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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 7
프롤로그 · 10 1장 비상사태와 미메시스적 희망: 〈이웃집 토토로〉와 〈벼랑 위의 포뇨〉의 생태주의 · 20 문제의 과대설정과 문제해결의 과소설정 · 22 / 아도르노와 벤야민: 비상사태와 미메시스적 희망 · 29 / 미야자키 하야오의 도구적이성 비판과 미메시스, 그리고 〈이웃집 토토로〉 · 40 / 〈벼랑 위의 포뇨〉의 질문: 재앙은 축제가 될 수 있는가? · 49 / 아도르노에서 벤야민으로? 구조적 비대칭성의 심화 · 55 2장 상기를 위한 파괴: 〈천공의 성 라퓨타〉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평화주의 · 61 무너지는 성, 무너져야만 하는 성 라퓨타 · 63 /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과 벤야민의 비상정지, 그리고 상기하는 힘 · 69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평화주의와 모더니티 비판 · 79 / 파괴와 기억, 그리고 구원: 왜 하울의 성이 무너져야 하는가 · 87 / 심화된 비대칭성의 역설적 결과 · 96 3장 성장하는 대안적 주체: 〈마녀 배달부 키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여성주의 · 99 미야자키 하야오 페미니즘의 두 얼굴 · 101 / ‘누가’가 아닌 ‘어떻게’: 에코페미니즘과 비판이론 · 107 / 여성 주체에 주목하는 전기 영화들과 전환점으로서의 〈마녀 배달부 키키〉 · 112 / 위기의 소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문제설정 · 120 / 미메시스적 주체로의 성장과 체제의 균열 · 129 / ‘어떻게’로의 전환이 잃어버린 ‘누구’ · 141 4장 출발점과 전환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 · 146 미야자키 영화에서 주제의식들의 관계 · 147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에서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 · 150 / 전후기 필모그래피에서의 전환, 그리고 단행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163 / 미래에서 과거로, 상기하는 역사철학 · 173 / 파국에의 염원의 끝에서 · 183 5장 병 속에 넣은 편지: 〈붉은 돼지〉와 〈바람이 분다〉 · 186 두 가지 긴장: 취향과 이상 사이, 메시지와 매체 사이 · 188 / 모라토리엄, 〈붉은 돼지〉 · 196 / 〈바람이 분다〉라는 정면승부 · 201 / 세 번째 긴장과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순 · 213 / 병 속에 넣은 편지 · 224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234 에필로그 · 239 참고문헌 · 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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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는 비판이론으로 미야자키의 작품을,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비판이론을 비추어 보면서 양측의 사유를 꿰뚫는 핵심문제의식을 도출한다. 이를 통해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양측이 공히 시도한 현대 사회의 가장 깊고 어두운 지점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 그러한 비판이라는 지성 활동 자체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과 만나게 된다. 한마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출발하여 비판이론가들의 안내를 받아 거울 속 무한한 거울의 상처럼 점점 더 깊어지는 고민 속으로 들어가고, 그 고통의 심연에서 희망을 찾아보는 것이 책의 목표다.
