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긴 빗방울』은 파국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물기 어린 안부다.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수사 대신, 스스로의 몸을 가장 작고 연한 물방울로 쪼개어 세계의 틈새에 가만히 얹어두는 이 조용한 만짐의 방식. 책장을 덮고 나면, 어느새 “창문 밖의 빗소리가 피부처럼 느껴지는 밤”(「비는 걷고 있어요」)의 서늘한 체온이 우리를 온전히 감싸안을 것이다. 시인이 기꺼이 내어준 저 다정하고 투명한 빗방울의 은신처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폐허를 껴안은 채 조금 더 오래, 덜 불행하게 살아남아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