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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굴러가는 쪽/ 차례
작가의 말 제1부 일몰의 시간 잔디 위에서 연리지 붕대의 일 삶의 저녁 믿는 게 잘못이다 바람이 하는 일 물결 일렁이다 오월 뭉치면 이길 수가 없다 일몰의 시간 나그네 그루터기 호숫가에서 산책길 상생相生 공이 굴러가는 쪽 세량지 마음의 빛 생生 봄소식 가을 한 장 그리움을 아시나요 돌고래쇼 제2부 생명살이 봄, 옹알이하다 눈雪 생명살이 새삼넝쿨의 사랑 늦가을 만연사 햇살, 드리우다 나무는 호수, 출렁거린다 달의 뒷면 왕매미 울다 북극곰 안개마을 바위의 얼굴 단풍을 보다 소나기 이파리 당산나무 가을 오다 바다의 울음소리 씨앗 한 알 물안개 그리움 뱀딸기 제3부 청수국의 그리움 꽃눈 양귀비꽃 청수국의 그리움 어리연꽃 백목련 꽃봉오리 지는 꽃잎 꽃잎 길 꽃봉오리 지칭개꽃 피다 찔레꽃 오동꽃 지는 날 동백꽃 보러 가다 개망초꽃 꽃차 벚꽃 터널 감꽃 지다 제4부 고싸움놀이 환산정에 앉아서 우화羽化 고싸움놀이 1 고싸움놀이 2 팽이치기 길을 찾다 연날리기 상여꽃 널뛰기 살아가다 불꽃놀이 딱지치기 땅뺏기놀이 해오름놀이 1 해오름놀이 2 날개 고인돌공원에서 굴렁쇠 굴리다 쥐불놀이 | 작품론 | 구르는 것들이 품는 생명의 노래 / 강나루 |
조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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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위에서
안갯속 파크골프장 잔디 위에 서릿발이 성성하다 산봉우리에 해가 고개를 내밀자 잔디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누군가 “저기 좀 보게 잔디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 그렇구나 잔디도 담배를 피우는구나 사람들 발길에 끊임없이 짓밟히다가 덮힌 안개가 걷히는 순간에 독을 마시는 사람들처럼 담배 한 대 느긋하게 태우고 있구나 날마다 밟히기만 하는 잡초도 응어리진 한을 담배 한 대로 풀고 있다 햇살 쏟아지자 밟히고 있던 잔디풀 두 주먹을 불끈 다시 밀어올린다. 연리지 잘못 든 길 가는 아들 녀석 온 힘으로 막아서는 어머니 모든 뼈 마디마디 꺾어 아들을 향한 마음이 휘어져 한몸이 되었네 끌어안고 뒹구는 어머니의 삭은 삭신을 햇살 한 자락이 어루만지고 이리저리 손사래 치며 뒤틀리던 길 어머니의 몸뚱이에 뿌리내리고 하늘 쳐다보며 다시 피어나네 베락동이의 휘몰아치던 방황은 끝나고 푸르게 깊어졌네. 성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4세기 신학자이자 성직자이다. 젊은 시절 방황과 혼돈을 건너서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성인이 되었다. 붕대의 일 상처를 싸매는 일이 본분이다 사랑 한줌 아픔도 한줌 품에 안고 흐르는 피 닦아 주며 부드러운 손길로 어둠 한 움큼을 어루만지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인가 사람은 캥거루 주머니가 있어야 하고 하늘은 구름을 품에 안아야 하고 이별은 상처를 다독여야 새살이 차오른다 한세상을 살면서 붕대 한 가닥만큼이라도 누군가를 싸안고 산다는 것은 겨울 계곡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깊은 어둠 하나 싸매는 일이 붕대 한 가닥 넓이만큼이라도 붉은 생채기 덮는 삶이면 좋겠다 하늘의 넋을 품은 큰 소나무 하나가 바람에 바스락바스락 서 있다. 삶의 저녁 길 한가운데 덜컹거리며 승용차 코 꿰어 끌려가네 청년 시절은 번개처럼 날았으리라 타고난 빛깔은 세월 따라 바래지고 부품 하나 둘 녹이 슬고 닳고 닳아서 제 힘으로 달리지 못하더니 심장이 잠들어 레커차에 끌려가네 고개 넘어가는 길, 문이 덜컹거리네 구순九旬이 넘은 어머니 오늘 요양원에 입소하시네 고장난 부품들 쓸모없어지고 같이 가줄 친구도 없이 고향 가는 듯 들어가시네 회오리바람이 힘을 보태어 등을 떠밀며 히죽거리네 시간은 붉은 저녁노을 업고 날아가네. 