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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에서 고백하다
김저운 저
바람꽃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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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낭만적인 일 9
기억의 솔루션 33
마지막 식사 61
손톱달 95
당신들 125
그녀의 어두운 미소 159
꽃길 193
은천에서 고백하다 251
작가의 말 318

저자 소개 1

전북 부안 출생.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삼십여 년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1985년 《한국수필》에 수필, 1989년 《우리문학》에 소설로 등단하였다. 소설집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 테마 앤솔로지『두 번 결혼할 법』등 여러 공저가 있다. 〈불꽃문학상〉, 〈작가의눈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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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135*198*30mm
ISBN13
9791190910361

책 속으로

너는 지금 두려워서 소리 지르고 달려드는 것이다.
목울대를 넘어올 것 같은 탄식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다. 집에 가서 아내한테는 뭐라고 할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오늘 번 돈만 건네줄 테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구직 사이트를 다시 뒤질 생각이다. 일일천하로 끝나지 않을, 또 다른 낭만적인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낭만적인 일」, 31쪽)

나는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쉴 틈 없이 날아와 박히는 딸의 말 화살을 속수무책으로 맞아야 했다. 어질어질해서 창밖을 보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오래된 풍경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 밤, 끝없는 눈발 속 빨간 공중전화 부스. 그 안에 기대고 서서 나를 부르던 스물 몇 살의 여자, 점점 줄어든 몸피로 헝겊 인형처럼 작아져서 떠나간 여자, 문득 아내가 몹시 그리웠다. (「기억의 솔루션」, 58~59쪽)

노인은 이 길을 갈 때마다 어딘가에서 누가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파발을 돌리려고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지나갔을, 혹은 쫓기고 쫓기다 숨어들었을 사람들의 숨소리! 아니면 이미 숨통이 끊긴 채 이곳에 버려졌을지도 모를 죽은 자의 부릅뜬 눈빛! 또 그들의 발에 밟힌 개미 두꺼비 사슴벌레 굼벵이 같은 작은 목숨들! 길가에 떨어진 미약한 존재들이어도 다들 꿈틀거리며 가는 목숨인 것을….(「마지막 식사」, 85쪽)

꽃을 보면 향기가 나지? 그런데 그 향기가 눈에 보이는 건 아녀. 그렇지? 그것이 바로 사람의 영이란 것이다. 근디 보살님이 그랬어. 네 영이 맑대. 내가 너를 위해서 굿을 부탁헌 적이 있는데, 고갤 흔들더라. 굿으로 만들어질 사람이 아니래. 야는 정신이 혼란허거나 귀신 든 것이 아니여, 원래 그냥 맑은 영이여… 그랬어. 그렁게 걱정 말고 너는 너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고 허드라.
나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눈에 또 눈물이 고일까 봐 얼른 아는 척한 것이다. (「손톱달」, 113~114쪽)

왜 그랬겠어요? 진실이 왜곡되니까 그랬겠죠? 그런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되레 비웃음의 대상이 돼 있더라구요. 이게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피해자는 돌팔매질 당하고 가해자는 보호받습니까? 이 자리엔 절반 이상이 여성이에요. 남성들도 무관하지 않죠. 당신들 아내, 여자친구, 어머니, 딸… 모두 여성이에요. 그동안 제가 한발 물러나 있었던 게 부끄럽고 미안할 지경입니다. 질문할게요. 서유리가 무얼 잘못했나요? 여러분들은 돌에 맞아 소리 지른 사람한테 왜 비명 소리가 그러냐고 따지는 행위를 하고 있어요. 아픈 사람이 어떻게 고상하게 비명을 지르죠?” (「당신들」, 155~156쪽)

