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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 책을 펼쳐보시는 분들께
육아일기, 하나 "우리 아이는 괜찮을까요?" 정말 태교는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 "좀 적당히 골고루 넣어요." 하나만이라도 좀 좋은 걸로 "아기 건강해요?" 제발 더 이상의 아픔은 없기를 정윤이를 재우고 나서 흐린 하늘에서 좋은 아침을 맞을 때까지 그림이 하나씩 지워진 골목에서 술래로 남아 클라리넷을 들고 다시 세상 속으로 닫힌 마음, 비뚤어진 첫사랑의 비애 질풍노도의 시기, 술에 관한 보고서 고3 시절의 방황과 중앙대 음악대 시절 미국 피바디음악대학 최초 시각장애인 유학생 피바디 140년 역사 이래 최초 시각장애인 음악박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륜(?) 마술 지팡이가 된 베아트리체 육아일기, 둘 이유식 잘 알고 해야죠 "아빠, 내 몸 속에 아가 씨가 있대요." "아빠, 아스끄 먹어요?" 지윤이의 말, 말, 말 다시 볼티모어에서 지윤이에게! 첫 휴가 행복의 조건은 같습니다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로 끝나는 하루 당신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본다 독서는 불안한 영혼을 구원하고 판타스틱 모멘트를 좇는 음악인생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연주, '희망으로' 콘서트 편견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장애 마흔 즈음에 육아일기, 셋 정윤이에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윤이가 걸어요 지윤이와 정윤이 봄 소풍 미아방지용 팔찌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첫눈 에필로그/ 내가 만약 눈을 뜬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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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일기 쓴 시각장애인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교수
“그래, 네 마음은 눈 감고도 볼 수 있단다” "아이들, 자존심 지키며 건강하게 키우고 싶어서..." 음성인식 컴퓨터로 덤덤하게 써내려가... 이상재교수는 경남 진해 출신이다. 일곱 살 때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녹내장이 찾아왔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시력을 살려내기 위해 아홉 번이나 수술을 시도하였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3년이란 시간 속에서 서서히 암흑으로 빠져들며 소년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소년은 부산맹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서울맹학교로 옮긴다.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바이올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아버지는 전장에서 돌아오면서 클래식 음반을 많이 사왔고, 이런 영향으로 소년은 어릴 적부터 자연히 클래식에 친숙하게 되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1악장에 나오는 클라리넷 독주에 푹 빠진다. 색소폰을 권하는 선생님에게 그는 “클라리넷을 배우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클라리넷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악보를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연주를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이 흔히 생각하는 의문이다. 이상재씨는 수없는 연습으로 점자 악보책을 읽는 법을 익혔다. 그리곤 연주할 곡의 악보를 통째로 외웠다. 클라리네티스트 이상재는 1986년 중앙대 음대 관현악과에 입학해 1990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씨는 대학 졸업과 함께 미국 피바디 음대에 유학, 클라리넷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씨는 맹학교 시절부터 집을 떠나 피바디 음대 유학생활까지 합해 기숙사 생활만 21년6개월을 했다. 이씨는 “단체로 주는 밥을 21년 반이나 먹었으니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죠”라고 웃으며 지금도 그때 일을 회상한다. 1997년 귀국한 뒤 이씨는 중앙대, 총신대에서 시간강사를 했다. 2004년 2월부터는 국립 천안대 겸임교수, 나사렛대 음악학부 객원교수로 있다. 이씨는 2003년 세종문화회관서 독주회를 열었고 같은 해 음반 ‘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 & 슈만, 세 개의 로망스’를, 2004년에는 음반 ‘E 플랫 소나타’를 발매했다. ‘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 & 슈만, 세 개의 로망스’ 음반에서 이씨의 연주는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주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클라리넷 연주가 이씨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기는 부인 장인영씨를 만난 일이다. 장씨는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뒤 상일동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 대출실의 사서로 일하고 있었다. 장씨는 우연히 직장동료들과 함께 ‘피바디음대 박사과정에 다니는 시각장애인 이상재 클라리넷 독주회’를 가게 되었다. “눈 뜨게 되면 두 딸 얼굴 보고 싶어” 1995년 6월, 두 사람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음악회가 끝난 얼마 뒤 이씨는 텔레비전 촬영팀과 함께 상일동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았다. 이씨는 사서 장씨의 안내로 문학상작품집을 빌려갔다. 다음날 이씨가 장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손수건을 잃어버렸는데 책상 위에 있지 않냐?”고 묻는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씨는 장씨에게 음악회에 함께 가자고 권한다. 장씨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때까지 살면서 시각장애인하고 어디를 가본 적도 없고 또 별로 맘에 내키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직장동료에게 물었더니 ‘그냥 부담 없이 한번 갔다 오라’고 권했어요. 6월 30일 토요일로 기억합니다. 지하철역에서 만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코리안 심포니 정기연주회를 봤습니다. 얘기도 잘하고 인상도 좋고 했지만 계속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얼마 뒤 장씨는 생일을 앞두고 향수 선물을 받는다. 카드에는 ‘무더운 여름 비좁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기분이 상쾌해지는 향수를 보내고 싶었다’고 써 있었다.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이씨는 2년 뒤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음악박사가 되어 귀국했다. 이씨는 1999년 10월 장씨에게 청혼한다. 장씨는 시각장애인 사위를 맞을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씨와 결혼한다. 이씨는 아이를 얻기 전에는 “눈을 뜨게 된다면 남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아내 장인영의 얼굴을 가장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사랑스런 두 딸을 얻은 뒤에는 “두 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고 싶어졌다”고 겸연쩍게 말한다. 이씨는 육아일기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스스로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아무리 애쓴다 해도 주위의 시선이 그렇질 않고, 정성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 아끼고 사랑한다 해도 아빠가 장애인이라는 큰 상실감은 결코 치유될 수 없을 거라는 아픈 인식. 하지만 나는 이 아이들을 손가락질이나 비웃음, 철저한 무관심이나 살을 저미는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며 건강하고 건전하게,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자신의 생을 가꿀 수 있는 아름다운 인간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