믿는 게 잘못이다 볼그레한 복숭아 한 알에 넋을 잃었다 보드라운 살 속에 둥근 씨 하나가 버티고 있다고 믿었다 단단하게 제자리 제 본분을 지켜줄 줄 알았다 손 위에 있는 복숭아 칼을 들어 반으로 팍, 쪼갰다 아뿔사! 손가락 끝에서 솟구치는 핏방울 잘려나간 손가락을 꿰매고 와보니 두 쪽으로 쪼개진 복숭아 속의 씨. 씨가 왜 뽀개졌노? 둥글고 단단하게 지 모양 지켰어야제. 병원 다니느라 복숭아 다섯 박스 값을 날렸다 애초에 씨를 믿는 게 잘못이다 다 믿는다는 것 능청스러운 일이다. 바람이 하는 일 태초부터 세상을 주물럭주물럭 어처구니없다 이브의 마음을 꼬여낸 것도 흔들리는 아담의 마음도 그 뿌리는 네 몸의 실핏줄이었다 바람의 하는 일은 흔드는 일 소나무 울음소리 스산하다 가을 깊은 날 나뭇가지 흔들려 우수수수 나뭇잎 천 길 아래로 쏟아지는 것도 바람의 짓이다 태풍 지나간 뒤 위태위태하던 덩치 큰 나무 뿌리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넘어뜨리는 것도 바람이 한 일이다 가슴에 응어리진 말이 많아도 견디며 기다리다 바람이 불쑥, 달려오면 유언처럼 쏟아내는 나무의 언어들 저 그리움을 다 어찌하랴! 모습 없이 떼로 몰려와 상처를 남기는 9할이 바람인 육신들, 어린 시절부터 나의 외벽을 핥고 있는 것은 헐떡거리며 다가오는 너의 발자국들 마당가에 붉게 출렁거리는 감나무 열매 그 안에 수없이 들어앉은 너의 숨소리 가빠지면 불 같은 화를 품고 농익어 떨어지는 소리 한밤의 적막을 흔들었던 날들 언제나 너는 형태 없이 다가와 생각의 깊이를 흔들고 있다 동굴 속에 들어앉아 허수아비놀이를 즐기는 너의 속내가 그래도 그립다 시치미 뚝, 서산마루 넘어간다. 물결 일렁이다 물결이 칼날처럼 번뜩일 때가 있네 햇살 밝은 날도 물결 안에 품고 있는 날선 칼날 그 안에 번뜩이는 선과 악의 수많은 얼굴들 붉덩물로 휩쓸려 가는 산과 골짜기를 히죽거리고 바라만 보네 때론 찰랑거리며 어루만지는 물결이 있고 쏜살같이 다가와 부딪치는 물결이 있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거센 물결도 있네 내 품에 거센 물결, 살아 있어서 꿈틀거리고 황토물 붉은 소용돌이를 건너고 나니 본향의 입구 풍랑이 휩쓸고 지나면 상처는 깡통처럼 찌그러져서 견뎌야만 하고 강은 거칠어진 만큼 부풀어 어지럽게 흔적이 남는 수만 가지의 출렁이는 결. 유년의 뜰엔 아버지 꽃상여 논둑 위에 뒤뚱거리고 상엿소리의 딸랑거림은 일생을 따라다녔지 뒹굴던 들판이며, 보릿고개를 넘기는 까스락 같던 길 위에서 풋보리밭에 일던 푸른 물결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그 웅덩이에 거품이 하얗게 일었네 생은 쉬임 없이 뒤집히고 뒹구는 수만 개의 풍랑을 건너 강가에 피는 한 송이 엉겅퀴꽃 같은 것 앞날은 어디에서 밀려오는 파고를 건너야 할까? 물비늘은 사람들 곁에서 깊고 반짝이는 얼굴로 출렁거리고 있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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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 것들이 품는 생명의 노래
- 조의연 시집 『공이 굴러가는 쪽』 조의연 시인의 ‘작가의 말’은 “해거름에 고개 떨구는 나뭇잎들의 연두 빛깔”이 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가라는 미묘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연두는 대개 새순과 시작의 색인데, 연두와 해거름이 함께하는 데다가 심지어 고개를 떨구는 나뭇잎의 색으로 제시된다. 