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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꽃 한 송이 안고서 땡감나무 빨간 장미 피는데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 벚나무길 꿈길 꽃 한 송이 안고서 금남로 찻집에서 한 마리 새 깃털 하나만 같은데 서울 가는 길 충장로에서 달을 보는 이유 모기에 지친 날 경주 대왕릉길 문병란 시인을 생각한다 마이 웨이 꿈꾸는 대지 운주사에서 제2부 사과를 건네며 대서大暑 서울 반 바퀴 물푸레나무처럼 까치집 입술이 하는 말 마당의 시간 불면의 역사 케리이야기 늙는 거울을 마주하며 거꾸로도 살자 나는 바다가 좋다 산티아고를 그린다 탑정호에서 사과를 건네며 산수유 피는 강 낙화落花 진강鎭江에 서서 봄비 제3부 털갈퀴나물꽃 코털에 대하여 존재의 시간 삶에 이유있는가 사월의 시 노래가 울린다 베드민트 치는 밤 북풍이 분다 에스컬레이터 1월의 영산강 57이라면 들풀 앞에서 털갈퀴나물꽃 현수의 눈물 미나리무침을 먹다가 영춘화 흔적 쓰러진 들판 영산포에 가면 제4부 어느 봄날에 연가 걷고 걸으며 가는 길 삶을 버리며 어느 봄날에 연가 삼각형에 대하여 문학기행 내가 돌아온 길 산뽕나무의 한 생 봄꽃을 보다가 아직은 청춘 고향 연가 새들과 가는 길 간이역 자아에 대하여 그립다 계엄의 밤 어떤 불안에 대하여 유월의 시 게르에서 하룻밤 제5부 해와 달 사이 목련꽃 피는 날 참새의 방문 중국 연운항에서 갈대에게 으아리꽃의 기도 배롱꽃 피면 오동꽃 피는 날 민들레 죽단화는 피는데 어느 꽃에서 쉴까 백제를 찾아서 내장사에서 노을에게 12월 작약꽃처럼 영산강 해와 달 사이 삶은 사랑이었다 평설 기억은 어떻게 지나간 삶을 비추는가? / 김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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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감나무
냉산 우리 집 우물가에는 고목이 된 감나무 한 그루 위풍당당 서 있었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는지 감나무와 함께한 날들이 켜켜이 쌓여있어 새벽, 감꽃 하얗게 피어나면 그 꽃 먹던 시간은 어제만 같은데 내가 떠나온 뒤에도 그 땡감 나무 많이도 그리워했었네 청시가 홍시가 될 때쯤 높은 가지 사이에 판자를 깔고 감 속에 앉아 놀던 날들 출렁거리는데 지금 그 한 생도 떫게 익어 가는 길인데 떨 분 땡감나무 사라지듯이. 빨간 장미 피는데 환장하리만큼 고왔던 눈 시리게 빨갛게 꽃 피던 그날이었다 프로레타리아 혁명의 전사가 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민주와 정의의 시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구도자 같은 순수의 길 아직도 비릿한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는지 미완의 시대가 서럽다 불타던 역사는 다시 또 피어나 저리 함몰하게만 하는 것은 무슨 불확실한 시대는 반복되려는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데 저리도 빨간 장미는 눈부시게 피는데.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 메마른 고비사막 광활한 초원 끝에 차가운 바람 따라 조랑말들이 갓 솟은 풀밭 사이를 누비고 있다 노란 할미꽃은 경건하게 피어나 먼 세월의 기도 올리는 듯한데 돌밭에 내려앉은 별꽃은 은하수처럼 하얗게 번져 고산의 적막한 길 위에 순결한 흔적 하나 남겨 둔다 징기스칸 후예들이 살아가는 땅 붉은 영웅들의 역사는 긴 침묵 끝에서 다시 깨어나고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의 영광은 모래바람 속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광막한 초원이건만 삶은 척박하고 바람은 차갑다 강대국들 틈 사이에서 한 나라의 운명은 오늘도 무수히 흔들리고 있다 스물여덟 해 짓밟혔던 우리 역사 또한 서러운 그림자 되어 겹쳐 오고 몽고반점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흔 하나 핏속 깊이 새겨진 듯 아리다 영원할 것 같았던 칸의 제국도 끝내 역사 앞에 무릎 꿇었으니 인간의 영화 또한 한낱 바람 앞의 모래 같지않은가 문득 나는 울란바토르 초원에 서서 무량한 님을 생각한다 칸이 아니라도 방랑자처럼 허둥거려도 우리 님은 바람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단단한 하나의 숨결로 서 있는 것만 같다. 벚나무길 강변에 벚나무 연초록 잎새 향긋하다 며칠 전 이 벚꽃 아래 현수와 사진 찍던 뭉클함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계절의 변화는 어떤 찰나에 이루어지는 괘도처럼 가는지 전율 스치는데 벚나무길은 생생해서 새롭다 그리보면 세상살이도 한순간 갑자기 놓을 수도 있겠다는 긴박함마저 드는데 벚꽃 떨구고 잎새 띄운 이 엄혹한 질서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내 영혼의 그림자가 남루하기만 한데 벚꽃 피었다 파란잎새 피운 삶은 어떠리. 꿈길 황량한 자작나무 꼭대기 까치집 바라보다 저 가지 어디쯤 흔들릴 것만 같은데 십 대 때는 이유 없이 해일海溢에 부서지며 어느새 지나갈지도 몰랐는데 이십 대에는 지역발전위해 청년운동에 빠졌고 삼십 대는 국가와 민족이란 대의에 젖어 큰 꿈 꾸며 바쁘게도 살았는데 그러다 사십 대에 큰 병 걸려 나왔는데 육십에 또다시 어떤 유혹처럼 늪에 빠져 회한, 좌절, 고독함만 주었는데 그러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 칭찬 생각에 불현듯 시인 말석 가는데 이 길 가기 위해 많이도 흔들리며 돌아온 건가. 꽃 한 송이 안고서 한 아름 꽃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흥행 안 된 연극만 같았던 시간들이 격정으로 뜨거운데 좋은 시간에 홀린 듯 멍하니 서서 절정의 날은 몇 번이나 지나갔을까 시 꽃이 이리도 아리게 한지 황홀하게도 만드는 것인지 손에 든 송이송이가 옹골차다 시행착오 같은 길은 뒤틀리며 흔들리는 코스모스꽃 같았는데 그러다 설치는 밤이 많아 서러웠는데 시 꽃이 넘치듯 안아 줄 줄이야 살다가 어느 대목에선가 애틋이 연출되고 피어나는 것인지 꽃 한 송이 안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이리도 절절하게 핀 시 꽃이 앞산처럼 덩실함이라는 것을 시 꽃이 이리 반겨 줄지 알았더라면 집적거리던 것들 진즉 내던지고 빨리도 좋은 시 쓰며 살아갈 것을. 금남로 찻집에서 세모의 아침이 금남로를 걷는다 한 평 남짓한 작은 커피숍 바쁜 발걸음 사이로 아메리카노 향기 가득하다 거리의 얼굴들은 바뀌어도 길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누군가는 지나가고 누군가는 사라지는 길 무표정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무심한 한 시민이고 방랑자일 뿐 12월 차가움을 맞으며 쉴 새 없이 옷깃을 스치는 표정들 그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한 마리 새 한 마리 새이고 싶었다 가까이도 높이도 나는 멋지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었다 많은 날을 다듬고 기다리고 달려왔었지만 그 새는 날 수가 없었지 자아를 힘든 세상을 탓했었네 그러다, 이제야 詩 날개 달고 훌훌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깃털 하나만 같은데 이삭이 꽉 차오르는 배동기 우리 논에 유난히 하얀 깃털 하나 떠 있다 허기진 왜가리 한 마리 우렁이 하나 낚아채고 찌는 더위에 털어놓고 간 흔적인지 논물 위를 떠도는 깃털 하나, 문득 떠난 왜가리 어디로 간지 알 수 없는데 우리 삶도 왜가리 깃털 하나 떨구듯 흔연히 육신을 벗어날 것인데 비문처럼 날지 못하는 깃털 문장 따라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느 