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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지도는 길을 모른다 강물은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무풍지대 요다의 지팡이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작품해설 _ 건달의 철학을 찾아 한시절을 보냈으니…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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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달이다. 룸펜이니 백수니 업자니 하는 시체 표현들도 있지만 나는 건달이라는 말이 보다 클래식하다고 생각하므로 누가 내게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 오면 언제나 “건달입니다” 하고 주저없이 대답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농담이려니 하고 하하 웃으며 “재미있는 분이시군. 그런데 정말 뭘 하시요?” 하고 부질없이 되묻거나 “아, 예에…” 하고 못 물을 걸 물었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 얼른 화제를 바꾸던가 하는 게 태반이다.
--- p.8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어떤 식으로든 ‘수고롭게’ 될 소지가 있는 일은 절대로 손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님도 이제 늙어서 그런지, 아니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 그런지, 동생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깜빡 잊은 듯했다. 내가 사십 평생 동안 그런대로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즐겁게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밖의 일은 절대 하지도 맡지도 않는다는 신조에 충실했던 덕분이라고 믿는다. --- p.70 그제껏 독서라곤 소설류나 잡지 따위가 고작이었던 내가 그런 무게 있는 책들을 얼마나 제대로 소화해 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동서(東西)의 명저들이 나의 삶과 연관되게 말해 주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는 것을 어느 날 아침 산행을 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진리 또는 도라는 것은 어떤 절대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내가 ‘지금, 바로 여기’ 존재하는 상태에서 시시때때 만들어 가는 무엇이라는 것 --- p.81 물론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남들이 내가 자기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따분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불행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듯이 말이다. 하여간 나는 언제까지나 건달로 살아갈 작정인데, 자처한 건달로서의 이 삶도 예기치 못한 변수와 복병적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남들은 알까? 그래서 행여 건달의 본질인 한가로움을 본의 아니게 잃게 되는 상황이 닥칠까 봐 걱정도 한다는 것을 알까? --- p.101 “아저씨, 그 쌤은 아저씨랑 정반대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에요. 시간이란 게 아저씨나 나처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흐르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구석희 쌤처럼 어떤 상태로 한번 고정되면 죽 그 상태로 끝까지 가는 부류가 있는 거죠. 구 쌤이나 울 아빠나 같은 과예요. 팽팽하게 당겨진 시간의 고무줄을 타다 어느 순간 그 긴장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그걸 끊어 버린…. 고무줄의 끝점 사이 거리를 조금 줄이면 시간은 금방 느슨해졌을 텐데….” --- p.153 물론 영광이었다. 더구나 건달의 본색 중 하나는 시간이 ‘나이아가라’라는 데 있지 않겠는가. 젊을 때는 ‘나이아가라’처럼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폭포 속에서 절대 바쁘지 않게 살면서도 무기력하지 않게 살려고 마음이 바쁘기도 했다. 하지만 환갑을 넘긴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란 게 빠르든 느리든 상관치 않는, 바빠져도 괜찮고 아니어도 괜찮은 마음의 한가를 누리게 된 터다. 만수가 이런 나를 ‘호모 타임리스(Homo Timeless)’라고 일컬은 적이 있어 그게 뭐냐고 물으니 ‘나이야 가라’ 주의자를 말하는 거죠, 하고 대꾸했었다. --- p.200 그때의 무하와, 수년 전 철학사랑방 시절의 무하와 지금의 무하는 모두 별개의 존재였다. 각각의 시공간에서 각기 달리 존재해 온 그를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전제한 채 시답잖은 논변으로 고정적 존재성의 진화를 캐묻는 어리석음을 나는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특히 나를 건달 철학의 원조쯤으로 여기는 만수 앞에서 평소 같지 않은 강박적 언사를 보인 것이 자못 후회스러웠다. --- pp.253~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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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지대평은 자칭 건달이다. 비명횡사한 아버지와 과로사한 형의 죽음을 계기로 “무엇을 기를 쓰고 성취하는 것이 반드시 최선의 인생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힘들게 노력해야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하고는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건달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온 명실상부한 건달이다. 『건달바 지대평』은 바로 지대평이 자신의 의지로 건달의 삶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 맺고 변화하며 나름의 건달 철학을 형성해 나가는지를 그린 ‘건달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우리는 건달의 문학사를 쓸 수 있을 만큼 저 옛날부터 건달에 관한 숱한 일화들을 만날 수 있다. 