이 어색한 물음을 무심코 지나쳐버리면 이 시집은 단순한 자연 소재로 읽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사물은 풍경을 이루는 몸 밖의 물건이 아니라, 어느 순간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들이어서 몸속으로 들어온 사물은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그리움 속에서 “만삭이 된 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시들은 사물을 바라본 기록이라기보다, 사물이 몸 안으로 들어와 언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인은 만삭의 언어들이 “한뎃잠을 자지 않고 길 위에서 헐렁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행위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한다. 만삭은 꽉 찬 상태이고, 헐렁함은 단단히 조이지 않은 상태이다. 즉, 시인은 언어가 오래 품어 꽉 차오른 말이되, 세상에 나오고 난 뒤에는 고정된 의미의 집 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품는다’, ‘안는다’, ‘싸맨다’는 행위와 함께 ‘구른다’, ‘흐른다’, ‘날아간다’, ‘흩어진다’는 움직임이 자주 나타난다. 사물은 몸속으로 들어오지만, 시가 된 뒤에는 다시 길 위로 나간다. 『공이 굴러가는 쪽』의 운동성은 이러한 시인의 생각에서 점화한 것이다. 이번 시집의 운동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표제작 「공이 굴러가는 쪽」이다. 공은 겸손하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굴러간다 산봉우리를 향해 뒹굴뒹굴 뛰어오르는 공을 보았는가 개울물을 따라서 공이 뒹구는 아랫마을에는 작은 풀꽃들이 살고 있다 바위등을 뛰어넘고 푹 꺼진 웅덩이에 들어앉는다 깊고 낮은 마음의 자리. 곡선으로 어부바하는 산봉우리 그 품에 안기는 씨앗들 씨앗은 흙의 속내를 잘 알고 있다 작은 것들도 품는다는 것 햇살이 닿기 어려운 땅 그 어둠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곡선은 부드럽고 풍요롭다 공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맞고 몰매 들어오면 몰매 맞고 앙금을 토닥이는 발 아래 등불을 켠다. - 「공이 굴러가는 쪽」 전문 “공은 겸손하다”는 첫 행은 얼핏 지나치게 빠른 단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단정처럼 보이는 말이 공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조금씩 다시 읽힌다는 점이 흥미롭다. 계속 읽다 보면 공은 겸손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공은 그렇게 생겨먹은 사물이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낮은 곳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공의 덕목처럼 보였던 겸손은 공의 성질을 살피는 동안 뒤늦게 생겨난 이름이었던 것이다. 공이 낮은 곳으로 간다는 말도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공이 개울물을 따라가고, 아랫마을에 닿고, 작은 풀꽃들이 사는 곳을 지나고, 웅덩이에 들어앉는 과정을 거치며 낮은 곳은 물리적 방향이 아니게 된다. 작고 여린 것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자리, 마음의 앙금이 고이는 자리, 씨앗이 흙의 속내를 배우는 자리가 바로 낮은 곳이 된다. “씨앗은 흙의 속내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속내는 멀리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흙을 알기 위해서는 흙으로 들어가야 하고, 생을 알기 위해서는 생이 웅크린 곳, 즉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낮음은 으레 상투적으로 표현하는 예비된 미덕이 아니다. 공이 굴러가고, 씨앗이 묻히고, 햇살이 닿기 어려운 땅이 나오고, 몰매를 맞는 장면을 지나온 뒤에야 낮음은 의미를 얻는다. “발 아래 등불” 또한 빛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발밑의 앙금을 토닥이는 자리에서도 켜진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매개이다. 