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기획의 말
시는 확장된 민주주의에 대한 꿈·4 조온윤 중심 찾기·20 비밀의 제빵공장·22 시조새·25 최지인 낮과 밤·26 새·35 커브·37 허유미 뿔소라 편지·41 불턱·43 엄밧동산 서녁밭·45 고영서 바오 닌·47 휴전이라니, 연진아·49 비나·51 김사이 기준·53 Enjoy·55 제3의 계급 57 김선향 피에타·59 튤립, 튤립들·61 날개가 접힌 새처럼·63 박승민 노이무공(勞而無功)·65 두 손·68 쌀쌀한 그늘을 깨밭에 가두고·70 김명기 지주(地主)·72 발우공양·74 백수광부·76 권선희 흥 횟집·78 마지막 인사·79 씨가 된 말·80 임성용 풀꽃 따라간다·81 꽃구경·83 배추밭·85 김용만 우린 언제쯤 고요해질까요·86 등이 뜨겁다·87 대낮에·89 문동만 서쪽·90 흑호두나무 아래서·93 죄의식·95 황규관 어머니의 나라·97 가을의 영혼·100 빗소리·103 이철산 장갑만 벗었다 꼈다 합니다·105 꽃잎 깎는 봄날·107 달의 저편·108 조기조 내 고향 사람들의 말투·109 장암리에서·110 나라가 뒤숭숭해질 때·112 정우영 기억 한 짝이 사라졌어·114 마른멸치가 사나워질 때·116 정릉천·118 김해자 공양·119 쪽파 같은 오늘이 운다·121 가창(歌唱)오리·124 최종천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126 식물의 광합성·128 행복과 불행·130 백무산 내부 수리·132 자학에 투표하다·134 대치 중인 자들·136 해설 리얼리즘은 언제나 민주주의다(최진석)·140 |
고영서의 다른 상품
권선희의 다른 상품
김명기의 다른 상품
김사이의 다른 상품
김선향의 다른 상품
김용만의 다른 상품
김해자의 다른 상품
문동만의 다른 상품
朴勝民
박승민의 다른 상품
본명:백봉석
백무산의 다른 상품
이철산의 다른 상품
임성용의 다른 상품
정우영의 다른 상품
조기조의 다른 상품
曺溫潤
조온윤의 다른 상품
崔志認
최지인의 다른 상품
최진석의 다른 상품
Cheo Jong-cheon,崔鐘天
최종천의 다른 상품
허유미의 다른 상품
황규관의 다른 상품
|
오늘날 시가 왜소해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데, 그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나 이의 제기를 접하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 아마도 완벽하게 상업화된 출판 시장과 관계가 있을 것인데 여기에 예전과는 다르게 문학 매체나 문학 출판사보다 작가의 입김(작품의 상품화를 넘어선 작가의 상품화)이 점점 세지는 현실 변화도 한몫하고 있는 중이다. 온라인 환경을 이용한 개인 미디어는 이제 웬만한 중소 출판사보다 힘이 세며 대형 출판사들도 ‘잘 나가는’ 저자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출판계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 예전과 동일한 문학 권력 논쟁은 사실 허공에 괜한 주먹질만 하는 꼴일 가능성이 커졌다. 인정 욕망의 극대화가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위계질서를 깨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평적 지성의 후퇴와 작품에 대한 냉정한 읽기의 체념 또한 불러왔음도 사실이다. 이제 비평과 비난을 구분 못 하는 세상이 되었다. 비평은 어느새 ‘좋아요’의 반대편에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평은 ‘싫어요’로 인식되면서 아이러니하게 점점 ‘좋아요’에 종속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결국 비평의 부재와 퇴행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비평이 ‘싫어요’로 인식되는 한 비평은 (상업적) 평판 유지를 위해 본연의 비판 기능과 창조적 지성을 수월히 포기한다.
