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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걷는 길
황규관
창비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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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밭 한뙈기
불타는 밀밭
오늘 하루만
뒤로 걷는 길
동백 씨
작약이 지면
나의 혁명
시골 병원
폐허에 서서
무서운 말씀
흐르지 않는 강
여기는 공터
마음을 보태다
제3의 세계
재앙이 되자 한다
가을의 영혼
거대한 적
때가 차면

제2부


약속
차비 얼마
설사의 정체
동백나무 아래서
저녁노을 2
마지막 강
떨어진 꽃잎
겨울밤
저녁의 기도
돈과 싸우다
잠시 멈춤
매미가 운다
반달처럼
침묵

제3부


도시락 건네주러 가는 길
귀신과 살다
새 마음

인클로저
외상을 살다
다시 폭설을 기다리며
역류
수평선이 되어야
부재
반지하
마이 잡았능교!
현관문
겨울 아침

제4부


적막강산
우물물
말씀 하나 달랑 메고
포고문
삼례 들판
백일
기우제
장시
풀빵 한봉지
전선이 있는가
피로 지은 집
파업 이후
신대륙
오막살이집 한채
어머니

해설 l 강경석
시인의 말

저자 소개 1

시인. 1993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문학이 필요한 시절』이 있으며 김수영 해설, 연구서인 『리얼리스트 김수영』과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등을 펴냈다. 2020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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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7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64쪽 | 190g | 125*200*8mm
ISBN13
9788936425210

책 속으로

딱 오늘 하루만 살자
아침 해에 실눈으로 잠시
간밤의 꿈을 되새기고
오늘 하루만 살자
어제는 이제 그림자가 되었다
(…)
오늘 하루만 살자
가난과 기도와 투쟁과 함께
오늘 하루만, 더도 말고
떠나야 할 시간 앞에서
아픈 손가락을 한번 더 만져주고
햇볕에 빨래를 널고 쓰레기를 버리고
오늘 하루도 애를 태우며
오늘 하루 더 땀을 흘리며
--- 「오늘 하루만」 중에서

벌겋게 타는 숲이나
흙탕물에 휩쓸린 도시를 보면
자꾸 발길이 뒤로 향한다
구토가 나오도록 번식하는 길을 따라
분열을 멈추지 않는 언어와
깊이 없는 높이 사이를 지나
다다른 곳에 서서, 이제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다
(…)
떨어져 죽고
불에 타 죽고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는 세계로
산자락을 베고 무너뜨리며
더는 갈 수 없을 것 같다
이제는 앞을 보며 뒤로 걸어야지
어둠이 되어
어둠을 사랑해야지
뒤가 앞이 되게 해야지
뒤도 앞도 사라지게 해야지
--- 「뒤로 걷는 길」 중에서

어둠에 갇힌 채
멀리서 들려오는 새 울음에
귀가 살아날 때
부서진 집터에 기억이
자라날 때
나를 버릴 때
오장육부가 연기처럼
서산에 흐를 때
갈 수 없는 먼 곳이
울먹이며 다가올 때

적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적이 될 때
다시 사랑이 시작될 때
모든 시작을 사랑할 때
--- 「나의 혁명」 중에서

겨울 아침, 햇살에
물결이 반짝일 때

수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나는 목이 긴 새 한마리

너의 긍지를 사랑하라
너의 고독을 두려워 마라
--- 「겨울 아침」 전문

저녁에는 지상에 없는 말씀을 주소서
지금은, 나뭇잎은 다 떠나고
차가운 서리나 쑥스러운 눈빛의
눈송이가 마른 가지에 앉아 있을 시간
점점 꺼져가는 숯불 같은 노을은
가슴 아래께로 흐릅니다

(…)

저녁에는 새벽도 잠시 잊고
어둠 속으로 흘러가는 야윈
냇물이게 하소서

작은 저수지가
내 안에 잠시 머물게 하소서
--- 「저녁의 기도」 중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며
물건을 버리지 말며
발에 붙은 흙덩이를 미워하지 말며
흐르는 물을 막지 말며
장작을 썩히지 말며
구부러진 길을 함부로 펴지 말며
(…)
호미 대신 기계를 숭배하지 말며
기도하는 허리는 부러뜨리지 말며
사람 아닌 것들도 죽이지 말며

모시고
살리고
가꾸고
절하고
꿈꾸고

--- 「포고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의 강, 나의 힘“

고단한 삶의 무게를 정직하게 견디며 써내려간 황규관의 시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깊이 울린다. 시인은 폐허가 된 세계에서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담한 고통과 침묵을 외면하지 않으며, 가난과 허무 속에서 천천히 낡아가는 그림자들에게 연대의 언어를 건넨다. “비루한 비굴을 이고 사는”(「동백 씨」) 존재, “주머니에는 먼지만 가득”하고 “가진 거라고는 가만히 내다보는/저물녘뿐”(「밭 한뙈기」)인 삶은 그의 시의 출발점이다. “건널 수 없는 벌건 물길”(「마지막 강」) 앞에 먼저 가서 선 시인은 ‘지난 시간’을 되짚으며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흐르지 않는 강」) 자문한다. “가난과 기도와 투쟁과 함께” 살아온 시간을 지나, “딱 오늘 하루만 살자”(「오늘 하루만」)는 절박하고도 단단한 다짐을 시로 끌어안는다.