「공이 굴러가는 쪽」에서 느껴지는 낮음의 감각은 「잔디 위에서」에서 좀 더 생활적인 장면으로 나타난다. 안갯속 파크골프장 잔디 위에 서릿발이 성성하다 산봉우리에 해가 고개를 내밀자 잔디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누군가 “저기 좀 보게 잔디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 그렇구나 잔디도 담배를 피우는구나 사람들 발길에 끊임없이 짓밟히다가 덮힌 안개가 걷히는 순간에 독을 마시는 사람들처럼 담배 한 대 느긋하게 태우고 있구나 날마다 밟히기만 하는 잡초도 응어리진 한을 담배 한 대로 풀고 있다 햇살 쏟아지자 밟히고 있던 잔디풀 두 주먹을 불끈 다시 밀어올린다. - 「잔디 위에서」 전문 안갯속 파크골프장 잔디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누군가 “잔디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라고 농담을 한다. 하지만 시인은 농담조차도 무심히 흘리지 않는다. 시인이 “그렇구나/ 잔디도 담배를 피우는구나”라고 받아들임으로써 잔디는 비로소 발밑의 배경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은 그 위를 걷고 놀지만, 잔디는 그 발길을 계속 받아낸다. 담배를 피우는 잔디라는 농담의 잔재 탓에 후술되는잔디의 통증은 더욱 선명해진다. “독을 마시는 사람들처럼” 담배를 태우는 잔디의 이미지는 쉬는 일조차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방식으로만 허락된 존재의 피로가 들어 있다. 시인의 시에서 낮은 것들은 그저 순하고 착하지 않다. 그들은 한을 품고, 독을 마시고, 그러면서도 자기 자리에서 다시 몸을 세운다. 결국 “두 주먹을 불끈 다시 밀어올”리는 잔디의 이미지는 회복의 이미지가 아니어서, 밟힌 자리에서 아래쪽의 힘으로 몸을 밀어올린다. “주먹”이 갖는 원초적인 저항의 이미지가 풀의 생장이라는 자연현상과 겹치면서 잔디가 밀어올리는 모습은 저항의 자세를 얻는다. 「잔디 위에서」에서 ‘낮은 곳’은 짓밟힌 존재가 다시 솟는 자리이며, 조의연 시인이 바라보는 시의 생명은 그 자리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시인이 사물을 서둘러 상징으로 끌고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잔디는 저항의 상징이기 전에 먼저 담배를 피우는 잔디이고, 공은 겸손의 상징이기 전에 먼저 위로 굴러가지 못하는 공이다. 「붕대의 일」에서의 붕대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 붕대는 곧바로 사랑이나 치유의 관념으로 비약하지 않는다. 상처를 싸매는 일이 본분이다 사랑 한줌 아픔도 한줌 품에 안고 흐르는 피 닦아 주며 부드러운 손길로 어둠 한 움큼을 어루만지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인가 사람은 캥거루 주머니가 있어야 하고 하늘은 구름을 품에 안아야 하고 이별은 상처를 다독여야 새살이 차오른다 한세상을 살면서 붕대 한 가닥만큼이라도 누군가를 싸안고 산다는 것은 겨울 계곡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깊은 어둠 하나 싸매는 일이 붕대 한 가닥 넓이만큼이라도 붉은 생채기 덮는 삶이면 좋겠다 하늘의 넋을 품은 큰 소나무 하나가 바람에 바스락바스락 서 있다 - 「붕대의 일」 전문 화자는 “상처를 싸매는 일이 본분이다”라고 건조하게 읊조린다. 붕대는 상처의 사연을 묻거나 고통을 설명하지 않는다. 붕대가 하는 일은 피에 닿고, 어둠에 닿고, 아픔을 품에 안는 일이어서, 정확한 접촉을 통해 감정을 나타낸다. 가령 누군가를 싸맨다는 일은 “사랑 한줌/ 아픔도 한줌”처럼 사랑만 품는 일이 아니어서 사랑으로 아픔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아픔까지 같이 안아야 비로소 붕대의 일이 시작된다. 