---p.13 나는 미야자키 영화들의 결말이 갑작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문제설정 자체가 과격하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체감되는 것이라는 추측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우리는 그의 영화들에 담긴 갈등 상황 자체가 대단히 심각하기 때문에 늘 결말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미야자키의 영화 대부분에 담긴 이 문제를 앞으로 ‘문제의 과대설정과 문제해결의 과소설정’에서 비롯된 비대칭적 서사구조라 부르기로 하자. ---p.22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주는 문제설정의 과대화와 문제해결의 과소화의 비대칭성은 벤야민-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방식과 닮았다. 미야자키의 비대칭성에 대응하는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개념은 도구적이성, 동일성사유가 초래하는 비상사태(Ausnahmezustand)와 미메시스(Mimesis)적인 희망이다. 그들은 공히 현대사회, 넓게는 모더니티(modernity)라는 상태를 인간 사회의 내재적 모순이 최고조에 달한 비상사태로 여기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미메시스적 능력의 회복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 먼저 두 개념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p.29 아도르노에 비해 벤야민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할 수는 있으나, 양자는 실천적으로 전략적 차이를 보일 뿐 모두 미메시스의 약한 가능성의 복원이라는 큰 틀에서의 방어적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분명 문제설정과 해결책 제시의 비대칭성과 그것이 주는 우울함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도구적이성이 주조해 온 모더니티의 탈출 불가능한 감옥이라는 극대화된 문제설정 속에서 고통받고, 이에 대비하여 미약하게 설정한 해결책이 낳는 멜랑콜리(melancholy)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p.40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 사람 안에 아도르노적인 사유와 벤야민적인 사유가 공존하고, 그것들이 자주 충돌하고 있음을 본다. 이 경합은 50년에 걸친 그의 애니메이션 세계 전반에서 늘 작동하고 있지만, 통시적으로 볼 때 그 시기별 비중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앞서 1장에서 언급했고 지금부터 보려는 것은 미야자키의 초기 작품들에서 아도르노적인 사유가 지배적이었던 반면, 후기작들은 벤야민적인 사유가 점점 더 커져간다는 사실이다. ---p.79 이렇듯 키키의 정체성 획득이 비행의 첫 번째 의미라면, 두 번째 의미는 그 비행이 어떤 비행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이는 키키 개인의 문제를 넘어 마을 공동체, 나아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모더니티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미야자키는 소녀의 개인적인 정체성 획득 과정과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비판적 문제 제기를 하나의 문제로 결합시킨다. 얼핏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차원의 문제는 소녀의 비행과 대립쌍을 이루는 거대한 비행정이 도시에 닿고, 위기를 일으키는 과정을 통해 영화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 서사로 작동한다. ---p.117 이들 전기 작품에는 결코 완전히 지워낼 수 없는 세계 비판적 메시지들이 숨어 있다. 평화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가 하나의 총체를 이루었던 〈나우시카〉의 문제의식이 작품별로 쪼개어지면서 강렬한 비판적 색채는 희석되었지만, 미야자키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기작의 핵심은 여전히 ‘어린이 영화’ 혹은 명랑만화라는 것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나우시카〉 이후 〈라퓨타〉(1986)부터 〈토토로〉(1988)와 〈키키〉(1989), 〈붉은 돼지〉(1992)를 거쳐 〈모노노케〉(1997)가 선보이기 직전까지 10여 년간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을 선보이는 동안 감독의 세계 비판적 개입의 의지는 배경에만 머물러야 했다. 이는 미야자키에게 이 기간이 세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빚어내는 내면의 긴장과 갈등이 극도로 증폭된 시기였음을 뜻한다. ---p.166 미야자키는 세 축이 갈라놓는 가치들의 충돌과 모순을 해소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방향으로 더 밀고 나가면서 증폭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받는 고통을 더욱 격심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그 고통을 견뎌내면서 모순들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 모순들의 독특하고 불안한 결합 형태로서의 매듭 하나하나가 바로 그의 작품들이다. 이렇게 보면 모순은 그에게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력의 원천이요, 그가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모순들의 대결과 해소, 다시 그 해소가 낳는 더 큰 모순들의 충돌을 극복해 나간 것이 50여 년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온 궤적이다. ---p.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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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를 비판이론의 눈으로 깊이 있게 읽다!