포사는 잡혀가면서 하늘에 대고 악을 썼다.
“나에게 덮어씌우지 말라. 나는 잘못이 없다. 여인인 내게 무슨 힘이 있었더냐. 모두 너희 남자들의 간교와 무지한 권력이 오늘을 만든 것이 아니더냐. 나에게 죄가 있다면, 여인으로 태어난 것뿐이다.”
그녀는 여산의 산봉우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제야 몇몇의 산봉우리에서 흰 연기가 힘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포사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가 사라졌다.
포사의 적막한 눈에 푸르디푸른 하늘이 담겼다. (「그녀의 어두운 미소」, 192쪽)

저만치 산등성이에 군데군데 산벚꽃이 피어 있다. 마치 분홍색 한지를 찢어 붙인 것 같다. 수채화 속 풍경처럼 고요하다. 그러나 가까이 이르면 주변엔 꽃잎이 날리거나 떨어져 눕고 흩어
져 있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그저 한 폭의 그림 같지만, 그 언저리엔 떨어지고 흩날리며 상처받은 꽃잎들이 분분하리라.
은주는 속으로 말한다.
엄마, 당신의 그늘도 저랬겠지요? (「꽃길」, 205쪽)

“옛날엔 이삼십 명은 되아야 상여를 맸어. 무겁거든. 시신이 산 사람보다 무거운 벱이여.”
“왜 그런가요?”
“글씨… 왜 그러까이?”
“산 사람은 스스로 무게중심을 잡을 수 있는데, 죽은 사람은 그렇지 못해서, 늘어져서 그런 거 아닐까요?”
노인은 이가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아녀.”
“그러면요?”
“본인의 전 생애를 그 몸과 혼에 담고 있어서 그런 것이여. 긍게 얼마나 무겁겄어? 게다가 옛날 관은 크고 무거웠어. 죄다 나무로 만들었응께. 또 꽃 장식도 겁나게 많고.”
“종이꽃인데 그게 얼마나 무거울라고요?”
“아녀. 그 종이꽃에 수많은 혼령이 따라붙어. 그려서 벨나게 무겁지. 믿거나 말거나….” (「은천에서 고백하다」, 304~305쪽)

작가의 말 중에서

내 첫사랑은 그림자처럼 나의 발목을 잡고 따라다녔다. 애틋한 소년이던 그가 점점 거인이 되어갔다.

그의 세계가 광대해지면서, 내겐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때론 그가 지겨워지기도 했다. 나를 먹여 살리지도 못하면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놈! 그가 내게서 떠나길 바란 적도 있었다. 바람을 좀 피워볼까? 그런데도 그는 일편단심이었다. 그의 가슴에 파고들어 앙탈을 부린 적도 있다. 무기력과 넋두리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제 무릎에 나를 눕히고, 내 머리를 쓸어주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를 떠날 수 없었다.

운명은 천둥처럼 오는데, 숙명은 슬그머니 와서 함께 잔다고 한다. 필연적인 운명으로 와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숙명으로 함께 가야 할 그놈! 나에겐 그것이 소설이다.

운명과 의지 사이에서 대롱거리는 거미 같은 나의 소설. 그래도 나는 계속 거미줄을 칠 것이다.

출판사 리뷰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깃드는 따뜻한 위로와 소리의 서사

한 사람의 전 생애와 혼을 품은 삶의 무게


김저운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묵직한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억울한 오명을 쓰고 떠돌거나, 예고 없이 찾아온 우울과 침묵 속에서 휘청이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이들의 상처를 안은 채 오랜 세월 괴로워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의 고단한 삶을 섣불리 판단하거나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스스로 무게중심을 못 잡아서 무거운 게 아니여. 본인의 전 생애를 그 몸과 혼에 담고 있어서 그런 것이여.”(「은천에서 고백하다」 중)

작가는 사라져가는 장례문화 속 사라지는 상엿소리와 소리꾼의 마지막 소망을 그려내듯, 잊혀가는 이웃들의 숨소리와 길가에 떨어진 미약한 존재들의 목숨까지도 하나하나 눈여겨본다. 죽은 이가 지닌 전 생애의 무게를 존중하고 그들의 하직길을 소리로 위로하듯,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온기는 독자들의 마음을 아늑하게 채운다.