그래서 시인은 “붕대 한 가닥만큼이라도” 누군가를 싸안는 삶을 말한다. 「붕대의 일」은 「공이 굴러가는 쪽」과 정서적으로 닮았다. 공이 낮은 곳으로 굴러가 사물의 속내를 만났다면, 붕대는 상처의 표면까지 내려가 몸을 댄다. 조의연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이러한 하강의 행동에서 발현된다. 이는 상처를 없애는 힘이 아니라, 상처 곁에 머무는 힘이다. “붉은 생채기 덮는 삶이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은 절대 가볍지 않다. 삶 전체를 설명하는 거창한 말보다 한 생채기를 덮는 건조한 일이 더 구체적이고, 더 믿을 만하고 무게감을 갖는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말하는 낮은 곳으로 간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상처가 있는 곳까지 내려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생」에서 나무와 돌덩이는 서로를 받치고 있지만, 그 관계는 넉넉한 조화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아슬아슬한 의존에 가깝다. “너는 나를/ 나는 너를”이라는 말은 따뜻한 미담으로 닫히지 않고, 비탈진 삶에서 서로에게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는 조건을 드러낸다. 「물결 일렁이다」 역시 자연을 순한 위안으로만 보지 않는다. 물결은 어루만지는 힘이면서 동시에 “칼날처럼 번뜩”이는 힘이며, 그 출렁임 속에는 아버지의 꽃상여와 상엿소리까지 함께 들어 있다. 「삶의 저녁」에서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구순의 어머니를 레커차에 끌려가는 낡은 승용차와 겹쳐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쇠와 이별은 막연한 슬픔이 아니라, 덜컹거리며 눈앞을 지나가는 사물의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감꽃 지다」에서 감꽃은 “흰 밥티 같은 꽃”으로 나타나는데, 아버지의 부재를 꽃의 이미지를 통해 감각화하고 있다. 흰 밥티 같은 꽃 길가에 수복이 담겨 있네 아버지 상엿길에 밟히던 슬픔 같은 꽃 쌀밥 한 끼 넉넉하게 못 먹고 요단강 건너는데 아프지 않게 마지막 가는 아버지 제상에 소복이 올라앉아 한 끼라도 잘 먹고 가시라고 삼월 하룻날 고봉밥으로 쌓여 있네. - 「감꽃 지다」 전문 화자는 아버지를 그리워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감꽃을 “흰 밥티 같은 꽃”이라고 부른다. 더불어 감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묘사하는 대신 밥상 언저리의 ‘밥티’로 낮춤으로써 애도의 방향을 ‘낮은 쪽’으로 바꾼다. 이는 꽃의 흰빛이 미적 대상의 빛이 아니라 먹는 일, 배고픔, 넉넉하지 못했던 생의 기억과 이어지는 형태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죽음은 “상엿길”과 “쌀밥 한 끼” 사이에 놓여 있는데,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도 떠나기 전까지 쌀밥 한 끼 넉넉히 먹지 못했다는 기억 때문에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죽음 앞에서 화자의 마음은 저승의 거리보다 밥상의 결핍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다. “요단강”이라는 죽음의 상징어와 “쌀밥 한 끼”라는 삶의 언어가 한 공간에 놓이면서 아버지를 보내는 마음은 결국 늦은 밥 한 그릇을 차려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길가에 수북이 쌓인 감꽃은 제상 위의 “고봉밥”이 된다. 밟히던 꽃이 밥이 되고, 밥은 뒤늦은 봉양이 되며, 그 봉양은 끝내 닿을 수 없는 아버지를 향한 애도가 되는 이러한 연쇄로 인하여 그리움은 추상적인 정서가 아니라 물질의 모양을 얻는다. 