시간 행간 속으로 스며들 텐데 깃털 하나가 내 생의 끝을 무수히 흔드는데 저리 사라지게 될 깃털만 같아 나도 논물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서울 가는 길 오늘도 숱한 세상이 오르내린다 많은 것이 이곳에 있고 먹고살기 위해 꿈을 찾아 오른다 살얼음판 같은 파노라마가 반복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꿈을 위해서, 대학을 가기 위해 격동의 시대, 여의도의 세찬 바람길에서 막다른 골목길 같은 절박함을 안고서 걸어온 길 이제 문단의 일을 맡아 오르는데 그러다 어느새 종심 길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한 생을 붙들고 나는 듯한 열차같이 빠르게 달려왔다 불현듯 이 시대를 건너는 젊음을 생각한다 나보다도 얼마나 고독하겠는가 그래, 우리는 다들 아프다 겨울날 서울의 허공은 언제나 바람 끝이 손님처럼 썰렁하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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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론
평설 기억은 어떻게 지나간 삶을 비추는가? 김 종 (시인, 화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를 읽거나 함께 걷는 일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을 지나 비로소 시집에 묶인 작품들은 언어의 단순 집합을 넘어 한 인간이 살아온 세월과 맺어온 관계의 기록이자 시간들이 빚어낸 도록이겠다. 김용갑 시인의 제3시집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 역시 그 같은 독서로 이어졌다. 사람의 기억이 삶의 문제를 묻다 이 시집은 우선 화려한 수사나 난해한 사유로 독자를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가까이 하였거나 미처 보지 못한 인간과 풍경들을 오래전에 떠나온 고향마을의 우물가 감나무와 청춘의 기억들이 굽이굽이 김 서린 골목길, 다가오며 부르는 부모 형제의 손짓, 달빛 아래 떠오르는 하얀 그리움 등… 이를테면 이 같은 것들이 일상의 언어나 몸짓들을 하나하나 차분차분 불러 세운다. 김용갑 시인의 시는 그처럼 특별한 사건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의 하루를 거대한 역사보다는 한 사람의 기억을 되살려가며 삶의 가치와 문제에 대하여 묻고 또 묻는다. 그러다 보니 김용갑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큰 정서적 줄기는 그가 간절하게 소환한 갖가지 기억들이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기억들은 과거를 아름답게 재현하는 단순 회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그만큼 차분하면서도 자별한 울림을 준다. 우리가 말하는 김용갑 시인의 기억은 현재를 밀고 가는 일종의 에너지 같은 흐름이며 지금의 자신을 이루고 있는’여기’와’지금’이라 이름한 존재적 근거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과거와 현재가 불가분리의 덩어리처럼 늘상 함께 하면서 의미 짓곤 한다. 대저 김용갑 시인이 거쳐온 지난 시절의 풍경은 현재의 삶 속에서는 다시 살아나는 일종의 만다라화이며 현재의 성찰에서 비롯된 또 다른 모습의 자기적 과거를 오늘의 시간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것은 ‘삶’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순환성이며 그 같은 의미가 시집 전체를 통어하는 하나의 자전적 서사나 도록이라 할만하다. 이 시집이 지닌 시적 핵심은’기억의 서정성’, ‘생활에서 터득한 철학성’, ‘시간의 존재론적 표정과 눈빛’, ‘시를 향한 자기 구원의 방식’ 등으로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시집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언어적 외형미보다는 자신의 삶을 받치거나 견디어 온 배경 같은 경험적 흐름이며 사람의 온기와 표정을 일관된 눈으로 탐색한 따뜻하면서도 자별한 성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냉산 우리 집 우물가에는 고목이 된 감나무 한 그루 위풍당당 서 있었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는지 감나무와 함께한 날들이 켜켜이 쌓여 있어 새벽, 감꽃 하얗게 피어나면 그 꽃 먹던 시간은 어제만 같은데 내가 떠나온 뒤에도 그 땡감 나무 많이도 그리워 했었네 청시가 홍시가 될 때쯤 높은 가지 사이에 판자를 깔고 감 속에 앉아 놀던 날들 출렁거리는데 지금 그 한 생도 떫게 익어 가는 길인데 떫은 땡감나무 사라지듯이 - 「땡감나무」 「땡감나무」는 유년의 공간이던 고향집 우물가가 이 작품의 출발 지점이다. 당시의 감나무를 존재와 성장, 소멸과 순환으로 그린 이 작품은 화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나무는 단순 개인사를 넘어서 사회적 시간까지를 켜켜이 축적하여 보여주는 사물이다. 그런가 하면 감꽃이 피고 청시가 홍시로 익어가는 과정은 인간 생애의 주기적 성숙과 놀랍도록 겹쳐진다. 특히나 마지막 행에서 보인 “떫은 땡감나무 사라지듯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겪은 여러 떫었던 삶이 결국은 오늘과 같은 홍시로 익었고 그러다가 이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적시한다. 여기에서 감이 떫은맛에서 익어간다는 이미지는 화자 자신의 유년과 이날까지 이어온 세월의 의미를 존재적 은유로 드러낸 것이다. 나무 위에 판자를 얹어 감을 따며 놀던 기억들은 순수했던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며 이는 단순 향수를 넘어 존재의 근원을 되짚어 정서적 시간으로 이동한다. 감나무라는 자연물이 인간 세상의 생로병사와 병치되면서 사물의 존재론적 사유가 오늘까지 이어진 그 시절의 기억을 매개하는 자리에 화자 또한 한 그루의 감나무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땡감나무」는 이 시집이 담아낸 전체적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일 수 있다. 그리 보면 감나무는 유년에 김 서린 여러 추억을 넘어 한 인간의 생애를 함께 한 사물이고 “내가 떠나온 뒤에도 그 땡감 나무 많이도 그리워했었네”에 이르는 것이다. 또한 여기까지에 와서 시인은 자신이 감나무를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감나무가 시인을 그리워했었다고 발언한 대목이 여간 곱상스러운 한편으로 이심전심의 정서마저 읽히는 것이다. 이 같은 시선의 전환과 진행은 시적 의미를 확대 전환하는데도 매우 효과적이다. 사물을 객체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로 바라보는 김용갑 시인에게서 한국의 전통시적 언어가 이어지거나 되살아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후반부의 “지금 그 한 생도 떫게 익어가는 길인데”라는 표현은 그 자체에서 언어가 조장한 긴 여운을 읽을 수 있고 사물의 단순 의미를 넘어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땡감은 숙성이 덜 되어 맛이 떫은 감을 이르는 말이나 시인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년의 자신도 아직 익어가는 과정이라 말하고 있다. 감나무의 생애와 인간의 생애가 하나의 동일 선상에서 운명처럼 겹쳐지는 부분이다. 