디오게네스를 비롯하여 거지-교수였던 토마스 플라터 같은 실존 인물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인물 ‘희랍인 조르바’, 혹은 박태원의 ‘구보’씨, 소설과 실존을 한꺼번에 구현한 이상(李箱), 건달의 어원에 해당하는 “힌두교와 불교 신화에 등장하는 건달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가상과 실존에 관계없이 수많은 건달형 인물들이 인간 정신의 파노라마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한없이 되풀이해 왔다“며 ”그들은 모두가 나름대로 진실하고 핍진한 건달의 삶을 보여주었다.… 구자명의 소설은 어쩌면 건달 철학을 개똥철학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고안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지대평은 운 좋게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 덕분에 최소한의 의식주 걱정은 안 하며 산다. 철학 교수로 막역지우였던 김천세가 삶에 대한 회의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뒤로는 친구도 거의 사귀지 않고 사는데, 건달 연작은 바로 대평과 천세, 천세의 아내 혜윤과 아들 만수, 그리고 그의 첫사랑이었던 인실을 기본 축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와 함께 만수의 검정고시학원 선생이었던 구석희와 인실의 인생 사부인 호야 이모, 그리고 천세의 스승이었던 황해룡 교수(무하 선생), 휴심암 노승, 화가 등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존재론적·방법론적 질문을 파고들어간다. 대평은 인실과 만난 뒤 “내게만 있는, 나만의 독자적 요소는 무엇인가? 오래전 건달의 삶을 선언하고 그대로 살아온 내가 새삼 내세울 수 있을 내 존재의 독자적 가치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생산하지 않는 대신 파괴도 하지 않는” 평화주의자로 자처하며,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탠다.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의 얘기를 늘 들어줄 수가 있다”는 것(〈뿔〉 중). 그 후 10여 년이 흘러 대평은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수고롭게’ 될 소지가 있는 일은 절대로 손대지 않”으며 살지만, 인실과의 대화가 깊어짐에 따라 자신의 ‘게으르고 심심한’ 삶도 어떠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하루하루 살아지는 대로 그냥저냥 살다 가는 게 인생이라면 뭣 때문에 어머니 배를 아프게 하며 세상에 태어났겠는가?”며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쁘게 살고 한가하게 살고 ― 이를 ‘열심히 살고 게으르게 살고’로 표현할 사람도 있겠지만 ― 에 관계없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목적을 부여하려는 의지를 갖느냐 안 갖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지도는 길을 모른다〉 중). 또한 천세의 미망인 혜윤이 암 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자, 대평은 “평생 처음으로 대개의 인간관계가 부과하는 구속력을 가능한 한 기피하며 살아온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상대의 힘들고 불안한 삶을 떠받쳐줄 수 있다면 의외의 보람과 재미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강물은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중). 그런데 천세의 자살 후 대평은 또 한 번의 죽음에 맞닥뜨린다. 만수 일로 만난 구석희가 교수 임용을 기대하고 10년의 세월 동안 지도교수의 논문을 대필해 주다 교수의 배신으로 좌절되자, 해당 교수의 처벌을 요구하고 대학 사회의 부당 관행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어쩌다가 죽기 직전 그와 만나 함께 술을 마셨던 대평은 “천세도 그렇게 보냈듯 구석희도 그렇게 보냈구나! 우리는 많은 경우 단독자적 개체의 소멸을 그렇게 모르쇠로 방관한다. 물론 이 경우 알고 한 방관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알아도 별수없을 테니 모르쇠로 있으리란 잠재의식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깊은 회한에 사로잡힌다. 비록 사후약방이지만 그는 유족과 인연을 이어가며 개정 강사법 시위와 손해배상청구소송 증인으로 적극 나선다(〈무풍지대〉 중). 한편 건달 연작에는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살피는 봉사자가 둘 나온다. 간호학원을 나와 소록도와 장애인 재활원과 미혼모 보호시설 등에서 봉사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인실과 일본 동경 조산원학교를 나와 낙산 인근에서 명산파로 이름을 떨친 호야 이모이다. 인실의 부탁으로 호야 이모의 부음을 듣고 찾아간 대평은 생전 “시들지 않는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었던 그녀가 남긴 고백록을 읽고 “험난한 오지의 길을 가다가 부상을 입고 쓰러져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순례자처럼” 느낀다. 아픔을 혼자 삭이며 남몰래 고통스러워했던 것. 대평은 “밖으로 내뿜었던 빛의 에너지만큼이나 그 연료로 소모한 어둠의 에너지가 컸던 것일까?” 생각한다(〈요다의 지팡이〉 중). ‘무위도식 건달’과 ‘생활하는 건달’의 이중주 대평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건달의 정체성을 지키려 애썼다면, 만수는 ‘생활하는 건달’이라 할 수 있다. 만수는 대평과 가장 ‘케미스트리’가 잘 맞는 ‘생각의 건달’이지만, 알바도 하고 포장마차도 하는 등 생활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생활하는 건달’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늘 바쁜 엄마를 대신해 대평의 돌봄을 받았던 만수는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세상에서 (…) 늘 시간이 있는 매우매우 희귀한 존재”인 대평 옆에서 “곁불이라도” 쬘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한다(〈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중). 