밥티, 감꽃, 상엿길, 제상, 고봉밥 등이 이어지면서 아버지의 부재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는 것이다. 결국 감꽃은 눈앞의 꽃으로 머물지 않고, 먹지 못한 밥의 기억을 지나 아버지의 자리까지 들어간다. 「물안개」에서 고향은 현재의 화자 안에 남아 있는 어린 감각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수레국화, 아카시아꽃 향기, 어머니의 치맛자락, 기적소리는 사라진 시간을 설명하는 대신 그 시간이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음을 감각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그리움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면서도, 사물의 기척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꽃을 다룬 시편들도 몸에 담긴 사물의 언어를 구사한다. 「봄, 옹알이하다」와 「꽃봉오리」에서 꽃은 완성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말문이 열리기 직전의 상태로 나타난다. 꽃봉오리는 옹알이하고, 묵은 겨울의 비밀을 품고 있다가, 어느 순간 “향기로운 언어”를 흩어놓는다. 이때 꽃은 보기 위한 대상이라기보다 듣기 위한 대상에 가깝게 그려짐으로써 시는 오래 닫혀 있던 사물의 입이 열릴 때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일이라닌 시인의 인식을 재확인한다. 「고싸움놀이 1」에서 청룡과 백룡의 충돌은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남과 북, 동쪽과 서쪽의 충돌로 번져간다. 놀이판의 부딪침이 세계의 분쟁을 비추는 장면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전통놀이가 세계사적 폭력을 상징한다’는 식의 단순한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년의 나와 청년의 나, 잠자는 나와 깨어 있는 나가 서로 밀고 당기는 묘사를 통해 부딪침이 외부의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도록 구성하고 있다. 충돌은 세계의 형식이면서 또한 한 인간 내부의 형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놀이판에서 바깥의 역사와 안쪽의 생애가 동시에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땅뺏기놀이」에서는 부딪침의 확장이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땅이 웃는다 멧부리 우렁우렁 우는 소리 산을 내려오고 햇살이 달빛에 쫓겨 뒤돌아보는 시간 아이들이 땅뺏기놀이를 한다 한치의 땅을 갖기 위해 실랑이를 하고 달아난 몽돌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해는 져도 돌아서지 못하는 아이들 땅은 꿈쩍도 않고 한 쪼가리 땅도 메고 가지 못하고 달빛만 환하다. 나라와 나라들은 땅뺏기놀이를 한다 사람들은 파리목숨으로 나뒹굴고 땅끝 마을까지 뒤흔들어 어두운데 국경은 아수라장이다 얻은 땅을 가져갈 수 있을까 이곳저곳에서 땅따먹기놀이 연습에 열을 올린다 어우렁더우렁 같이 살아가야 할 땅 땅뺏기놀이는 끝나지 않고 짓밟힌 땅이 앓는다 호르무즈 해협은 오늘도 유조선들이 웅크리고 있다 땅뺏기놀이는 이제 끝나야 할 때다 나무들은 곁가지를 탐내지 않고 서 있다. - 「땅뺏기놀이」 전문 아이들은 “한치의 땅”을 갖기 위해 실랑이를 한다. 그러나 땅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아이들은 “한 쪼가리 땅도 메고 가지 못”한다. 