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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구자명 누가 그 사랑을 모르시나요|모자|봄은 온다|비루와 남루 사이 김의규 나|늙은 어린왕자|사랑농장|서로에게 그림자일 뿐 김저운 갈 수 없는 나라|엔의 그네|유민(流民) 김 혁 개는 언제부터 개가 되었나|아버지의 어긋난 해방|옛날의 금잔디|제라늄 여인|하트 오브 골드(Heart of Gold) 배명희 시간을 빌리는 사람|개새끼|아내의 바다 송 언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노란색 카트의 운명|시인의 아내 정의연 터럭 다리|고수|작별 연습|산속의 시인 최서윤 삼마치의 전설|노란 부표가 있던 풍경|첫사랑의 맛|침묵의 얼굴 한상준 ‘바다’를 품다|밤길, 눈길|설핏, 꽃처럼 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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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송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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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그녀를 이끄는 그의 어조는 영락없이 주눅든 채무자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가 요새 좀 몰려 있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며칠만, 딱 며칠만 더 봐주라, 응?” 하며 눈썹을 팔자로 찌푸린 채 웃어 보였을 때 그녀 자신은 비정한 사채업자가 된 것 같았다. 숙은 그의 비루에 치가 떨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걸 애써 누르며 따박따박 내뱉었다.
--- 「비루와 남루 사이」 중에서 내가 이 세상에 온 지 3억 5천만 년 전 식물의 화석이란 은행나무도 내가 있은 지 1억 년이나 뒤에 생긴 아기일 뿐이다. 그리고 나를 하늘의 골목으로 몰아세우는 저 인간이란 것도 바로 엊그제인 10만 년 전에 온 생물일 뿐이다. 내 몸의 알주머니에는 40개의 새 생명이 곧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저들은 모른다. 내 알주머니는 인간이 만든 맛난 독약도 견디는 내성을 내 지금의 기억과 동시에 갖춤을 인간들은 알량한 승리감에 도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핵 폭발만 일어나도 다 죽고 마는 미물들. 바퀴가 늘 구르듯, 언제나 생명을 부활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나. --- 「나」 중에서 직업상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 여성들을 보면서 한결같은 의문을 품었다. 왜 저들은 저토록 무기력하고 무덤덤할까? 그런 나에게 엔은 답이 되어 주었다. 스스로 무디어지는 연습을 수없이 했으리라. 파도와 모래에 시달려 동글동글해진 조약돌이나 투명한 조개껍데기처럼. 그것이 삶의 한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 「엔의 그네」 중에서 졸지에 마약사범 누명을 쓴 G 씨는 조사실로 끌려가면서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약은커녕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하다니,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꼭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마약 탐지견은 따라오면서 계속 확신에 찬 몸짓으로 킁킁거렸다. --- 「개는 언제부터 개가 되었나」 중에서 막상 그와 코를 맞대고 서니, 당혹스러웠다. 어머니와 어떤 사이냐고 물으려던 내가 그렇게 유치할 수 없었다. 지금껏 받은 교육과 상식, 나를 빚어 온 자존과 허위 의식까지 모든 게 나를 공격했다. 이렇게 쉽게 내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 「시간을 빌리는 사람」 중에서 “뭐라고? 서-울-대-학-교?” 반장 아줌마의 하마처럼 쩍 벌어진 입을 바라보면서, 오십대 중년의 아줌마들과 육십대 장년의 아줌마들과 칠십대 노년의 할머니들은 일제히 옷 만들기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단체로 징그러운 뱀이라도 밟은 듯 두 눈도 휘둥그레졌다. ---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 중에서 저쪽에서 정확한 위치와 지번을 묻고, 시인이 그 대답을 하고, 저쪽에서 다시 거기까지 출동하는 데 30분이 걸린다고 그때까지 차 출발하지 못하도록 잡아 놓고 있으라고 하는 말이 스피커폰으로 들리고 나서야 시인이 정말로 경찰에 신고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친놈 아냐? A와 B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람이 외따로 고립돼 살다 보면 괴팍해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 「산속의 시인」 중에서 러시아에 있을 때 친구들과 러시아 친구의 시골집에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함께 블리니를 만들었다. 블리니는 ‘젠장!’이란 뜻을 지닌 러시아 단어 ‘블린’의 복수형이다. 얇고 하늘거리는 빈대떡 같은 것이 팬에서 잘 뒤집히지 않아서 찢어질 때 “블린(젠장)!” 하고 내뱉는 말에서 유래된 요리 이름이다. 처음에 만든 블리니는 아직 길들지 않은 팬과 익숙지 않은 솜씨로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 「첫사랑의 맛」 중에서 딴은, 마을 사람들 전답까지 빚보증으로 끌어들여 위기로 내몰리게 하였으니, 마을에서 받은 냉대가 가당찮다고 할 수 없는 경우였다. 마을 피붙이들 빚보증 몫은 아버지가 어찌어찌 풀고 넘어갔기에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어쨌거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딴섬처럼 교류를 차단당하기까진 않았지만, 마실 걸음을 꺼리는 건 역력했다. 자식들 떠나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뜬 뒤로 어머니 혼자서 고향집을 지키셨다. 