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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빈의 시간
정의연
나무와숲 202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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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1

2004년 소설동인무크 《뒷북》 창간호에 「다락방과 나비」, 「풀벌레의 집」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그 여자를 보았네」, 2009년 「그와 함께 산다는 것」 등을 발표했다. 2015년 작품집 《스캔》을 출간했으며, 2020년 「그 여자」가 제12회 현진건문학상 추천작에 선정되었다. 2022년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고통스런 기억과 상처를 그린 단편 「그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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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135*200*20mm
ISBN13
9788993632972

책 속으로

무엇보다 이나는 구자성이 내민 계약서에서 이상한 억압을, 감춰진 폭력의 냄새를 강하게 느꼈다. 그것은 아빠가 이나에게 일상적으로 뿜어내던 것들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이나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걸 견뎌야 할까? 알바비 몇 푼 벌겠다고 이 폭력을 견뎌야 할까? 몇 푼은 아니지. 또 다른 이나가 다른 쪽 마음을 부추겼다.
--- p.19

이나는 그의 말투에서 순간적으로 허세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의 감춰진 면모 중 하나가 이렇게 드러나나 싶었다. 아니면 무언가 노출을 피하려다 보니 허세를 부렸거나 허세를 가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 뒤를 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어떤 사람들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소설가처럼, 또는 사기꾼처럼. 또는 그럴 처지와 절박한 필요 때문에. 이나는 그가 어떤 경우에 속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이야기는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일 수도 있었다. 이나는 자신이 단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기록인이었다. 그가 말하는 이야기의 진위를 판단해야 하는 사람이 아닌, 또는 판단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기록인.
--- p.29~30

혹시 롱빈을 아시오? 기사가 자리에 앉자마자 구자성이 이제야 목적지가 생각난 사람처럼 기사에게 물었다. 영어였다. 그가 어느 지역을 행선지로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영어를 쓴 것도 처음이었다. 모르겠는데요. 한참을 생각하던 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엷게 웃었다. 몰라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나는 볼에 보조개가 패고 눈가에 주름이 밀리는 그 웃음이 순박하다고 생각했다.
--- p.73

이나는 그가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자신의 과거, 그가 롱빈이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과거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박물관에서 자신이 찍혀 있을지도 모를 사진들을 보고 서둘러 도망쳤듯이. 그렇다면 그는 왜 그 두려운 베트남에 다시 오고, 롱빈을 찾는 것일까? 아무리 그의 내부에서 두려움과 죄책감이, 또는 다른 무언가가 길항한다고 해도 그 모순의 갭이 너무 커 보였다. 이나는 갑자기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롱빈이라는 수렁, 또는 구자성이라는 과거, 또는 그의 기억, 또는 그가 펼쳐놓은 이야기의 수렁. 그렇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뿌리까지 모두 드러내야 할 것 같았다. 더는 실뿌리조차 나오는 게 없도록 그가 이야기를 다 풀어내게 해야 할 것 같았다.
--- p.102

이나는 그것이 단순히 지나간 전쟁의 상흔이 아니라 전쟁이 또는 그 상처가 현재진행형이라는 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러기에 포성과 총성이 그쳐도 전쟁이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미의 그 할머니처럼 상처받은 사람에게 그 전쟁은 그 상처의 깊이만큼 계속 이어지고 있을 테니까.
--- p.126

독립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대어 살 때의 습관이나 관습,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한 새로운 삶의 양태였다. 이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의 성으로 성씨를 바꾼 일이었다. 윤이나. 김이나와는 확실히 다른 의미의 이나였다. 아빠의 자장으로부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억압과 그 폭력으로부터, 그렇게 구축된 사회와 그 인식의 체계로부터 벗어나고 또 단절하기 위한 상징적 행위였다.

--- p.149

출판사 리뷰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폭력의 가해자이자
그 전쟁에 휩쓸렸던 피해자이기도 한 남자가
50년 동안 몸으로, 죄의식으로 새긴 고통의 기억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베트남전쟁 소설이 탄생했다. 정의연 장편소설 『롱빈의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폭력의 가해자이자 그 전쟁에 휩쓸렸던 피해자이기도 한 남자가 50년 동안 몸으로, 죄의식으로 새긴 고통의 기억을 생생하게 담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관련 자료를 최대한 보고 읽고 공부했으며, 한국군 참전군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재 상태의 그들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쟁을 수행한 그곳, 그 마을에 찾아가 아직도 부서진 지체와 깨지고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며 생을 붙들고 있는 그곳 사람들을 만났다.”