거듭되지만 이 작품은 단순 향수를 노래한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아울러 시간과 존재를 하나로 아우르며 이에서 파생된 아름다운 생애시 한 편을 얻은 것으로 그 의미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메마른 고비사막 광활한 초원 끝에 차가운 바람 따라 조랑말들이 갓 솟은 풀밭 사이를 누비고 있다 노란 할미꽃은 경건하게 피어나 먼 세월의 기도 올리는 듯한데 돌밭에 내려앉은 별꽃풀은 은하수처럼 하얗게 번져 고산의 적막한 길 위에 순결한 흔적 하나 남겨 둔다 징기스칸 후예들이 살아가는 땅 붉은 영웅들의 역사는 긴 침묵 끝에서 다시 깨어나고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의 영광은 모래바람 속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광막한 초원이건만 삶은 척박하고 바람은 차갑다 강대국 틈 사이에서 한 나라의 운명은 오늘도 무수히 흔들리고 있다 스물여덟 해 짓밟혔던 우리 역사 또한 서러운 그림자 되어 겹쳐 오고 몽고반점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흔 하나 핏속 깊이 새겨진 듯 아리다 영원할 것 같았던 칸의 제국도 끝내 역사 앞에 무릎 꿇었으니 인간의 영화 또한 한낱 바람 앞의 모래 같지 않은가 문득 나는 울란바토르 초원에 서서 무량한 님을 생각한다 칸이 아니라도 방랑자처럼 허둥거려도 우리 님은 바람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단단한 하나의 숨결로 서 있는 것만 같다. -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 몽골 초원을 여행하면서 취재한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이 시집의 표제시임과 동시에 개인의 눈에 비친 이국적 자연을 역사와 문명에 대한 성찰로 바꾼 작품이다. 평원에 펼쳐진 광활한 대자연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화자가 칭기즈칸 제국의 흥망성쇠로 시선을 옮기면서 한때는 세계를 쥐락펴락 호령하던 대륙이건만 지나고 보면 한낱 모래바람 속 신기루처럼 흩어진다는 쓸쓸함 또한 보여주고 있다. 몽골 초원을 심호흡으로 바라보며 이 지점에서 화자는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이 겪은 식민지의 역사를 “스물여덟 해 짓밟혔던” 시간으로 되돌리고 이를’몽골반점’의 상흔으로 옮겨와 두 나라의 역사를 겹치듯이 회상한다. 그리하여 강대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의 지정학적 현실과 세계에서 가장 강성했던 나라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대비된 주제로 나아간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제국의 영화가 결국은 헛되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님”이라는 존재를 호출하기에 이른다. 이는 권력이 아닌 내면의 정신적 지향점을 시적 귀결로 읽어내면서 여행시가 흔히 빠지기 쉬운 이국취미의 나열이나 그에 따른 역사철학적 사유에 그치지 않고 보다 심화된 역사인식으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위의 작품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여행시이면서 동시에 역사시로 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광활한 몽골 초원을 심호흡으로 바라보며 시인은 눈 앞에 펼쳐진 자연 만에 그치지 않고 이미 이 땅에서 별무리처럼 명멸해 간 수없이 많은 영웅 군상 위에 칭기즈칸을 떠올리고 몽골이 제국으로 자리 잡았던 시대의 거리감과 우리가 겪은 식민지 역사까지를 겸하여 이야기한다. 특히나 “몽고반점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라는 구절에 담긴 역사적 기억을 육체의 흔적으로 옮겨서 형상화한 은유 또한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읽은 “칸이 아니라도 방랑자처럼 허둥거려도”라는 구절이 특히 유의미하며 이 작품의 독서를 더더욱 들여다보게 한다. 결국 시인이 이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은 우리네 삶의 궁극성이며 이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가치이자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제국이 아니라 살아남은 인간 군상이라는 인식에 다다른다. 한 아름 꽃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흥행 안 된 연극만 같았던 시간들이 격정으로 뜨거운데 좋은 시간에 홀린 듯 멍하니 서서 절정의 날은 몇 번이나 지나갔을까 시 꽃이 이리도 아리게 한지 황홀하게도 만드는 것인지 손에 든 송이송이가 찬란하다 시행착오 같은 길은 뒤틀리며 흔들리는 코스모스꽃 같았는데 그러다 설치는 밤이 많아 서러웠는데 시 꽃이 넘치듯 안아 줄 줄이야 살다가 어느 대목에선가 애틋이 연출되고 피어나는 것인지 꽃 한 송이 안고 보니 이제야 알겠네 이리도 절절하게 핀 시 꽃이 앞산처럼 덩실함이라는 것을 시 꽃이 이리 반겨 줄지 알았더라면 집착 거리던 것들 진즉 내던지고 빨리도 좋은 시 쓰며 살아갈 것을. - 「꽃 한 송이 안고서」 위의 「꽃 한 송이 안고서」는 ‘시 쓰기’라는 행위를 꽃 한 송이에 비유한 것이 인상적이며 창작의 고통 또한 환희에 견주어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흥행되지 못한 연극처럼 성과 없는 시간만을 부단히 견뎌왔음을 고백하는데 이는 습작기에 처한 시인 자신 또한 통상적으로 겪는 좌절과 자기 회의를 솔직담백하게 추억한 것이다. “시행착오 같은 길”, “흔들리는 코스모스꽃”이라는 표현 등은 창작 과정의 불안정함을 자연물에 빗대어 형상화한 것이지만 시상이 본격 전개되면서 화자는 마침내 “시 꽃이 넘치듯 안아 줄 줄이야”라는 느낌에 도달하고 오랜 고투 끝에 창작의 기쁨을 만끽한다. 마지막 연에서 “앞산처럼 덩실함”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도 시적 성취나 어감 또한 풍성하고 웅장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면서 벅찬 기쁨에 나아간다. 다만 진작에 집착을 내려놓고 시를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회한 또한 화자만 갖는 다짐은 아닐 터이며 사물을 대하는 창작자의 성찰과 이후의 다짐을 동시에 담아낸 결구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 쓰기의 메타적 자의식을 담아낸 작품이라는 이유이다. 「꽃 한 송이 안고서」는 시인의 문학 인생을 압축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읽은 작품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 꽃’이라는 어휘의 반복 사용은 단순 비유를 넘어 평생을 노심초사로 피워낸 문학의 결정체인 시작품의 의미를 그리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작품 중에 읽은 “집착거리던 것들 진즉 내던지고”라는 구절에서 화자가 얻은 뒤늦은 깨달음이 어느 만큼의 노심초사였는지를 삶의 달관처럼 만날 수 있다. 시는 결국은 욕망을 버릴 때 오는 것이라는 고백 또한 화자가 은연중에 드러낸 의미심장함의 한 부분이리라. 한 마리 새이고 싶었다 가까이도 높이도 나는 멋지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었다 많은 날을 다듬고 기다리고 달려 왔었지만 그 새는 날 수가 없었지 자아를 힘든 세상을 탓 했었네 그러다, 이제야 詩 날개 달고 훌훌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 「한 마리 새」 「한 마리 새」는 간결한 형식 속에 시인의 자기 인식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시다. 