---「기획의 말, 「시는 확장된 민주주의에 대한 꿈」」중에서 봄까치꽃 지나 청보리밭 지나 덤펑덤펑 발 빠지는 모래밭 지나 여기까지는 아는 곳일 거야 지나면 너럭바위 틈으로 눈이 몽글몽글 솟아나 나무 타는 소리 뒤에 잔기침이 물살을 밀어내지 겨울을 오래 앓는 곳이야 바람에 파래진 속살들과 떠는 발 바라보다 웃다가 서로의 어멍처럼 앓는 머리는 앓는 등을 품어주고 앓는 등은 앓는 허리를 품어주고 어제 허우적대던 숨이 오늘 허우적대던 숨을 안아야 불을 볼 수 있는 곳이야 봄이 남은 겨울을 다 지펴도 한 줌의 겨울이 계속 남는 건 추위를 나누며 닮아가길 바라서야 그곳에서 모두 바다를 닮아간다지 그곳까지 가려면 뼈마디에 고름이 차야 해 ---「허유미, 「불턱」」중에서 상품은 기계의 속도보다 빨리 진화하고 있지 보고만 있어도 흥분되고 환상적이야 수천의 빚이 늘어가도 상관없지 VIP 고객인 브론즈 미스도 필살기가 있지 시인이라는 간판 걸었지 시는 우울증 같은 예술 상품이거든 사실 예쁜 시인이 더 잘나가는 상품이지 그녀의 눈에 띄는 상품들이 있지 요리 잘하는 미스터가 좋을까 부유하고 나이스한 기혼이 좋을까 세탁 상품 세일 상품 유형별로 있지 휙 돌면 휙휙 신상품이 줄 서 있네 간만에 브론즈 미스가 선택권을 쥐니 안주로도 씹지 않을 윤리를 들이밀고 모성을 난도질하지 대열 갖추어 마녀사냥에 돌입하네 미스터들의 왕국에서 미스나 미시즈 같은 미즈 상품은 빛의 속도를 따라 진화했지 혁명적인 상품 중에서도 혁명적인 미스터들의 숙주이니까 ---「김사이, 「Enjoy」」중에서 다리 하나를 잃은 의자가 한 달째 골목길에 서 있다 지나가는 차들은 사람을 피하듯 조심을 한다 눈을 맞고 겨울비를 맞으며 속절없이 서 있는 불구(不具) 밀양 표충사 처마 아래 이른 봄볕을 쬐던 누런 고양이도 다리 하나를 잃고 아직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듯 기울어져 있었다 날개가 접힌 새처럼 ---「김선향, 「날개가 접힌 새처럼」」중에서 폭력으로 좀 살고 나온 아들이 제대로 한번 살아보겠다고 어미 명의 오두막 팔고 수협 대출 받아 차린 횟집 이름은 ‘흥’이었다 젊은 놈 밤낮으로 이 악물고 장사하면 빚 갚고도 1억쯤은 우습게 쥘 거라는 계산에 어미도 찬모로 나섰다 ‘축 개업’ 화환이 배달되었다 바르게살기운동본부, 팔방조기회, 만불산악회, 선주협회, 79동기회가 대박을 기원했다 헤어졌던 애인도 카운터로 돌아와 카드 단말기 작동 연습을 했다 코로나 확진자 발생에 횟집 문 닫았다 수족관 도다리들도 허옇게 배를 뒤집었다 재난지원금 몇 푼 받으려면 폐업도 못 한다 대출 이자에 밀린 월세가 자꾸 술을 불렀다 어찌어찌 다시 문을 연 지 일주일 만에 벌금 300만 원 물었다 거리두기 인원 제한 어겼다고 신고한 후배 놈 찾아가 죽도록 팼다 합의 본다고 쫓아다니는 사이 애인도 가버린 횟집 뒷방에서 어미 혼자 앓고 있다 ---「권선희, 「흥 횟집」」중에서 마을에 홀로 살던 노인이 떠났다 노인의 집이 비었다 마을에 마지막 사람이 떠나자 사람의 집이 비자 집 앞에 배추밭만 남았다 노인이 떠나기 전에 심은 배추는 아무도 거두어가지 않았다 배추는 얼고 죽어 겨울을 났다 봄이 와도 누런 배추밭 나비도 날지 않고 들에 개나리 산에 진달래 노래처럼 곱게 피었다 ---「임성용, 「배추밭」」중에서 봄이 쳐들어옵니다 공장으로 봄이 쳐들어옵니다 사람들은 아직 두꺼운 겨울을 사는데 공장으로 꽃잎이 쳐들어옵니다 쇠를 깎을 때마다 쏟아지는 쇠찌끼 위로 햇살은 투명한 꽃잎을 깎아 놓습니다 꽃잎이 나리다가 햇살이 비추다가 꽃잎이 춤바람이 났습니다 꽃잎은 봄이 깎아내는 쇠찌끼 꽃잎이 쳐들어오니 기계에서 꽃비가 내립니다 꽃비가 몰아치니 쇠찌끼가 투명한 햇살이 됩니다 햇살이 봄을 부르니 기름때 장갑 위로 두꺼운 작업복 위로 봄이 잔소리를 쏟아냅니다 오늘은 쇠를 깎다가 꽃잎을 깎다가 봄을 깎고 있습니다 ---「이철산, 「꽃잎 깎는 봄날」」중에서 길을 잡고 당신은 묻는다 지하도 입구에서 신발도 없이 묻는다는 것이 입에서 불쑥 나온 건 이천 원만…… 실은 길을 물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막상 내 행색을 보는 순간 묻고 싶은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래위를 훑으며 눈을 굴리며 길을 잃은 사람에겐 정작 길이 필요 없지 희망도 기약도 없이 허무를 마주하고 오직 견디는 힘이 필요할 뿐 포기를 모르는 자들은 자기 집구석에서도 노숙 중이지 체념 없이 여전히 대치 중인 자들 대치할 체력도 시간도 많지 않으면서 나머지를 탕진하면서 대치 중인 자들 비겁해도 우회와 타협은 수치스러워 길을 지워버리고 내일을 지워버리고 비겁한 건 사실이지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날 길이 아니었어 벽과 대치 중이었더라고 포기한 자만이 길을 찾지 포기할 것도 없는 자들에게 길 따윈 필요 없어 시간은 무풍지대처럼 멈추고 그리고 허물어지지 그러나 허물어지는 건 벽이 아니라 시간 단단한 시간의 껍질을 벗지 돌과 물과 바람을 만나지 이것만이 순전히 자기 자신 고치처럼 껍질을 벗지 ---「백무산, 「대치 중인 자들」」중에서 리얼리스트는 ‘팩트’를 재현하는 기술자가 아니다. 