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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을 내며 · 5
제1부 희망의 노래 인간마저 ‘쓰레기’로 만들겠다는 AI·17 AI가 은폐한 진실들·21 AI 데이터센터는 물 먹는 하마·25 ‘편리’라는 감금 장치·29 러다이트가 뭐 어때서!·33 AI와 시·37 언어는 데이터가 아니다·41 AI와 농어촌기본소득 그리고 기후위기·54 AI 시대에 꿈꾸는 ‘공동의 집’·60 2부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 예술의 일·79 인공지능이 예술을 창작한다고?·84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91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95 책 읽기는 김매기다·99 예술가는 그리고 또 그린다·106 우리에게 꽃을 바치는 어두운 ‘틈’·112 정지의 힘·123 노벨 문학상의 너머·127 자신과의 대화로서의 소통·131 3부 서로 돕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 기후위기와 회복의 언어·145 자연, 자유를 위한 조건·154 경제 민주화와 자연의 권리·166 코로나가 묻고 있다·176 놀람과 설렘·185 빼앗긴 밤에도 별이 빛날까·189 김종철과 ‘고르게 가난한 사회’·193 디지털이 우리의 미래일까?·197 ‘불의 시대’를 넘어서·201 우리의 봄은 여전히 아프다·205 자동차의 속도에서 생명의 속도로·209 다나카 쇼조의 삶과 생명사상·213 4부 꺾이지 않는 마음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227 서울을 위하여·231 농업 없이 ‘선진국’ 없다·235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239 ‘죽을’ 고비를 ‘함께’ 살기·243 더 적게 갖는 민주주의·247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세계·251 그린벨트 해제는 민주주의의 해제다·255 ‘이따금씩’이 만드는 민주주의·259 꺾이지 않는 마음·263 사이버레커들의 서식지·267 치통·271 시골 병실에서·276 청년 노동자여, 연대하라!·280 5부 김종철 공부 생명의 문화와 민주주의·287 ‘고르게 가난한 사회’와 시인의 큰 마음·301 리비스의 비평과 김종철의 비평·313 녹색국가를 향한 더 많은 민주주의·320 에필로그 : 대-화 인공지능과 예술, 그리고 ‘시인의 큰 마음’·335 글쓰기의 욕망에 대하여·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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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은 빅테크 자본의 상품인 AI가 아니다. 거기에는 역사도 문화도 기억도 없다. 생장과 소멸도 없다. 우리의 눈이 경탄하는 꽃과 새의 날갯짓이 카메라로 찍으면 그 생동감이 사라지듯이, AI가 빅데이터를 가공해 내놓은 결과물에는 우리 몸에 새겨져 있는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느낌이 없다. 세계는 데이터로 번역되지 않으며 데이터의 합성물도 아니다. 데이터는 세계를 디지털 공학으로 해석한 파편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데이터는 수집 가능하고 저장 가능하고 가공 가능할지 모르지만, 사물을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힘 혹은 기(氣)는 우리에게 언어를 증여하고 우리는 이 언어로 우리의 내면과 역사와 그리움을 쓴다. --- 「언어는 데이터가아니다」 중에서
근대 언어의 특징이 비판과 탄핵인 것에 비추면 교황의 언어관은 지나치게 태만하거나 윤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결코 지치지 말길” 바라면서도 싸움의 언어를 버리라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회칙의 첫머리에서 제시된 성경의 두 이미지 중, AI에 비견되는 바벨탑의 이미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바벨탑의 언어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획일성의 언어였으며 하늘(자연)의 뜻을 거스른 권력의 언어였고, 탐욕과 전쟁의 언어였다. 이와 똑같이 AI가 생성하는 언어 데이터도 획일적이며, 막대한 에너지와 물을 소비하며, 자본의 언어이며, 팔란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과 앤트로픽의 ‘클로드’로 대표되는 전쟁의 언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AI 시대에 꿈꾸는 ‘공동의 집’」 중에서 인공지능이 이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며 경악하는 사람들이 적잖고 어떤 이들은 인공지능을 통한 새로운 예술이 가능하게 됐다면서 ‘적응’을 말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예술에 대한 이만한 헛소리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장대익의 말마따나 이런 헛소리들은 죄다 인공지능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결국 지능적인 존재인 인간의 헛소리들과 인공지능의 헛소리가 서로를 부추기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은 인간의 지능 문제도 아니고 기술 문제도 아니다. 심지어 미디어 기술을 기반으로 한 예술 분야에서도 단지 기술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존재의 구역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예술이 아니라 단지 문화 상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어둠에서 솟아오르지 않는 밝음이란 기술이 만든 조명일 뿐이다. 심지어 태양도 우주라는 어둠에서 솟아난 것이다. --- 「인공지능이 예술을 창작한다고?」 중에서 문학에서 새로움이 강조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학이야말로 구습을 깨고 나아갈 수 있는 적임자기도 하며 또 문학에게는 그래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문학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문학이 언어를 ‘다루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이 언어 위에 군림하는 것 같은 이런 상투적인 인식이 그동안 문학의 허위와 자기 낭만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언어를 다루고, 조정하고, 개발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문학은 언어에 의해 간신히 성립하고, 언어의 존중을 통해 빛나며, 언어 앞에서 아뜩한 한계를 경험한다. 