작가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도 그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오래전 일이라고 제쳐놓고 있다가도 눈에 담기고 몸으로 겪었던 그날의 일들이 뜬금없는 상황에서 불쑥불쑥 재생”된다는 것. “그들의 몸 안에서 그 전쟁이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베트남어학과 대학원생인 ‘이나’가 시급이 꽤 높은 알바 자리를 소개받고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편의점이나 카페, 도서관 알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준다는 말에 솔깃해 찾아간 이나는 구자성이라는, 휠체어를 탄 노인과 만나 구술 기록 계약을 맺는다. 죽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려 한다는 구자성이 제시하는 계약 조건은 다소 황당하고 부담스럽다. 자신이 잘못돼 죽지 않는 한 중간에 그만둘 수 없고, 만일 중간에 그만두면 자신이 지불한 돈의 열 배를 물어야 하며, 구술한 내용을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과 동남아 여행에 동행할 것 등이다.

그렇게 해서 구술 작업을 시작했지만 구자성의 입은 종종 닫히기 일쑤여서 이나는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그럼에도 지방신문 신춘문예 당선 작가이기도 한 이나는 구자성이라는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캐릭터에 대해 알고 싶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때 돈을 많이 번 이야기, 결혼 사흘 만에 파경을 맞은 이야기, 그 뒤로 여러 여자를 만났다는 이야기 등을 토막토막 들려주던 구자성은 웬일인지 3주가 지나도록 입을 떼지 못한다. 인내심이 바닥나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이나가 그만두겠다고 통보하러 간 날, 구자성은 베트남 여행을 제안하며 추가 계약서를 내놓는다.

이나와 구자성, 그리고 그의 시중을 드는 김집사 세 사람이 같이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이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구자성이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다는 것. 다낭에 와서도 좀체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열흘째 되던 날, 호출한 택시 기사에게 “롱빈을 아시오?”라고 묻는다. 50년 전 한국군이 잠시 주둔했던 곳이라는 말에 이나는 그제야 구자성이 왜 베트남에 오자고 했는지 알게 된다.

소설은 그때부터 롱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진실과 함께 구자성의 의식과 무의식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앉아 그를 평생 괴롭혀 온 죄의식과 고통의 뿌리를 하나하나 드러낸다.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과 공공양심이 전쟁의 광기로 인해 어떻게 무너지고, 전쟁이 끝난 뒤에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어떻게 갉아먹는가를 선연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구자성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이자 전쟁의 맹목성과 잔혹성에 휩쓸린 피해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죄책감과 미군부대 앞에서 구두닦이 찍새를 하던 어린 시절 미군의 성추행을 일상적으로 당해야 했던 부끄러움과 분노가 내재돼 있다.

이나 역시 안온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 현재는 독립했지만 아빠의 일상적인 억압과 폭력을 받아내야 했던 시간들이 여전히 의식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구자성의 구술 작업을 하면서 이나는 자신이 그때까지 전혀 몰랐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격과 함께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받아내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구자성의 이야기 수렁 속으로 함께 한 발 한 발 걸어들어가 마침내 그의 몸 깊숙이 잠겨 있는 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작가는 “이 소설은 2020년 고인이 된 빈딘성 떠이빈(옛 빈안)의 응우옌 떤 런 아저씨와 꽝남성 퐁니 마을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를 비롯한 베트남 중부지방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증언, 김영만 선생을 비롯한 한국군 참전군인들의 이야기와 수기, 육성으로 증언하면서도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던 수많은 베트남전 한국군 참전자들이 토해 놓은 이야기와 삶이 바탕이 됐다”고 말한다. 현재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관련 국가배상소송에서 1심은 승소했으나 한국 정부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전쟁의 맹목성과 광기가 인간을 집어삼킬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다. 나아가 그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상후스트레스로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인간에 내재된 악의 평범성뿐만 아니라 전쟁의 후과가 남기는 상처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한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가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

추천평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그의 삶을 관조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구자성, 말 못 할 삶의 비밀을 감춘 남자. 이나는 그와 낯설고도 부담스러운 계약을 맺는다. 그것은 구자성이 밟아온 삶의 족적을 재구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적 삶과 동행하는 여정이다. 그가 겪은 고통과 번민, 트라우마의 역사마저 겪어내는 일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진 폭력의 가해자이자 그에 휩쓸렸던 피해자이기도 한 남자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은 인간 실존의 처참한 양면을 함께 살고 견뎌내는 과정이 된다. 롱빈, 그 낯선 지명은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함께 겪고 견뎌야 할 우리 시대의 아픔이 남긴 상처다. - 최진석 (문학평론가·서울 과기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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