그는 차라리 이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를 향한 욕망을 불러내고, 그것에 형상을 입히는 주술사에 가깝다. 말하지 않는 사물과 동물, 비인간적인 것들에 입을 달아주고, 목소리를 내게 만드는 마술사라 해도 좋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평등의 평면에서 서로가 서로를 증언하고, 서로에게 응답하게 하라. 이것이 리얼리즘의 제1강령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리얼리즘은 언제나 민주주의다. ---「최진석, 「리얼리즘은 언제나 민주주의다」」중에서 |
|
시가 확장된 민주주의의 표현이면서 그것에 대한 꿈이라고 할 때, 분명 이런 믿음도 포함된다. 우리는 너무도 깊이 계약 관계에 오염돼 있다. 어찌 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 계약설’에는 냉정한 진실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약이 삶을 전적으로 지배해서도 안 되고 지배할 수도 없다. 계약과 계약 사이에 혹은 계약이 어쩌지 못하는 영역에는 분명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작은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계속 옥죄어서 계약 관계로 돌려놓자는 게 근대자본주의 문명의 의도겠지만, 그럴수록 그것을 드러내놓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시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작은 해방구마저 없다면 삶이라는 것은 진즉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증언하는 것도 시의 중요한 책무에 해당된다.(「시는 확장된 민주주의에 대한 꿈」 중에서)
리얼리스트의 감각과 책무 물론 이러한 담론이 사람의 감수성으로 녹아드는 과정은 순탄치 않고 짧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작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앤솔로지 「내가 지은 집에는 내가 살지 않는다」에 모인 시편들 모두가 ‘기후위기와 민주주의 위기’라는 이중위기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만일 시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탁월한 기예에 속한다면 이는 서두르거나 시인을 재촉해서 될 일도 아니다. 시인들이야말로 거의 본능적으로 이 이중위기에 민감한 존재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은 시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시인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시의 변화도 없으며 시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간직하고 있는 시의 마음 자체에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이번 앤솔로지를 기획하면서, 나날이 그 형세가 위축되고 있는 리얼리스트 시인들에 주목했다. 어쨌든 리얼리스트 시인들에게 구체적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감각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극복도 구체적 사물에 대한 감각 없이는 문화주의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학평론가 최진석이 해설에서 “리얼리스트는 화석화된 사실에 매달리는 자가 아니라 진실의 조각들을 발견하고 또 발명해 내는 자의 이름이다. 그들을 민주주의자라 부르지 않을 이유 역시 없을 것이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시인은 없는 것을 발명하는 자가 아니라 은폐된 진실(real)을 발굴하는 자에 가깝고, 근대자본주의는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해야만 성립되기 때문에 은폐된 진실을 발굴하는 작업이야말로 ‘기후위기와 민주주의 위기’라는 이중위기에 대처하는 일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2023년의 일보는 이렇게 묶이게 되었다. 이 일보의 힘으로 나아갈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일이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