화자는 오랫동안 자유롭게 날거나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오랜 시간을 다듬고 기다려도 날 수 없었던 좌절의 시기를 지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던 시기의 화자는 자아와 세상을 향해 무수히 많은 원망의 언어를 날려 보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미에 와서 “詩 날개 달고 훌훌 나는” 새가 되었다는 선언으로 반전을 이루면서 시 쓰기로 자신 또한 비로소 날개를 얻었다는 창작적 발견과 기쁨을 고백의 형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새라는 사물은 그 상징성이 자유와 초월에 대한 갈망을 대변하는 사물이다. 그리고 그 같은 갈망은 시라는 매개를 통해 좌절되기보다는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화자가 요량한 창작상의 서사는 구조적으로 완결된 기승전결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시인의 존재론적 전환을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언어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앞의 ‘꽃 한 송이 안고서’와 짝을 이루는 창작상의 방법임을 읽을 수 있었다. 요컨대 「한 마리 새」는 길이는 짧지만 시집 전체를 통어하는 상징성이 높은 작품이다. 상징의 세계에서 “새”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인 때문이다. 상상력이 인간을 더 오래 살게 한다면 그리고 이를 예술적으로 사유하면 “시 날개”는 문학이라는 언어적 설정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게 하고 “이제야 詩 날개 달고”라는 한 줄의 시행으로 옮기면서 김용갑 시인의 그간의 문학 인생 또한 너끈히 날아오르게 한다. 시는 현실을 떠나 비현실계를 떠도는 도피성의 방황이 아니라 화자의 견결한 삶을 견디고 지탱하는 특단의 힘이라는 사실이기도 하다. 삶이 불타고 꿈이 피어난 길 낭만이 있고 젊음이 있던 거리 여기에서 청춘을 구가했고 여기에서 흔들리며 넘어지기도 했던 이제 먼 기적처럼 서 있는 듯한데 종심을 지나는 길 위에서도 삶을 위해 걷는 이 길 소란한 사람 사이를 휩쓸려 갔는데 그 사람들은 반세기 지나니 다들 어디로 들 흩어진 것인지 무등산에 충장공이 안타까워할 것만 같은 헛헛한 바람만 길을 휩쓴다 한 집 건너 빈집 되어 가는 공허함 사이를 자동차는 무시로 지나가는데 팽팽한 그 길 다시 돌아갈 수 없는지 나는 때때로 뜨거웠던 날 소환해 보기도 하고 화신다방에서 그대와 마셨던 쓴 커피의 아련함에 젖는다 잃어버린 첫 문장 찾는 희열의 시간처럼 분망하지는 않더라도 다시 솟아나리라는 어떤 간절한 바람이 걷는다 - 「충장로에서」 광주 시가지의 대표적 거리인 충장로에서 개인사와 지역사, 나아가선 세대의 변화까지를 짚어낸 작품이 「충장로에서」이다. 김용갑 시인은 청춘을 보냈던 지난 세월의 충장로를 걸어보며 그 시절의 낭만과 반세기가 지난 지금, 회상하던 시절의 사람들은 흩어지고 쇠락해 가는 거리를 마냥 회상하고 있다. “한 집 건너 빈집 되어 가는 공허함”이라는 구절 등에서 우리는 그토록 번창하던 충장로의 지난날의 영화 대신 대책 없이 밀어닥친 공동화 현상을 읽을 수 있고 화자 자신의 인생 후반부의 서사를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충장공 김덕령의 이름을 빌려 광주의 역사적 자긍심을 환기하는 대목에 오면 개인의 추억을 지역 정체성으로 흘려보내는 김용갑 시인의 시적 의도 또한 읽을 수 있다. 화신다방에서의 첫사랑 같은 기억을 “잃어버린 첫 문장 찾는 희열”에 비유한 부분은 시 쓰기와 첫사랑을 동일 선상에 겹쳐 놓은 독특한 발상을 읽을 수 있고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창작 상의 자의식 또한 만날 수 있다. 그리 보면 쇠락한 거리에서 다시금 솟으리라는 희망의 언어로 시인은 한편으로는 애상에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를 넘치듯이 펼쳐낸다. 「충장로에서」는 개인과 도시의 기억을 한자리에 걸쳐 놓은 시적 이중성이 마치 절지동물이나 다모강 따위에서 볼 수 있는, 물체나 색채를 여러 방향에서 식별 가능한 동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충장로를 거리 이름이 아닌 청춘의 시간으로 소환하고 특히나 “잃어버린 첫 문장 찾는 희열”이라는 표현에서 도시는 변했지만 기억은 아직 살아 있다는 문학적 표현 또한 아름답게 열어준다고 하겠다. 달 속에 사람이 살지 않다는 이야기는 닐 암스트롱이 정리했었지 저 달을 보다가 결코 보지 못한 달에 토끼가 있고 계수나무가 있다는 사실 같은 허구에 달은 그리움과 향수로만 그려지고 애잔한 서글픔과 사랑으로 남아 내 위로 추석날 밤도 넘었지 그래, 한가위가 되면 저 달 속에 그리운 이 있을지도 몰라 한참을 쳐다보게 되더라니. - 「달을 보는 이유」 「달을 보는 이유」는 과학적 사실과 정서적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의 판이함과 섬세함을 창작에 담아낸 작품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을 답사한 이후 달에는 토끼나 계수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규명은 됐지만 화자는 그 같은 사실이 달을 향한 소거되지 못한 정서적 그리움을 자신의 주변에 어우러진 낯익은 친근감으로 재설정한다. 이는 과학적 사실과 인간의 정서적 진실이 상호 다른 층위에서 공존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구성으로 여기에서 이 작품의 철학적 사유가 출발하고 있다. 추석날 밤 떠오른 달을 보며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 마지막 장면은 달이 과학의 대상이기 전에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의 정서적 징검다리였음을 환기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짧은 형식 안에서 과학적 지식과 전통적 정서를 대비시킨 이 작품은 결국엔 후자의 손을 들어주는 구조로 나아갔고 근대적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간 정서의 영역을 옹호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나 할까. 이렇다 할 수사 없이도 담백한 어조에서 번져 나온 「달을 보는 이유」는 화자가 요량한 그리움의 언어적 오지랖을 넓혀낸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요컨대 「달을 보는 이유」는 화자의 시적 철학성을 제3자적 거리에서 조명한 작품으로 그 의미가 크다. 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과 달 속에 토끼가 절구대로 절구통에 떡방아를 찧는다는 신화성을 동시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시적 발상으로 갈무리한 언어사용이 장히 흥미롭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과학보다는 상상력이 인간을 되레 풍성하면서도 오래 살게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마지막의 “그리운 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가정법적 표현 앞에서 시인이 요량한 시적 여유가 한껏 읽히는 것은 달은 천체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표현 또한 위의 작품을 성공시키는 탁월함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많은 세월에도 질리지 않고 하늘에 뜬 달 앞에서 갖가지 상상과 추억을 떠올리며 머리 위에 매달린 홍시감을 대하듯 달을 바라보는 것이다. 