잔혹하리만큼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건달의 쓸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에 대해 정과리 교수는 “건달은 생각하지 않는다. 건달은 남을 돌본다. 이것이 “건달의 쓸모”. “쓸모없음의 쓸모”이다(259쪽). 그렇다면 이것이 건달의 사상일까? 아니다. 이건 그냥 건달의 처신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진실이 따라 나온다. 건달 곁에 있으면 건달 아닌 건달들, 즉 생활하는 건달들이 늘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건달의 철학은 성자(현자)의 철학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그 존재론적 형태학에서 그들을 앞서 나간다”며 “중요한 것은 성자(현자)들을 수없이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양질의 삶의 내용들을 보통 사람들 스스로가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건달 철학의 존재론적 대의”이고 “그 대의는 성자의 대의, 현자의 대의를 능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건달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 문제도 있지만, 단조로운 생활에 “진력이 나서, 또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하여 더 이상 못 견디고 무언가 일을 찾아 동분서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를 쓰고 갖거나 하고 싶은 게 없는” 타고난 천성에다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이 가능한 주인공 지대평은 “퍽 운이 좋은 건달”이다. 재미있고 아프고 아리고 훈훈한 건달 이야기 소설가 노순자는 “화자는 건달로 사는 거야말로 치열하게 어려운 노릇이라며, 그 치열하게 어려운 건달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낸다”며 “읽는 시간이 그리 재미있고 아프고 아리고 훈훈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또, 소설가 권여선은 “건달인 대평 씨가 거룩한 읽기로, 든든한 어깨로 우리를 지탱해 준다”면서 “이 가치는 측량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숨막힐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최근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까지 더해져 인간답게 사는 일은 점점 난해해지고 있다. 작가는 “시간은 우리의 존재론적 선택에 따라 흐름의 빠르기를 달리하”는데, “그 흐름 위에 우리의 생은 어떻게 ‘보금자리 칠 것인가” 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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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인 조르바』를 읽은 독자라면, 조르바를 찬송하기보다는 조르바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작품 속의 조르바를 발판으로 자기만의 조르바를 이뤄야 하는 것이 다. 그래야만 소수의 선지자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상승의 궤적 위로 오를 것이다. 어쩌면 ‘구원’이라고까지 말해 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처참한 정신 환경과 위협적인 물리 환경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구자명의 소설은 그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건달의 속성들이 치밀하게 구상되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걸 실제로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절감케 한다. 그 대부분은 오로지 결여로서 독자에게 넘겨져 있다. (…) 그러나 자각은 새 하늘을 보는 사건과 같은 것이다. 새 하늘을 본 사람은 결코 그것을 잊지 못하고, 그걸 몰래 가려 버린 구름을 뚫고 기어이 다시 보려고 한다. 구자명의 소설을 읽는 순간 대부분의 독자는 그 마법에 걸려들고야 말리라. - 정과리 (문학평론가,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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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뿔〉이 발표되었을 때 정신없이 읽었다. 새로움, 굵직한 문제의식 같은 게 체증을 뚫어 주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연작 장편으로 완성된 이 책 『건달바 지대평』을 완독한 후에는 ‘나는 고작 밥벌레, 일벌레의 삶을 살았군. 그래도 돈벌레까진 안 된 걸 위로로 삼아?’ 자조해야 했다. 화자는 건달로 사는 거야말로 치열하게 어려운 노릇이라며, 그 치열하게 어려운 건달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낸다. 내내 밉지 않게 독자를 설득해 끌고 나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설득당해 끌려가는 시간, 즉 읽는 시간이 그리 재미있고 아프고 아리고 훈훈할 수가 없다. 삶의 방법으로 시작해 삶의 의미, 본질, 자살, 사회 문제 등 대담한 주제를 신랄하면서도 의연하게 펼쳐 보인다.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는 드물게 귀한 가작이다. - 노순자 (소설가,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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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은 ‘애늙은이’며 ‘늙은이애’다. 시간에 갇히지 않은 에너지이고 공간에 갇히지 않은 여백이다. 향기와 예술만 먹고 살 것 같지만, 시간을 따라 흐르며 틈을 메우고 공간을 세심히 살펴 돌봄을 하느라 본의 아니게 바쁜 자다. 이 시대의 잔혹한 속도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건달인 대평 씨가 거룩한 읽기로, 든든한 어깨로 우리를 지탱해 준다. 이 가치는 측량할 수 없다. 우리 곁에 이런 이웃이 있다. 구자명처럼 한없이 불온하고 너그러운 이웃이. -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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