즉 문학은 자기 언어의 유한성을 깨달아야 그나마 가능해진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문학은 언어 위에 군림하며 통제하고, 언어를 이용하면서 자신의 ‘새로움’을 뽐내왔다. ---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중에서 마이크를 들자 커져 버린 목소리처럼 테크놀로지가 양산한 정보와 다름없는 언어 또한 “우리가 언어의 형성자이자 지배자인 척 거드름”을 피운 그간 역사의 결과일 것이다. 반면에 기성 서정시의 경우, 규범이나 도덕이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라는 진실을 도외시한 채 낡은 규범과 정서를 강조하면서 언어의 경직화에 보탬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면, 둘 다 대화를 잃어버린 언어들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라는 것이 진리의 사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언어를 포집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길은 나온 셈이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나 고성능 디지털카메라에 기대려는 문학적 시도들에 맞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 수양의 문제가 아니라 파편화에 맞선 생태주의적 시도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넘어서는 실천의 일보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다. --- 「자신과의 대화로서의 소통」 중에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이 물음은 오늘날에도, 아니 오늘날에 더욱 유효하다. ‘코로나19’로 인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국가와 자본이 가고자 하는 이후의 시간이 우리를 더욱 암울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론 과잉 시대에 살고 있지만 민중-되기와 관계없는 서재와 포럼의 이론은 우리를 놀라게[驚異] 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독한 ‘고생’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뉴노멀’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고생스러운 ‘민중-되기’를 통한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낼 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민중-되기’의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 다시 개벽의 시간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씨알을 씨알이게 하는 일, 씨알을 쭉정이로부터 분간하는 일은 씨알이 더욱 번성하게 하는 실천에 달려 있다. 이 실천은 씨알이 날아와 싹이 틀 수 있도록 밭을 일구는 일일 텐데,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유무상자는 무엇이며 보국안민은 어떻게 가능할까? --- 「코로나가 묻고 있다」 중에서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탐욕에게 감금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탐욕을 걷어내는 만큼 길은 드러날 텐데, 탐욕이 무거운지 지레 주저앉는다. 주저앉을 바에 기왕이면 문화적인 포즈까지 걸치면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래서 모든 문화가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탐욕을 걷어내는 일은 금욕적 절제만으로는 어렵다. 그것은 김수영의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는 담대한 발상처럼 우리 안에 봄볕이 자라는 기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놀람과 설렘은 살아 있는 목숨에 대한 동경과 경외의 감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감정의 충만이 새싹을 가리는 욕망의 잔칫상을 뒤엎는 실천을 부르기도 한다. --- 「놀람과 설렘」 중에서 미국의 자연주의 작가 헨리 베스턴은 “인간의 경험에서 밤을 제외하면, 인류의 모험에 깊이를 더해주는 종교적 감정과 시적 분위기도 사라진다”며 “밤을 경외하고 밤에 대한 천박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라” 했다. 우리가 밤을 미워하고 천박하게 두려워하는 사태는 세상이 전깃불로 뒤덮이고 난 이후에 극심해졌는지도 모른다. 서울 같은 제국적인 대도시는 이미 밤을 식민화시켜버린 지 오래 되었다. 지구의 그림자인 밤을 지우는 대신 곳곳에 인위적인 어둠을 만들고, 그 속에서 온갖 비리와 협잡과 음탕을 번식시켰다. 다르게 말하면, 밤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 자체를 잃어버려서 이리 된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곳곳에서 때를 가릴 것 없이 목격한바 그대로다. --- 「빼앗긴 밤에도 별이 빛날까」 중에서 기왕의 규범과 척도는 유명무실해졌고 새로운 규범과 척도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사실 진영 논리나 팬덤 현상은 이런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의 말만 앞세우거나, 큰소리로 우기거나, 말해놓고도 안 했다고 잡아떼거나, 법정에서 보자는 협박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언어가 제 변호와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한 현실은 암울하기만 한데, 221시간 만에 살아 돌아온 아연 광산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믿음과 과제를 동시에 던져준 것만 같다. ‘함께’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죽을 고비’에 우리 모두 빠져 있다는 진실을 말이다. ‘죽을 고비’는 피해 가서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을 ‘함께’ 살지 않으면 참사는 언제든 되돌아온다. 