돌아보니 강바람이 굽은 등 밀고 있다 길인 줄도 모르고 먼 길 돌아 서있는가 심연에 울린 소리가 생을 다시 깨운다 영산강 강물에 묻고 무등산 바람에 물어 사유가 고인 길을 거닐고 싶었었다 뒤엉킨 조각 하나하나 다시금 맞추면서 텅 빈 밤 별을 안고 시마詩魔 깊이 스며들어 한 줄 시를 얻으려 수백 번 뒤척였다 그대를 사랑하고픈 시와 함께 가는 길. - 「마이 웨이」 「마이 웨이」를 읽으면 우선 한때 세상을 풍미한 노래 제목을 추억한다. 이를 시조 형식을 빌려 화자 자신이 시작詩作에 옮겼고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며 지상의 대자연과 동반자적 사실들을 노래하고 있다. 강바람이 강의 굽은 등을 미는 것을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한 이 작품은 영산강과 무등산이라는 두 개의 지역적 자연물에다 자신의 삶과 사유를 묻고 또 물으면서 고백의 형태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이키고 있다. “뒤엉킨 조각 하나하나 다시금 맞추면서”라는 구절에 오면 시 쓰기는 삶의 파편들마저 이내 의미를 부여하고 시작 또한 그 같은 작업임을 시사示唆한다. ‘시마詩魔’라는 표현은 시창작에 대한 집착과 몰입을 마귀에 홀린 상태로 형상화한 말이며 한 줄의 시를 얻기 위해 수백 번을 뒤척였다는 화자의 고백에서 우리는 ‘시마’에 견줄만한 창작의 지난함 또한 읽을 수 있다. “떠나온 뒤에도 바지랑대는 흔들려”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제목을 연상시키는 「마이 웨이」는 자신만의 시적 여정을 자부심에 올려 함축적으로 걸어왔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시조의 율격 안에 이를 압축시킨 창작 상의 고백은 이 시집의 전반에 흐르는 시 쓰기의 메타적 성찰을 지시하는 작품으로도 여지가 크다. 「마이 웨이」는 시인의 정신적 고향인 영산강과 무등산이 상징적으로 담긴 작품이어서 더욱 눈여겨졌는데 이 작품에 대한 김용갑 시인의 노심초사가 어느 정도인지는 고백처럼 쏟아낸 “한 줄 시를 얻으려 수백 번 뒤척였다”는 표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인생을 향한 성공담이라기보다는 시인이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추억한 작품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한 번쯤 인사동 길을 거닐어 보라 옛과 오늘이 공존하고 외지인과 세계인이 뒤섞여 걷는다 골동품, 고서적 잡동사니의 난무 속에서 인파 속 걸음들은 엉키고 여유롭다 싸구려 옻조차 고풍스럽게 보여서 여기서는 다 어울리는데 청계천 고층 도심 속 잉어들 사이로 혈세는 흘러간다 차라리 베네치아 곤돌라는 아니라도 땟배 하나 떠다닌다면 세계적인 관광명소 될 터인데 남산타워에서 바라본 풍광도 좋은데 세계 몇 곳을 돌아보았으나 한 번쯤 서울도 이리 보니 새롭다 빠르게 왔다 빠르게 가는 서울에서 한가로이 걷는 서울이 살포시 오붓하다. - 「서울 반 바퀴」 「서울 반 바퀴」는 화자가 인사동을 중심으로 서울 도심을 산책한 기록이며 전통과 현대, 내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인 인사동의 혼류적 풍경을 흥미롭게 포착하여 노래하고 있다. 골목골목이 골동품과 고서적에 뒤덮인 거리에서 싸구려 옻칠조차 고풍스럽게 느껴졌다는 김용갑 시인의 시선은 인사동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를 자신만의 느낌으로 언어화하고 있다. 청계천에 설치한 인공 잉어와 그 이면에 도사린 예산상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혈세는 흘러간다”고 꼬집는 대목을 읽게 되고 도시 개발 또한 그에 따른 비판이 어디까지인가를 되묻게 한다. 베네치아의 곤돌라에 빗대어 청계천에다 나룻배 하나만 띄워도 세계적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는 볼거리 차원의 제안은 유쾌하면서도 기발하다는 생각이고 이에 가미된 유머마저 승화된 가뿐함이 읽힌다. 세계 여러 곳을 다녀본 화자가 오히려 서울을 새롭게 디자인하자고 이야기하는 결말 부분에서의 일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여행자적 시선이 새삼 의미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서울 거리를 한가로이 걷는 화자의 모습이 이리도 오붓할 수 없다는 생각이며 그래서인가 작품의 마무리는 삶의 속도에 비례한다는 성찰마저도 한껏 노래처럼 읽을 수 있었다. 요근래 너무 많이 싸돌았는지 입술이 빨갛게 화났다 많은 말과 행동에 몸이 지쳤나 보다 조금 천천히 살라는 몸의 신호 삶은 새로운 길을 달리는데 브레이크를 밟듯 살아야 하는데 난로 옆에서 잘 써지지 않는 시를 쓰며 나는 아프다 다 놓아버리는 거라고 아프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입술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할 시간이다. - 「입술이 하는 말」 위의 작품 「입술이 하는 말」은 일상에서 겪는 신체적 증상을 사소하지만 가까운 삶의 표정처럼 성찰한 작품이다. 입술이 트자 화가 난 화자는 이것이 바로 몸이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해석하며 너무 바쁘게 움직여온 지난 세월의 삶을 짙은 회한으로 되돌아보고 있다. 몸이 보낸 신호를 브레이크에 비유한 대목에서는 달래듯이 ‘몸의 신호’를 삶의 속도처럼 늦추자는 자기 다짐 또한 읽을 수 있다. 난로 옆에서 맘 맞게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마음 아파하는 화자의 모습은 창작상의 고통과 피로가 어느 만큼의 스트레스를 동반하는지가 가늠되지만 이에 겹쳐지는 순간을 반성의 형태로 드러내 보인 것도 가볍게 읽히지가 않는다. 작품 중의 “다 놓아버리는 거라고/아프면 아무것도 아니라고”라는 구절이 이 작품의 대단원을 마련하고 그간에 펼친 자신의 작업적 집착을 내려놓으려는 체념 어린 깨달음을 앞서 ‘꽃 한 송이 안고서’에서처럼 이에 상통한 회한 또한 만날 수 있었다. 신체적 증상은 사소하지만 이에서 지난 삶의 과속을 성찰하고 여백의 필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이 시는 소재의 소박함과 성찰의 깊이가 좋은 대비를 이루면서 잔잔한 울림을 조장하고 있다. 「입술이 하는 말」에서 우리는 마음보다 먼저 진실을 말하는 대상이 몸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고 입술이 트는 것은 피곤함 때문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경고음 같은 반성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기에 시인은 병을 통해 삶의 속도를 배운다는 의미심장한 시적 아포리즘이 이내 생활시나 철학시로 창작되었겠다는 것도 새삼 인식되는 순간이다. 오늘같이 소나기 한바탕 쏟아지면 냉산 우리 집 마당이 그립다 짱짱한 폭염에 지치다 가끔 샘가로 달려가 차가운 물로 등목해 주시던 할머니 그 두툼한 손 땀띠가 소낙비 맞고 나았던 날 빨간 고추가 햇볕에 바삭거리고 잔칫날이면 하얀 차일치고 동네 사람들 푸짐하게 웃던 시간들 마당 한 켠, 돼지 잡는 소리 슬프고 무섭기만 했는데 바지랑대 위 하얀 옥양목 빨래 속을 뛰어들던 기억도 향긋하다 떠나온 뒤에도 바지랑대는 여전히 흔들려 마당의 시간은 한 서사로만 남아 있다. - 「마당의 시간」 「마당의 시간」는 고향집 마당을 창작적 배경에 깔고 유년의 기억을 세밀하게 복원한 작품이다. 칠팔월 폭염 속에 할머니가 등목해 주실 때의 두툼한 손의 촉감, 무수히 돋은 땀띠가 소낙비 맞고 일방에 나았던 경험, 잔칫날의 흥겨움과 그럴 때면 으레 듣곤 하던 돼지 잡는 소리의 무서움 등등 상반된 여러 사실과 기억들이 곳곳에 감각적으로 병치되면서 유년 시절의 생생한 기억들을 그림처럼 그려낸다. 특히나 “할머니 그 두툼한 손”이라는 묘사의 구체성은 추상적 그리움을 질감의 차원에서 변환시킨 감각성의 언어이며 시적 효과 또한 실팍하다고 하겠다. 바지랑대에 걸린 눈부시게 하얀 옥양목 빨래, 그 사이를 뛰놀던 유년의 기억 등은 화자에게는 순수했던 시절의 향기로운 기억이 아닐 수 없다. 