그의 시선은 성장과 진보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본의 폭력, 인간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꿰뚫는다. 잊을 만하면 일터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이제 더는/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다”(「뒤로 걷는 길」)고 고백하면서도, 그는 끝내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차오르는 슬픔을 외면하기보다, “새까만 슬픔을 노란 꽃잎으로/바꾸는 연금술”(「불타는 밀밭」)을 믿으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다. 절망 속에서도 시인은 “숨어 있는 길을 찾으라는/아픈 채찍”(「무서운 말씀」)을 기꺼이 감내한다. 그리고 “매번 실패하는 사랑도/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때가 차면」)는 믿음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향해 앞장서 나아간다.

기도와 투쟁으로 빚은 찬연한 시의 형상
멈추지 않기 위해 끝까지 되묻는 시인의 발걸음

이번 시집에서 특히 ‘동학(東學)’ 연작시 다섯편을 주목할 만하다. “이 지독한 곳”(「저녁노을 2」)을 넘어서기 위해 분투해온 시인은 마침내 ‘동학’에 다다랐다. 이 연작시는 “혁명에는 언어가 필요하지/과거를 만난 미래의 언어/죽지 않고 미래의 문을 두드리는 과거의 언어”(「장시」)라는 시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역사를 대어보는”(「매미가 운다」) ‘혁명의 언어’로 읽힌다. 시인은 “모시고/살리고/가꾸고/절하고/꿈꾸”(「포고문」)는 ‘동학’의 사상과 정신을 단순히 과거의 혁명 신화로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 오늘의 삶과 연결하여 “지금도 무너지는 사람과 베어지는 나무와/심지어 파헤쳐지는 무덤”(「무서운 말씀」)이 생겨나는 현실을 냉철히 돌아보게 하는 재료로 삼는다. 동학이 단지 과거의 역사적 운동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섬겨야 할 삶의 태도임을 일깨우며 “비참의 흉부”(「도시락 건네주러 가는 길」)가 점점 어두워져가는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견딘 자만이 도달하는 새로운 희망의 시를 노래한다.

이러한 태도는 시 전반에 깃든 결연한 사유와도 맞닿아 있다. “기도의 뿌리를 믿지 않는 시대”(「가을의 영혼」)를 살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시인은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도, 절망에 주저앉지도 않는다. “폐허에서 기적은 시작된다”(「여기는 공터」)는 믿음을 품고 “쓰러진 함성과 노래를 누더기 삼아” 무너진 자리와 지워진 존재들 속에서 다시 걸어갈 길을 찾는다. “이제는 앞을 보며 뒤로 걸어야지”(「뒤로 걷는 길」)라는 선언처럼, 그의 걸음은 과거를 반성하고 되짚는 끈질긴 실천이자 퇴행이 아닌 참된 전진이다. 이것은 간절한 기다림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려는 다짐이고,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존재만이 품을 수 있는 내밀한 긍지다. 그렇게 황규관의 시는 바닥을 치고도 굽이쳐 흐르는 강처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묵묵히 흘러간다.

시인의 말

엊그제, 어릴 적 함께 살던 강을 보고 왔다.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내일도 흐를 것이다.

내 시가 그와 같기를 빌고 돌아왔다.

2025년 초여름
황규관

추천평

“쿠데타가 일깨워준 것은/아직 우리에게 길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 시인은 저 치욕의 시간이 현실정치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원적인 삶, 바로 ‘길’의 문제라고 성찰한다. “벌겋게 타는 숲”과 “흙탕물에 휩쓸린 도시”는 우리 시대가 “전쟁의 시간”이라는 증거 아닌가. 이 비참과 남루를 직시하며 시인은 “이제 더는/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던 시인이 “뒤로 걷”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걸음에 주목하게 된다. 청유형 어미는 낮은 독백이 되었는데, 그 어조에는 견고해진 결기의 바람이 분다. 이 길이 절망과 비애로 빠지지 않는 것은 “긍지” 덕분이다.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존재만이/가진 긍지”. 평생 발바닥으로 ‘길’을 연 해월의 생애, 「말씀 하나 달랑 메고」를 지나 “호미 대신 기계를 숭배하지 말며” “모시고/살리고/가꾸고/절하고/꿈꾸”라는 「포고문」에 이르면, 이 길이 “앞을 보며 뒤로” 가는, 즉 현실을 오직 ‘바로 보기’ 위한 투쟁이자 기도의 여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 변홍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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