면 후자는 그 불화를 실제의 이동으로 바꾼다. 이 경우 자기 자리란 어디엔가 마련된 안식처가 아니라, 주어진 질서와 부딪치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생의 형식이다.
그렇다고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이 과거의 상처와 관계를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니다. 시적 주체들은 떠나온 바다를 다시 바라보고, 바닷물에서 죽은 남편의 안부를 들으며, 숟가락과 맨발에 남은 사람의 체온을 기억한다. 폐차장에 버려진 것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떠남과 기억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잃고 견디며 살아왔는가를 기억할 때 비로소 주어진 자리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상처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단순한 회귀와 다르다.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상처에 붙잡혀 삶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외로운 섬 하나 화초처럼 기르”는 마음이 바로 그러하다. 화자는 자신의 고독을 삶에서 제거하지 않고 오래 돌보아 살아갈 수 있는 생의 형식으로 바꾸어놓는다.
천화선의 생명성은 상처와 무관한 밝고 건강한 힘이 아니다. 생나무로 밥을 짓던 부엌에서 부뚜막을 두드리며 부른 노래이며,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길러낸 지느러미이다. 죽은 사람의 발이 추울까 염려하여 두 손으로 만들어 신기는 양말이며, 눈물보다 오래가는 폐차장의 슬픔을 꽃으로 피워내는 바람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서 생명은 상처가 사라진 뒤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견디고 돌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런 까닭에 『물고기 사슴』의 시적 주체들은 상처를 완전히 극복한 뒤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상처와 부재를 자기 생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다시 움직일 힘으로 바꾸는 존재들이다. 어항을 돌던 물고기는 들판을 바라보고, 숭어는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지느러미를 키운다. 버려진 자동차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는 다시 이름이 주어지고, 외로운 섬은 화초처럼 길러진다.
결국 『물고기 사슴』은 주어진 삶의 자리에 갇힌 존재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몸과 장소를 만들어가는 시집이다. 그들은 과거를 지우지 않으며 상처가 없었던 때로 돌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부재한 사람의 체온과 버려진 것들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더 넓은 수평선을 향해 움직인다. 요컨대 천화선 시세계의 중심에 놓여있는 화두는 상처를 생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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