곧이어 “떠나온 뒤에도 바지랑대는 여전히 흔들려”라는 구절에서 우리의 지난 시간이 스미듯이 소환되고 그 시절의 기억이 현재까지도 화자의 내면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마당이라는 공간을 개인사가 아닌 ‘역사’적 의미로 번역해 낸 것도 유의미하지만 유년에 겪은 사적 기억이 한 개인에게는 거대한 서사로 자리한다는 인식에서 소재의 소박함과 정서적 깊이까지를 읽을 수 있었다. 장년에 만난 ‘달관’이라는 이름의 철학성 「마당의 시간」에서 우리는 ‘마당’이 의미하는 가장 한국적인 서정이 숨 쉬는 한 현장을 마주하면서 이 자리의 마당은 거창하지는 않아도 그 자체로 가족이고 이웃이며 나아가 공동체적 연대가 한자리에 모였음을 스미듯이 읽을 수 있다. 등목, 바지랑대, 돼지 잡던 날…등등 이들은 모두가 마당에서 벌이던 잔칫날의 풍경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당은 사라진 농촌 문화의 집단적 기억을 복원하는 거대 저장소라 이를 만하다. 태초에 바다였던 길고 긴 생명의 강 물길을 잡은 탓에 숨 쉬지도 못하는데 목숨줄 지켜준 강을 돌려주라 외친다 삼백 리 들판마다 푸른 삶 출렁대고 끝없는 젖줄처럼 흘러온 영산강은 남녘 땅 품어 주었던 어머니만 같은데 억겁의 격랑 속을 파도처럼 출렁이다 굴곡 진 민초의 삶 윤슬 되어 피어났네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꿈길에서 흐르는 강. - 「영산강」 「영산강」은 김용갑 시인에게는 유독 연대감이 밀착된 친근한 혈연적 소재이고 작품 또한 이모저모 눈여겨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김용갑 시인이 시조 형식에 담은 영산강의 생태적 풍경 의식과 역사 인식을 한 자리에서 읽게 된다. 첫수에서는 물길을 잡자고 설치한 인공적 시설과 이에 막혀 질식할 것처럼 숨도 쉬지 못하는 강의 현실을 고발의 형식으로 발언하면서 “목숨줄 지켜준 강을 돌려주라”는 외침을 들려준다. 둘째 수에서는 강이 삼백 리 들판을 적시며 남녘 땅의 삶을 어머니 품 안처럼 받아준 모성의 현장으로 첫수의 비판적 어조와는 사뭇 대비를 이루는 동시에 강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새삼 강조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강물의 굴곡진 흐름을 민초들의 고단한 삶과 겹쳐 놓았으며 그것들이 윤슬처럼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인식을 서정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짧은 시조 형식 안에 생태적 비판과 예찬, 거기에다 역사적 은유라는 세 가지의 층위를 압축해 낸 영산강 이야기는 그 구성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행의 “꿈길에서 흐르는 강”이라는 표현은 훼손된 강의 모습을 꿈속에서나마 회복하고자 하는 화자의 염원이 시적 언어로 갈무리된 것이다. 시간의 거리만큼 자꾸만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생의 시간 속에서 어디선가 한순간에 이끼 낀 행위들이 어떤 잘못 맞추어진 퍼즐이 주름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이 스트레스의 연속 많은 스치는 일상들 속에서 마음을 다칠 때 늙음은 빠르게 올 것만 같다 얼마 전 시낭송대회에서 컨디션 난조로 낭송을 버리는 실수에 그 처절함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무대에 서는 자아는 어리숙해져서 아직도 빨갛게 익어가지 못한 것들에서 그날도 정말 늙어갔을 것이다 날마다 마주하는 삶을 가릴 수 있는 조금은 느슨히 살 수는 없는 것인지 묻는다 때로는 두껍게 살면 되는데 다 놓으면 되는데, 그렇게 늙어가면 되는데. - 「늙는 거울을 마주하며」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노화’라는 신체적 변화로 시낭송대회에서 겪은 하나의 실수를 회한에 연결시켜 성찰한 시다. 「늙는 거울을 마주하며」는 제목부터가 화자의 지난 시간을 갈피갈피 들추면서 자기 자신의 고백적 뉘앙스를 물씬거리게 하는 작품이다. 화자는 얼굴의 주름을 보며 이는 필시 생의 스트레스와 마음의 상처가 누적된 결과일지 모른다며 노화를 단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닌 정신상의 고단함으로 해석한다. 낭송대회에서 컨디션 난조로 겪었던 그날의 실수를 아파하는 화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삽입하면서 그 일이 그만큼 잊히지 않았음을 상기하며 인간의 노화론에 실감을 더하고 있다. 오랜 경험에도 불구하고 막상 올라 본 무대는 예전과 같지 않아 여전히 낯설고 미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나이가 많다고 완성에 이르는 것은 아니듯 인간은 생을 마칠 때까지 불완전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감 잡게 한다. 마지막 연에서 읽게 되는 “느슨히 살 수는 없는 것인지”, “다 놓으면 되는데” 등은 화자의 완벽주의적 태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적 갈망과 여지를 절실히 마주한 구절이며 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 정작 집착의 해방임을 시사한 것으로 읽게 된다. 자기 객관화와 인간적 회한이 뒤섞인 이들 표현에서 이 시의 매력은 더한층 상승하고 있다. 「늙는 거울을 마주하며」는 장년에 만난 ‘달관’이라는 이름의 철학성이 이 작품을 밑받쳐 주고 그럼에도 시인은 나이 들어감을 한탄하지 않고 운명처럼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다 놓으면 되는데”라는 말의 울림과 의미적 오지랖은 놓는다는 것이 이내 포기가 아니라 외려 더 큰 자유라는 사실을 곡진하게 표현해 보인 것은 아닐까. 지친 하루가 내려앉는 초저녁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가 시린 마음을 건드렸다 참고 지나갈 것을 다 내 탓인데 다 내가 잘못 간 길인데 뒤늦은 깨우침에 편히 얼굴도 바라보지 못한다 잊었다 싶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말들 서로의 마음에 작은 상처로 남는다 하루 종일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 하나 깎아 조용히 건넨다 고맙다는 말 따뜻한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모난 성정만 내보였으니 많이 사랑한다는 말 쉽게 하지 못했어도 아프지만 말고 사는 날까지 서로 건강하기를 바란다. - 「사과를 건네며」 「사과를 건네며」는 가까운 사람과 치른 소소한 일상적 화해를 소재로 만들어 창작한 작품이다. 화자는 상대에게 “사과 하나 깎아 건네”며 하루 종일 상처처럼 어루만지던 미안한 마음을 내심 아파만 하지 말고 ‘사는 날까지 건강하기를’ 그리고 ‘많이 사랑한다는’ 말을 깨우침처럼 담아낸 작품이다. “그 한 생도 떫게 익어 가는 길인데” 이 작품이 아니어도 김용갑 시인은 여러 작품에서 일상적 일들을 인간적인 언어로 들춘 것이 많고 그러면서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점차 확대해 가고 있다. 우리는 평소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일이 많았었다. 그리고 이 작품 또한 그 같은 점에서 자신을 자책하며 뒤척인다는 표현을 읽게 하며 그로 하여 우리네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김용갑 시인의 경우 상대에게 사과謝過하는 마음은 사과沙果 한 알을 깎아서 건네는 행위였었다. 이처럼 김용갑 시인의 언어적 자별함은 우선 인성의 따뜻함으로 읽혔고 이를 한국적 정서로 등식화하고 있다. 「사과를 건네며」는 말로는 그 모두를 전하지 못했지만 이로 인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과일 한 조각에 담아서 건넨 마음이 더더욱 절절하다. 