몽돌을 튕겨 선을 긋고 나눠서 네것 내것 구분하였더라도 땅을 얻었다고 믿는 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 땅은 처음부터 온전히 홀로인 땅이었기 때문에 화자는 “땅이 웃”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놀이가 끝나면 손에 남는 땅은 없고 “달빛만 환하다.” 달빛도 땅과 마찬가지로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모두에게 가닿는 것이므로 첫 연의 상관관계는 소유가 하찮아지는 아득한 세계의 이치에 이르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놀이가 국가들의 다툼으로 커지는데, “나라와 나라들은 땅뺏기놀이를 한다.”며 복잡한 전쟁의 명분을 한순간에 유년의 놀이 형식으로 격하시켜버린다. 그러나 아이들의 놀이와 나라들의 전쟁은 무게가 다르다. 아이들의 실랑이 뒤에는 빈손과 달빛이 남지만, 국가들의 실랑이 뒤에는 “파리목숨”과 “아수라장”이 남는다. 시인은 전쟁을 거창한 역사적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땅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의 유치함과 잔혹함을 나란히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어우렁더우렁 같이 살아가야 할 땅”이라는 말은 갑작스러운 평화의 구호가 아니다. 아이들의 놀이와 국가들의 전쟁의 근원이 같은 지점에 있음을 알았고, 그러한 소유욕을 부려보았자 이미 한 치의 땅도 끝내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평화 이후의 자세로써 화자는 “나무들은 곁가지를 탐내지 않고 서 있”는 땅을 차지하려는 삶이 아니라, 땅 위에 함께 서 있는 삶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제시한다. 「굴렁쇠 굴리다」에서 굴렁쇠는 구르지 않으면 녹이 슨다는 점에서 삶의 지속성과 운동성을 보여주므로 「공이 굴러가는 쪽」과 함께 읽으면 흥미로울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화려하게 비상하는 일이 아니라, 중심을 안고 구르며 웅덩이와 들판과 돌담을 지나가는 일이다. 『공이 굴러가는 쪽』의 미덕은 생명, 상생, 그리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런 말들은 매일 같이 출간되는 수많은 시집에도 붙일 수 있다. 이 시집에서 눈여겨볼 것은 ‘작가의 말’에서 밝힌 사물이 언어가 되는 방식을 어떻게 글로 써냈는지이다. 시인이 연두를 해거름에 놓음으로써 그리움으로 승화한 것처럼 사물을 관념의 예시로 쓰기보다, 사물의 성질을 따라가다가 거기에서 삶의 감각을 얻는 방식으로 써냈다. 결국 『공이 굴러가는 쪽』에서 시인은 사물을 멀리 세워놓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공이 구르는 방향, 잔디가 발밑에서 견디는 시간, 붕대가 상처에 닿는 자리, 감꽃이 밥의 기억으로 바뀌는 순간을 따라가면서 말이 생기기를 기다린다. 더불어 말이 몸에 깃들 때까지 기다린다. 시인의 말에서처럼 사물은 몸속으로 파고들고, 몸속에 들어온 사물은 길 위의 언어가 된다. 이 시집에서 낮은 곳은 패배의 이미지 대신 접촉의 이미지를 입은 것은 시인의 그러한 태도에서 연유한다. 독자가 조의연 시인의 시를 생명의 노래로 받아들였다면, 생명을 크게 노래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낮은 곳에 놓인 것들과 접촉하고 몸속에 들어오도록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공이 굴러가는 쪽』은 독자를 화려하고 높은 곳으로 안내하기는커녕 오히려 발밑의 풀, 길가의 꽃, 상처를 덮는 천, 저물녘의 놀이와 고향의 냄새 앞에 잠시 멈춰 세우고, 우리는 삶이 언제나 높이 오르는 방식으로만 지속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려 한다. 이 시집은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 보는 경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