두 개의 거울, 미야자키 하야오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동일성사유가 부른 비상사태, 그리고 미메시스라는 마지막 희망 파국을 응시하고 희망을 상기하는 두 개의 시선 문제의 과대설정과 문제해결의 과소설정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장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관심은 뜨겁지만 그 접근 방식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주제와 소재의 혼동, 파편적인 접근, 이론 자원의 범람,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부 발언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통상적 접근에서 벗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전개되는 핵심 주제들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재구성한다. 그 열쇠가 바로 비판이론이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과 비판이론 모두 서사구조의 비대칭성이라는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미야자키가 늘 사용하는 비대칭적 서사구조가 비판이론가 벤야민과 아도르노와 같은 세계관하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단서임을 확인하게 된다. 〈포뇨〉는 이를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생태주의를 담은 원조 어린이 영화이자 〈포뇨〉와 쌍둥이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토토로〉와의 비교는 이를 더욱 확실하게 지지해 준다. 두 작품은 어린이 영화를 표방하지만 환경 파괴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며, 이는 비대칭적인 서사구조로 표현되고 있다. 비판이론가들의 비상사태와 미메시스의 개념쌍은 이 비대칭을 드러내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22쪽) 미야자키 하야오의 문제설정과 해결의 비대칭성은 벤야민-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방식과 닮았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개념인 동일성사유가 초래하는 비상사태(Ausnahmezustand)와 미메시스(Mimesis)적 희망이 그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의 문제의식, 타자에 대한 미메시스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회에서 우리는 모더니티라는 일촉즉발의 비상사태에 살고 있으며, 야만으로 치달아 가는 현대사회의 진행 방향은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비판이론가들은 ‘모방하다’라는 뜻을 담은 미메시스 개념에서 희망을 찾는다. 상기하는 힘, 파괴와 기억 그리고 구원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기술은 매혹이자 의심의 대상이다. 그는 전함과 비행기, 자동차 등을 사랑하지만 문명이 만들어 낸 과학기술과 기계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감독은 전기작 〈라퓨타〉에서보다 후기작 〈하울〉에서 더 급진적으로 성(城)을 파괴하는데, 성과 그것의 붕괴 이미지는 모더니티의 긴박한 몰락 상황과 그 파괴를 통해 지금 여기서 잊혀진 다른 가능성을 가져오려는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시도와 유사하다. 게다가 후기작인 〈하울〉에서는 적이 아닌, 나의 성이 무너지도록 만든다. 왜 하필 ‘나의 성’인가. “〈라퓨타〉가 타락하고 끝내 무너져야만 했던 이유가 그곳 사람들이 목적을 잃고 힘과 기술 자체를 숭앙한 결과였던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하울〉의 성이 무너져야 하는 이유도 주인공 하울이 자신이 유성과 계약을 맺었던 이유를 잊고 힘 자체를 탐닉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미야자키는 붕괴의 대상을 타자로부터 자신으로 옮겨오면서 더 심화된 도구적이성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울의 성은 처음부터 무너져야 할 운명이었다. 진정한 희망은 그 무너짐 후에 비로소 생겨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49쪽) 문제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씌워 놓은 환상,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가 너무 강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판타스마고리아를 파괴하고 사태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비상정지의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벤야민은 경험과 기억, 상기하는 힘에서 그 계기를 발견한다. 몰락의 추동력에 대항하는 힘은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고 지금을 중단하게 할 수 있는 비의지적 강제력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 기억이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상기시키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파국의 미래를 향한 질주를 멈추고 지금 바로 다른 선택을 고민할 수 있다. 미메시스적 주체로의 성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기 작품에서 여성은 이미 대안적 가치를 가진, 미메시스적으로 완성된 존재로 등장한다. 반면 후기 영화에서 여성은 아직 그러지 못한, 그러나 조금 다른 실천 경험을 거치며 ‘비로소 되어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미야자키는 여전히 미메시스적 실천을 여성이 더 잘하지만, 그 능력이 모든 여성에게 이미 갖춰져 있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으며, 때로는 남성 또한 실행 주체로 포함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장된 질문을 제시한다. 