왜곡된 진실을 향한 외침, 상처를 마주하는 고백

작품집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은 개인의 외로움과 상처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한 정직한 고백과 목소리로 확장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 약자라는 이유로 가해진 부당한 폭력과 진실의 왜곡 앞에서 부르는 비명(「당신들」, 「그녀의 어두운 미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분분히 흩어져 상처받은 꽃잎들이 가득한 삶(「꽃길」). 작가는 바로 그 언저리의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따뜻한 손을 건넨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죄하고(「은천에서 고백하다」), 스러져가는 삶을 조용히 지켜봐 주는 인물들의 고백은 깊은 정서적 울림과 함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운명처럼 찾아와 숙명으로 함께 걸어가는 문학의 ‘힘

“운명은 천둥처럼 오는데, 숙명은 슬그머니 와서 함께 잔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김저운에게 소설은 평생 품고 살아온 숙명이다. 오랜 시간 다져온 서사적 온기와 맛깔스러운 해학은 쓸쓸함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향한 긍정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한다. 인물들의 삶을 노래하듯 들려주는 문장에는 사람을 향한 연민과 삶의 고단함을 견디게 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

『은천에서 고백하다』는 사라져가는 것들과 상처 입은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며, 우리가 미처 듣지 못했던 삶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소설집이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사람의 존엄을 놓지 않는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삶을 다시 바라볼 따뜻한 힘을 건넨다.

추천평

김저운은 가수다. 술 한잔을 마주하면 우리는 항상 그에게 노래를 청하곤 한다. 이탈리아 반파쇼 저항군의 노래였던 〈벨라 차오〉며 박은옥의 〈회상〉, 〈기차는 8시에 떠나네〉 같은 노래들은 아직도 우리 이웃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은천에서 고백하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작가 자신의 내면 풍경은 상당 부분 서로 닮았을 뿐만 아니라 중첩된다. 마이산의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은 그렇게 우뚝 서고자 했던 버스킹 가수와 은천 마을 주민들의 꿈을 대변하는 표상으로 비치지만, 현실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지리멸렬하다.

하지만 그들을 그려내는, 아니 노래로 만들어 불러주는 듯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인해 이 암담한 시골 풍경은 느닷없이 버틸 만해지면서 새롭게 삶을 일구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문장. 그것이 바로 김저운의 문장이다. 그것이 김저운의 소설 미학이며, 그것이 김저운이 부르는 노래의 힘이다. - 이병천 (소설가)
성별·나이·이력을 전혀 모르고 이 소설집을 읽었다. 이런 좋은 작가가 계셨다니! 낭중지추(囊中之錐), 창해유주(滄海遺珠)일 작가께 경의를 표한다. 아기자기한 즐거움과 맛깔스러운 재미가 가득한 소설을 선사해 주셔서 감사하다.

『천변풍경』(박태원)에 나오는 다양한 주인공이 현대로 시간 여행을 와서 펼치는 듯한 「봄봄」·「동백꽃」(김유정)스러운 이야기.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 있는 소설을 맛보았다. 이 시대의 「벙어리 삼룡이」(나도향)스러운 인물들이 감내하는 「운수 좋은 날」(현진건). 여성들의 눅진한 이면에 시나브로 공감당했다. 『인간문제』(강경애)에 나오는 누이들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듯한 여성들의 「결별」(지하련)스러운 섬세한 마음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표제작은 종합선물항아리처럼 재미와 감동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어우러진(스러져가는 시골을 무대로 펼치는) 소리의 맛 같았다.

좋다(보통 이상이거나 우수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소설들로만 한 밥상 가득 차린 이 작가는 대체 어디에 계셨던 걸까. 독자님들, 이 진수성찬을 마음껏 만끽하시라. - 김종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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