이 일에 정치는 직접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문학에게는 언어의 건강을 회복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오늘날 이만한 문학의 정치가 있을 수 없다. --- 「‘죽을’ 고비를 ‘함께’ 살기」 중에서 김수영이 4·19혁명의 뿌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가 살아본 당대의 혁명에 미쳐 날뛰느라 그랬을지도 모르고, 혁명의 퇴행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느라 숙고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 쿠바 혁명을 다룬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고 독후감을 남기기도 했다. 한 개인에게 모든 것을 감당케 하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동엽과 김수영은 각자 다른 정신적, 문학적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신동엽은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찾으려 했는데 비해, 김수영 또한 과거를 돌아봤지만, 대체로 인식의 외연을 넓혀 미래를 상상했다. 즉 김수영의 역사 인식은 자신이 살아본 혁명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새삼 돌아보면 신동엽과 김수영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도 바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 「꺾이지 않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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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진보의 정신이 보여준 것은 바벨탑을 쌓기 위해 파괴한 대지의 숨결, 즉 생명의 근원이었다. 존재론적 한계를 무시하고 뻗어간 욕망의 로켓은 드디어 우주를 배회하는 중이다. 그에 반해 우주가 나락 한 알에 있다는 말은, 교황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건강한 현실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나락 한 알 자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병든 현실주의’의 세상이다. 과연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정의를 통한 평화를 얼마나 갈망하는가, 그리고 그 갈망의 언어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당연히 갈망이 또 다른 망상을 일으키지 않게 ‘건강’을 지키는 일도 중요한 일인데, 문명이 일으킨 먼지 같은 망상이 출몰하는 것은 언제나 대지를 떠난 상태여서였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현실주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본문, 「AI 시대에 꿈꾸는 ‘공동의 집’」 중에서 이제 ‘예술’이 최전선이 된 것일까. 황규관 시인의 세 번째 산문집 『꺾이지 않는 마음』에는 현실에 대한 저자의 다양한 관심과 참여가 기록돼 있다. 여기서 “다양한 관심”은 단순히 다방면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여가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사건을 개별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근본 원인에 대한 집요한 물음 의미한다. 저자가 ‘책을 펴내며’에서 이 산문집에 모인 글들을 “나름 심각한 실존적 위기감 속에서 쓴 것들”이라고 한 것은 이런 물음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났듯이 이 산문집은 주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기후위기 문제 그리고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예술에 끼치는 심대한 문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몰린 생명의 문제에 시적 감수성을 드리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처한 제반 문제의 근원에는 맹목적인 경제성장의 추구가 있다는 점을 저자는 반복적으로 비판하면서, 인공지능마저 경제성장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경제성장주의와 인공지능의 현실 압도가 생태계와 민주주의의 파괴, 살아 있는 생명체와 예술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더 큰 문제는 “덧없는 사물”의 누적이 가져온 결과인데,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그것의 현재 버전이다. 지금껏 자본주의는 경제적 가난을 벗어나려면 경제성장이 계속 필요하다고 속여 왔지만, 경제성장은 우리 삶의 터전을 무단히 파괴해왔고, 맑은 공기와 강을 더럽혀왔으며, 결국 이것들이 집적돼 오늘의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이것은 “근대사의 인위적인 산물”의 극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연히 경제적 빈곤으로서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본주의는 경제적 빈곤 없이는 한시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종철과 ‘고르게 가난한 사회’」 중) 근대 자본주의 경제성장이 야기한 기후와 민주주의의 이중 위기는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몰아세우고 마는데, 저자인 황규관 시인은 예술의 역할이 이 지점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예술은 동시에 근대 자본주의가 만든 신화와 근대 과학기술이 탄생시킨 인공지능이라는 괴물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특이한 것은, 저자는 인공지능을 근대 과학기술의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근대 자본주의 문화 자체가 인공지능을 탄생시킨 토대라고 한다는 점이다. 아래와 같은 진술이 그렇다. 따지고 보면 인공지능의 문화적, 사회적 기반은 자본주의 시대가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게 아닌가도 싶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은 과학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중매체의 양적 증가와 대중문화가 말 그대로 대중의 삶에서 나오지 않고 매체 산업이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빅데이터는 누적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재배치와 조작이 산업적 대중문화를 조성했던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 중) 다시 말하면, 그동안 근대 자본주의가 경제성장을 동력으로 발전해 오면서 자립적이고 공동체적인 민중문화 대신 산업화된 대중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대중매체의 증가를 가져왔고 그것이 결국 인공지능의 초석인 빅데이터가 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는 인공지능 문제를 과학기술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는 저자의 독특한 관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한 대응에는 무엇이 있을까? 