후기 대안의 중심점은 분명히 주체로부터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와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121쪽) ‘누가’에서 ‘어떻게’로의 질문으로의 이행은 비판이론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어떻게’를 묻는 순간 인류가 오래전부터 지녔으나 지금은 퇴락해버린 상호작용의 방법, 미메시스를 호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주의와 평화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변증법적 사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주제별로 접근하는 방식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 한계를 넘어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를 잇는 연결 고리는 무엇이며, 이들을 포괄하는 상위의 사유 틀은 무엇일까. “미야자키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도구적이성의 폭주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미메시스 능력의 회복에 대한 기대와 염원이다.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와 전쟁 비판, 이들과 중첩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공히 무목적적 발전이 가져온 위기상황으로, 대안은 미메시스적인 능력을 가진 주체, 주로 여성 캐릭터의 교감과 포용, 희생과 성장으로 제시된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149쪽) 발전으로 표상되는 현대세계를 몰락의 과정으로 뒤집어보고, 그 핵심에 무목적적 이성의 사용이 있다는 점, 기술과 권력에 대한 추앙이라는 문제적 실천 양식을 두고 있다는 점, 그 집약체로서 자본주의 체제가 상정되며, 그 대안에는 타자 중심적 교감과 소통 능력의 복원을 제시한다는 점, 그러나 그 대안의 가능성이 너무나 미약한, 사유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이 바로 아도르노, 벤야민과 미야자키 하야오를 엮어주는 특징이다. 바로 이 안에서 생태주의와 평화주의, 여성주의는 하위 주체로 상호 연결되는 것이다. “〈나우시카〉에서 미야자키는 문제상황으로 무목적적 이성사용의 궤멸적 결과인 환경 파괴와 전쟁을, 반대편에 미메시스적 실천을 대안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미메시스적 실천의 주체를 여성으로 설정하면서 생태주의-평화주의-여성주의의 삼각구도를 완성한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와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154쪽) 〈나우시카〉와 전환점으로서의 〈모노노케〉, 두 작품 사이의 진화는 미야자키 작품 세계의 전후기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기 주제가 반복되는 가운데 문제설정과 대안 사이의 비대칭성이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생겨난 희미하지만 강렬한 가능성, 상기하는 힘에 대한 갈망은 더 강렬해진다. 이는 감독의 후기 영화의 세계관과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관점 사이의 유사성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벤야민 사유의 … 몽상가적 구원론은 현실의 구제 가능성을 완벽히 부정하는 지독한 염세주의와 변증법적으로 접합되어 있다. 우리가 미야자키의 후기작들에서 본 것이 바로 그 변증법이다. 후기의 그는 우선 모든 것을 파괴해야만 무엇인가가 겨우 가능하다고 말한다. 현실은 더 이상 가망이 없으며 유일한 희망은 과거를 상기하여 우선 현재를 폭파시키는 것으로부터만 시작될 수 있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194쪽) 저자는 미야자키의 작품세계가 아도르노에서 벤야민적인 것으로 옮겨 갔다고 보았으나, 마지막 절망의 끝에서 다시 아도르노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이 귀환은 전달 가능성의 딜레마를 안은 비판적 지식인의 문제로 이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저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평생 겪었던 갈등의 축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주관적 취향과 세계관·이념, 말하고자 하는 고민의 내용과 그것의 표현 매체, 작품과 작품의 사회적 수용이 그것이다. 감독은 세 축의 충돌과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기보다는 각자의 방향으로 밀어붙여 증폭시키고 고통을 더 깊이 껴안는데, 그렇게 생겨난 그 모순들의 변증법적 결합의 결과가 바로 그의 작품들이다. “미야자키는 전달되기 쉬운 얕은 메시지의 발신보다 실패하더라도 깊은 고뇌의 결과를 ‘팔리지 않을 상품’- 즉, 같이 고민하고 싶지 않은 내용의 편지- 에 담아 보내는 쪽을 택한다. 그는 결코 자신이 영화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관객이 영화를 보기 전과 보고 나온 후에 아주 조금은 달라져 있기를 절박한 마음으로 바란다. 그래서 비록 자신의 영화가 모순으로 점철된 문제투성이에 불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민을 담아 다시 한번 띄워 보내기로 선택한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233-234쪽)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러한 상황은 비판이론가인 아도르노가 겪었던 것과 유사하다. 지식인의 근본적 딜레마는 자신의 탐구가 깊어질수록 전달 가능성은 떨어지고, 잘 전달될수록 얄팍하고 설익은 것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러한 문제를 직접 대면한 동시대 거의 유일한 학자였다. 그의 아포리아(aporia)적 글쓰기는 그 자체로 변증법의 실천이자 동일성사유적 글쓰기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아도르노에게 동일성사유의 폭력에 대한 민감한 성찰을 유지해 나가는 길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도르노의 이러한 모습은 말년에 이른 미야자키 하야오의 현재를 되비치는 거울과 같다. “미야자키의 작품에는 언제나 세계를 향한 깊은 고민과 그 고민을 수행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이중의 성찰이 담겨 있다. … 내가 이 책에서 계속 문제의 과대설정과 해결책의 과소설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까닭은, 어쩌면 그가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고, 대안을 부당하게 회의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야자키의 호소력은 그 부당한 비대칭성에 깃든다. 세계를 어두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엄격함을 유지하면서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내용과 감독의 궤적에 그 투쟁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지고, 그것이 바로 그만의 미학이 된다.” (이시윤,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판이론의 미장아빔』, 2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