이래저래 겪어야 했을 수모 또한 만만치 않았을 테지만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식들인들 그 기막힌 사연을 어찌 모르겠는가? --- 「밤길, 눈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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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표제작 『시간을 빌리는 사람』은 2006년 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배명희 작가의 작품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젊은 남자가 집에서 나오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주인공이 그 남자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게 된 뜻밖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자신을 ‘시간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남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주인공은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와 달리 그와의 시간이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말이 없어도 편안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없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치환되는 세상에서 ‘시간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과 ‘시간을 빌리는 사람’이라는 구도가 낯설진 않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의 평화마저 돈으로 사야 하는 관계의 소외, 관계의 실종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2023년 연작장편 《건달바 지대평》으로 동인문학상 최종심에 올랐던 구자명 작가의 미니픽션 『비루와 남루 사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돈의 변주곡이다. 사흘 후 갚겠다며 돈을 빌려간 뒤 약속을 계속 어기는 대학 선배의 한없이 누추해져 버린 모습과 비정한 사채업자처럼 돼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주인공 ‘숙’은 속으로 외친다. ‘비루와 남루 사이… 우리 각자의 삶은 어디쯤입니까.’ 화가이자 미니픽션 및 철학동화 작가로 활동하고, 제5회 윤동주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도 등단한 김의규 작가의 미니픽션 네 편 중 두 편의 주인공은 동물이다. 『나』는 바퀴벌레, 『사랑농장』은 개다. ‘나’는 말한다. “이제 출현한 지 10만 년밖에 안 된 인간과 3억 5천만 년 된 우리 사이에 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감히 알겠는가? 해충이라고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전북수필상, 작가의 눈 작품상, 제9회 불꽃문학상을 수상한 김저운 작가의 『엔의 그네』는 다문화 교육 강사의 눈으로 본 이주 여성 ‘엔’의 처절한 생존을 그린다. ‘나’는 다문화 가정 교육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대화를 해보려 해도 틈을 주지 않는 엔을 보고 속으로는 은근히 무시하고, ‘왜 저들은 저토록 무기력하고 무덤덤할까?’ 의문을 품는다. 그러다 가난과 사회적 냉대, 그리고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스스로 무디어지는 연습을 수없이 해왔음을 깨닫는다.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김혁 작가의 『개는 언제부터 개가 되었나』는 대학 시절 유명한 민주투사였던 G 씨가 언제부턴가 반대 진영에 몸담더니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면서 온갖 요직을 도맡으며 권력을 향유하다가 국제세미나 참석차 출국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마약 탐지견의 수색에 걸려 곤경을 치르게 되는 과정을 위트 있게 그리고 있다. 소설로 등단했지만 동화 작가로 더 유명한 송언 작가의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는 문화센터에 새로 들어온 젊은 여자 수강생을 중장년의 아줌마들과 노년의 할머니들이 처음엔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품듯 보살펴 주다가 어리숙한 숙맥임이 드러나자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타박하더니, 공부를 잘해 서울대 나오고 외교부 5급 공무원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2024년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트라우마를 다룬 장편소설 《롱빈의 시간》을 출간한 정의연 작가의 『고수』는 지리멸렬한 삶을 못 견뎌 하며 과연 더 버텨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던 주인공이 우연히 삶의 마지막 예식을 치르고 돌이 든 배낭을 메고 바다로 들어가는 남자와 여자를 발견하고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최서윤 작가의 『노란 부표가 있던 풍경』은 아는 것도 많고 남의 사정을 헤아리는 마음도 많았던 친구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추억의 남항진 바다를 찾아가는 친구들의 여행을 담담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리고 있다. 한상준 작가의 『‘바다’를 품다』는 12·3 비상계엄을 소재로 쓴 작품으로, 10대에 목격한 5·18로 인해 트라우마가 있는 훈영이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에 난입한 군인들을 보고 극도의 불안에 시달린다. 그를 사랑하는 ‘나’는 12·3 비상계엄의 충격과 소설을 포기했던 회한까지 겹쳐 고통스러워하는 훈영을 바다를 품듯 위로한다. 이처럼 《시간을 빌리는 사람》에는 각기 다른 소재와 빛깔의 짧은소설 서른세 편이 실려 있다. 길이는 짧지만 우리의 복잡다단한 삶이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묵직하게 녹아들어 있는 작품들을 읽다 보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곱씹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