황규관 시인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로의 전환만이 기후위기 시대의 대전환에 값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결국 “‘예술’이 최전선이 된 것일까”라고 묻는다. 이는 확실히 구체적인 운동에 대해서는 무력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는 이 책을 꼼꼼이 읽어봐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독자들 입장에서는 주제가 다소 부담스러울지 모르지만, 이 산문집은 분석이나 논리를 앞세우는 책이 아니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시대에 예술이 최전선인 것일까,라고 묻는 것처럼 저자가 시종 의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김수영이나 백무산, 신동엽 등의 시인은 물론 화가인 차규선의 작품에 대한 에세이도 그 실례가 된다. 제4부의 제목이 ‘김종철 공부’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황규관 시인이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에 대해서도 ‘시인의 큰 마음’을 말한다. 당연히 이 산문집을 본격적인 예술 비평집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근원적인 바탕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 이전의 예술에 대한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면서 근대 문학과 예술의 이면에 있는 역사적인 ‘무엇’을 짚어내고 ‘노벨 문학상의 너머’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미슐레의 판단과는 다르게 콜럼버스를 통한 세계의 발견은 전혀 정당하지 않았다. 그게 근대 식민지의 서막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근대의 문화예술에는 어두운 얼굴이 숨겨져 있다. 반면에 우리의 문학은 그 어두운 얼굴을 직시하면서 풍성해질 수 있었다. 그런 우리 문학도 언제부터 경제성장에 빚지기 시작했으니 역사란 참으로 복잡 미묘하기만 하다. -(「노벨 문학상의 너머」 중) 또 이 산문집에는 글쓰기와 책 읽기에 대한 저자의 평소 생각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기도 한데, 이것들도 결국 예술에 대한 황규관 시인의 한 단면을 읽는 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재밌는 것은 저자가 드는 비유 중 농사의 이미지가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비유의 실감을 위한 것으로도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잃어가는 사물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것처럼도 보인다. 우리는 과거를 다시 살면서 미래를 미리 사는 몇 가지 방법을 안다. 책 읽기가 그중 하나일 텐데, 다만 그것이 김매기와 닮았을 때만 그렇다. 김매기는 과거를 다시 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뙤약볕 아래’라는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지 않으면 하기 힘든 노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미래를 현재의 욕망 앞에 무릎 꿇리는 행위도 아니다. 오늘 김매고 곧바로 내일 거둬들이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책 읽기는 김매기다」 중) 그렇다면 기후위기와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존재를 납작하게 만드는 시대에 어떤 대응책이 있을까? 물론 시인에게 구체적인 답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아무래도 시적 상상력이란 것은 구체적인 대안이나 정책과는 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 있을지 모를 그런 요구에 대해 저자는, 죽을 것 같은 고비에는 이웃이나 친구와 함께 사는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으로는 지나친 물질적 풍요 대신 검소한 고르게 가난함을, 개별적 존재자로서는 자신과 대화하는 삶을 꼽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각 층위의 삶은 결국 본질적으로 같은 삶이며 서로 통한다. 이것들을 위한 사상의 토대를 황규관 시인은 아무래도 동학 사상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수운 최제우부터 서로 돕는 ‘유무상자’를 권했다는 주장도 그러하고 경제민주화의 요체를 ‘유무상자’로 보는 것도 그러하다. ‘유무상자(有無相資)’는 재산의 있고 없음을 떠나 서로 돕는 삶을 의미한다. 이번 산문집의 제목이 된 글의 「꺾이지 않는 마음」에서도 황규관 시인은 동학농민혁명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 3·1운동으로 이어졌다며, 역사를 살아가는 데에도 이 마음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작가의 말(개정판을 내며) 이런저런 생각 중에 얼마 전 가톨릭 교황 레오14세가 발표한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를 읽게 되었다. 신자는 아니지만 교황의 이 문헌은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이에 대한 짧은 글을 첨부해서 개정판을 내자고 마음먹은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일을 치를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 가난한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이기에 가능했을 것이 다. 하지만 이 일은 또 출판사라는 여러 저자들의 ‘공동의 집’에 누를 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냥 편치 않지만, 글을 쓰는 일은 타인에 대한 대화의 시도가 확실한 만큼 도리가 없을 것 같다. —2026년 6월 황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