그리고 이에서 마주친 언어적 한계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짓 또한 “많이 사랑한다는 말 쉽게 하지 못했어도”라는 고백에 이르게 되고 한국적 정서의 한 표현인, 직접적 애정 표현에는 서툰 세대의 화법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것이다. 수사修辭는 화려하지 않고 일상에서의 사소한 사건이어서 이에 따른 관계 회복을 담담하게 그린 이 시는 언어적 애정에다 사람의 무게까지를 요령 있게 담아내고 있다. 「사과를 건네며」는 사과의 사물적 상징에서 심정적인 여러 일들을 화해의 자리로 끌어내고 있다. 자신의 잘 못을 미안하다는 말로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일은 어쩌면 사과나무에 열린 열매에서 그 맛을 저작하는 일과 등가일지 모른다. 이것은 ‘사과’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와는 다른 데도 이 두 개의 단어가 겹치면서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것은 표현상에 보인 시적 오지랖을 그만큼 성공적으로 넓힌 결과일 것이다. 「사과를 건네며」를 독서하면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생활 속의 행동은 사소한 것이 가장 큰 사랑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가족시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코털 자르는 기계 있어요? 아들이 조심스럽게 지나가듯 말한다 자르는 소리 사각사각 요란한데 코털은 이리도 빨리 자라는 건지 뭉텅이로 날리는 일상 탓에 자르는 것을 놓치거나 잃어버릴 때가 생기는 나이 귀찮은 것들은 그것만도 아닌데 머리 길어지고 수염 또한 자랄 것인즉 자르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갑장인 황지우 시인도 수염을 길게 기를까 할 말 막히는지 어떤 자리에서 하얀 수염을 막 잡아당기기도 하던데 매일 아침 스킨이라도 바르는 일은 오랜 루틴 같은 삶이 된 지 오래인데 자르는 것이 무덤덤해지는 것도 나이 탓인지 저녁 손을 씻으며 우연히 발견한 코털 때문에 조금은 성가셨을 그 누군가에게 하릴없는 사람처럼 미안해하기로 했다. - 「코털에 대하여」 「코털에 대하여」는 일상에서 마주친 일을 유머러스하게 바꾸어 노년을 유쾌하면서도 페이소스하게 조명하면서 그간에 이런 유의 시를 만나기 어려웠음 또한 생각나게 한다. 위의 작품은 아들의 코털 가위에 대한 코멘트에서 코털이 빨리 자라고 그것을 자르는 일마저 깜빡하는 나이 든 자신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황지우 시인이 수염을 기르려 했다는 일화를 삽입한 부분은 유머스럽기도 하고 동년배 문인에 대한 친근함 또한 드러낸 것으로서 그 자체로 시적 효과가 커지고 있다. 매일 아침 스킨을 바르는 루틴, 자르는 일이 무덤덤해지는 것 등등은 노년의 일상이 지닌 반복성과 권태를 멀찍이 벗어난 소박하면서도 솔직한 일임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에 오면 손을 씻다가 우연히 발견한 코털 때문에 누군가에겐 미안하기도 했다는 결구는 사소한 실수에도 지나치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소심하고도 다정한 화자만의 배려의 성정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잔잔한 울림을 자아낸다. 주제는 무겁지 않은 데도 노년의 삶을 밀쳐내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김용갑 시인의 시집에 담긴 여타의 시들과 균형을 이루는 경쾌한 표정의 작품이랄 수 있다. 「코털에 대하여」는 김용갑 시인이 펼친 생활시의 한 패턴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일상에서 포착한,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과 타인에 대한 인간적 배려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유머를 품고 시작한 작품이지만 마지막에는 “조금은 성가셨을 그 누군가에게/하릴없는 사람처럼 미안해하기로 했다.”라는 구절로 이 작품은’웃음이 곧 성찰’임을 읽을 수 있다. 여기까지에 와서 우리가 독서한 김용갑 시인이 시집『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에 담아낸 시적 화두는 지난날의 기억이 어떻게 오늘의 자신을 비추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우물가의 감나무는 단순 자연물이 아니라 시인의 성장과 함께한 지난날이 나무의 형태로 기립한 또 하나의 가족사가 되어 있다. 감꽃이 피던 계절, 높은 가지에 판자를 얹고 그곳에 올라가 놀던 유년의 시간, 떫은 땡감이 홍시로 익어가던 풍경 등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한 인간의 성장을 갈피갈피 젖혀가며 읽어가게 한다. 특히나 “지금 그 한 생도 떫게 익어 가는 길인데”라는 구절은 감나무의 일생과 자신의 생애를 겹쳐 놓은 곤충의 겹눈처럼 이중적 효과를 보여준다. 이 나이에도 완전히 익지 못한 존재라는 자각은 나이 들수록 성찰의 절실함이 크다는 것이며 그로 하여 살아 있음을 심화시키고 있다. 감나무는 결국은 지상적 시간의 은유에 다름 아니며 인간 존재의 또 다른 자화상적 형상이라 할만하다. 이처럼 시인은 감나무를 자연에 기댄 단순 의미나 배경에 그치지 않고 기억에서 인간의 삶과 호흡을 같이한 존재로 끌어내고 있다. 「마당의 시간」에서 ‘마당’은 생활공간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와 가족의 체온과 눈빛을 오롯이 간직한 특정 장소로 떠오른다. 할머니의 손길, 등목하던 여름날, 돼지 잡던 잔칫날, 바지랑대에 펄럭이던 옥양목 빨래 등속은 사라진 시대의 풍경이면서도 오늘에도 여전히 시인의 심신을 지배하는 고향의 이미지로 보아 손색이 없다. 이 작품에서 마당은 물리적 공간이자 기억의 저장소이며 개인의 삶이 공동체적 삶을 확장하는 상징성 높은 장소인 것이다. 공간에 대한 감각은 「충장로에서」에 와서 더더욱 선명해진다. 충장로는 단순 도심에 위치한 일상 속의 번화가가 아니다. 청춘의 열정과 실패, 사랑과 열정이 교차했던 시간의 무대인 충장로에서 화자가 화신다방을 출입하며 마셨던 쓰디쓴 커피 한 잔은 첫사랑의 추억이자 문학으로 가는 매개체가 된다. 이제는 시대도 거리도 변했고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기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오늘도 시인을 걷고 또 걷게 한다. 김용갑의 시에서 공간은 언제나처럼 시간을 품는 사물로 드러나며 길은 과거를 현재로 이어 주는 교량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온 생애의 흔적을 어제처럼 간직한 저장소로 읽히는 것이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은 생활에서 얻은 삶의 시학이다. 김용갑 시인은 특별한 사건보다 사소하면서도 미미한 일상을 처음처럼 불러내어 시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사과를 건네며」에서는 사과 한 알을 깎는 행위에서 우리네 일상 속의 미안함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입술이 하는 말」에서는 갈라진 입술을 통해 삶의 속도를 성찰의 형식으로 발언하고 있다. 「코털에 대하여」에서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사소함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다가 마지막에 와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미안함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상의 사물이 이내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인은 여느 작품에서도 거창하거나 화려한 철학적 수사를 들고나와 설파하러 들지 않는다. 인간은 세파를 견디며 나아가는 존재 대신에 사과 하나, 입술 하나, 코털 하나까지도 인간을 이해하는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는 사물로 그리면서 그것이 곧 김용갑 시인이 보인 생활시의 미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생활시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여행 중의 풍경에서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함께하는 사유성이 큰 작품이다. 광활한 초원과 세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제국, 식민시대의 상처와 민족에의 기억 등이 상호교차하며 개인이 펼쳐낸 역사적 성찰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특히나 “몽고반점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라는 표현에 오면 역사의 상처가 육체의 흔적보다 강하다는 것을 읽게 된다. 시인은 거대한 제국도 결국은 역사의 바람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음을 상기하며 인간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여기’와 ‘저기’를 잇는 단순 이동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철학적 공간과 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번 시집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생각은 화자가 보인 시를 향한 자기 성찰이다. 「꽃 한 송이 안고서」, 「한 마리 새」, 「마이 웨이」 등은 김용갑 시인의 문학 인생을 압축한 작품으로 눈여겨진다. 작품 속의 ‘시 꽃’은 평생을 피워낸 문학의 결실을 의미하며 ‘시 날개’는 수많은 좌절 끝에 얻은 자유에의 비상으로 읽힌다. 「마이 웨이」에서 “한 줄 시를 얻으려 수백 번 뒤척였다”는 고백은 좋은 시를 창작하는 일이 얼마나 큰 인내와 자기 성찰을 거듭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시 창작은 어느 의미에서 김용갑 시인에게 직업도 명예도 살아가는 방식도 아니며 오직 하나 존재를 견디며 나아가게 하는 긍정적 자기 추진력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문학을 향한 뜨거운 애정과 겸손이 동시에 읽히는 것을 보게 된다. 표제작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이러한 시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달은 과학이 밝혀낸 천체이면서도 여전히 인간의 상상력과 그리움이 머무는 환상성이 큰 신화적 사물이라 할만하다. 시인은 달 속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추석날 밤이면 그 달 속 어딘가에 그리운 사람이 손짓을 보내올 것만 같아 오래도록 바라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서 달은 사실과 허구가 만나는 경계에 위치하며 현실과 기억을 이어 주는 상징성이 큰 사물이다. 결국 인간은 진실만을 앞세워 살아가는 존재라기보다는 그리움과 상상력에서 마주친 오만가지 세파를 견디며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조용히 일깨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우리가 기억을 잃지 않는 이유의 이유이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질문의 질문으로 나아간다. 김용갑 시인의 시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기보다 잊고 지낸 자신의 삶을 다시금 저작하여 만나게 한다. 그것이 그의 시가 지닌 빠뜨릴 수 없는 미덕이자 장점이 아니겠는가. 결국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한마디로 김용갑 시인의 지나간 기억을 결집하고 저장한 시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 오른 생활사이고 파노라마처럼 사랑을 은유하여 풀어낸 도록이라 할만하다. 시인은 감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충장로를 걸으며 지난날의 청춘을 만나고 사과를 건네면서 사랑을 배우고 달을 올려다보며 그리움을 품어보는 참 자별한 언어적 풍경들이 여러 형태로 어우러져 있다. 그의 시는 멀리 있는 진리를 찾기보다는 가까운 삶의 자리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점 등이 눈에 든다. 시집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시종 거창한 수사나 난해한 언어 등을 배제한 대신 오래도록 살아낸 사람의 삶의 문제를 샘물처럼 길어 올린 기억과 시간, 가족과 고향, 사랑과 문학 등등을 담담한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이 같은 언어적 담담함에는 누구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체험의 독창성과 깊이가 배어 있다. 시인은 달을 보며 뭉게구름 같은 그리움 위에 오르는가 하면, 감나무를 보면서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시선을 견지하고 충장로를 걸으며 청춘의 발자국을 다시금 되짚어보는 등의 언어들이 지난 세월을 웅숭깊게 한다. 어디서나 마주침 직한 그저 그만한 일상들을 존재의 의미로 확장, 심화하는 그의 시선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 또한 그처럼 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준다. 결국에 시집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한마디로 우리가 왜 살아온 날들을 애써 기억하는가를 묻고 저작咀嚼하는 시집이라 할만하다. 김용갑 시인이 시집에 올린 질문은 그래서 조용하지만 깊은 여운을 준다. 그것이 이 시집이 지닌 큰 매력이자 그의 언어가 성취한 시적 진정성이 아니겠는가. 울림이 큰 걸음걸음 오래 걷기를 김용갑 시인의 이번 시집을 덮고 나면 독자는 문득 자신이 두고 온 고향의 오래된 우물가를 배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사라졌다고 믿었던 감나무 한 그루, 돌아 돌아 내 집에 다다른 골목길, 부모님의 따뜻한 손, 첫사랑과 손잡고 걷던 들길, 그리고 어느 추석날 밤 오래도록 바라보던 달이 다시금 자신의 마음속을 비추면서 지금 저리 높이 떠올라 있다. 좋은 시란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이색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잊고 지낸 자신의 지난 세월을 기억의 형태로 되찾게 하는 일이라면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그 역할을 충실히 담은 시집이며 김용갑은 이 시집에서 굳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쉬엄쉬엄 시절 따라 익어 가는 땡감처럼 아직도 영산강을 보며 한 줄의 시를 향해 걷는 사람의 여일함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울란바토르 초원을 지나며』는 완결된 생애의 기록이나 도록을 넘어 오늘도 계속되는 한 시인의 현재진행형 삶의 노래이자 그에서 출발한 울림이 큰 걸음걸음이 독자의 마음과 오래도록 함께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