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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흰 뼈
콩대를 태운 밤 봄이 그냥 오겠어 독활을 먹어야 봄이 오지 당신은 묵은밭으로 갔으나 숲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걸었다 흰 뼈 유리창에 적어보는 마음 파묘(破墓) 맥박 올무 백엽상 지복(至福) 귀때기 비석 나란히 우산을 쓰고 산책 갑니다 당신 이름을 부르면 주름이 활짝 생겨요 마른 숨만 걷어 가세요 제2부 복수 복수(複數) 밑변 누군가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었다 작아서 안온 어제가 중복이었지 안수(按手) 함박눈 혹은 흰 개에 관한 기록 어두울수록 믹서기에 갈린 푸른 시간이 필요해 단정화 하나를 당근마켓에서 구입했을 뿐인데 저승사자도 천둥 같은 연애 짓이 필요해 신발을 벗고 올라가세요 그리고 상자 12각 모란나비자개상 흔들림을 위하여 제3부 소룡골 시편 산그림자가 나를 배춧잎처럼 덮어도 집 물이 깊다 새비젓도 아닌 것이 생각나는 굴풋한 저녁이다 비 오는 날 저럽대기를 높이 세우고 아무 날도 아닌 모든 날의 지금 바람은 삼베틀 앉을깨에 앉아 북을 띄우고 함박눈 오던 날 오월 십이월 잠복 미만(彌滿) 산지당 가는 길 십자수 탈상 그해 가을 시나브로 조릿대를 건너온 물까치의 아침 산속에서 산속으로 산 아래 집이요 집 앞에 꽃이오 악몽 음계(陰界) 도리 없이 수수 여기에 계셔서 울력 눈이 온다 돌날몸돌, 돌날같이 담기다 해설|장은영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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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돌을 가볍게 던졌다 나는 그 돌을 가볍게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때부터였다 별일 없어? 하면 별일 없어, 메아리로 돌아왔다 호주머니 속 돌이 걷는다 당신은 불을 끈 채 티브이를 보고 있다 창이 번쩍거린다 던진 방어하는 우는 웃는 분노하는 돌을 안고 당신은 침잠한다 내 심장 위에 당신의 심장 돌처럼 포개었다 깨뜨렸는지 꿈속에서 당신은 한쪽 얼굴이 무너진 채 나에게 잠시 기대었다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당신에게 간다
---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걸었다」 중에서 납골당 서랍 같은 아파트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 축축하고 둥근 어둠 속에 빛이 찹니다 --- 「흰 뼈」 중에서 여름은 썩기 좋아. 썩어가는 것끼리 서로를 안아. 자요? 일어나 알아보지 못하게 물이 떨어져요 유리창에 내가 서 있어요 눈을 뜨고 맞춰진 만큼 돌다 돌아가다 낡아가는 선풍기처럼 --- 「유리창에 적어보는 마음」 중에서 온몸을 웅크리고 한덩어리가 되고 싶어 개는 내게 기댄다 작은 살덩어리가 내 살덩어리의 일부인 양 바짝 붙어 바닥을 본다 이렇게 멈춰 있는 게 거짓 같아 구멍 안의 나는 뭘까 습기 한방울마저 거짓이기를 바라는 있지 유기된 시간은 작아져 거짓처럼 집도 작아져 새가 날아 하얀 상자 곁에 귀신처럼 앉아 그래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 --- 「백엽상」 중에서 그리하여 나는 비 오는 날에도 꽃에 물을 주고 싶고 풀을 뽑고 싶고 매일 내 잡초를 뽑기 위해 일기를 쓴다 그러다가 이 풀도 어여쁘다 이것이 꽃일지도 모르지 나를 향해 귀 기울이는 빛과 함께 가만히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나는 내 정원에 오랜 장마에도 무너지지 않을 부끄러운 바위를 세우고 풀 비스무레한 것을 심기로 한다 --- 「지복(至福)」 중에서 몸은 구석구석 춤추는 무녀입니다 당신이 먼 곳에서 살짝 틀어도 톱니바퀴처럼 하나가 돌다가 내 몸속 우주가 돕니다 사람이 사람을 돈다는 건 나비가 꽃을 돈다는 건 공중으로 온몸을 떠올리는 일입니다 --- 「당신 이름을 부르면 주름이 활짝 생겨요」 중에서 까마귀가 뛰어요 손을 폅니다 손금에 운명이 있다고 했어요 운명을 매일 비누칠해서 흘려 보내는데 남아 있는 운명이 있네요 물 빠짐이 좋은가봐요 밭을 경작할 때 물길이 선행돼야 해요 물길을 열어줘야 나머지가 자랍니다 나는 물길의 나머지예요 --- 「마른 숨만 걷어 가세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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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지나고
히아신스 구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철 지난 데이지 싹이 자란다” 대지의 숨결이 깃든 흙의 언어로 써내려간 삶의 기록이자 “흙에 뿌리내린 언어의 결실”(장은영, 해설)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시집에서, 지연 시인은 인간이 대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하듯 유한한 존재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생명의 근원을 탐색해나간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성긴 친밀 속”에서 “나란히 넌출거리는”(「나란히」) 수평적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지탱하고, 삶과 죽음 또한 “서로의 온도에 기대”(「백엽상」) 생명을 떠받치는 순환의 질서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빈 깍지같이 살다 간 영혼들이 빈 깍지 같은 나를 오래 데우다가 긴 굴뚝으로 천천히 새어 나가”(「콩대를 태운 밤」)듯 생멸(生滅)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생명의 질서를 조용히 목격하기도 한다. “비 오는 날에도 꽃에 물을 주고 싶고 풀을 뽑고 싶고 매일 내 잡초를 뽑기 위해 일기를 쓴다”(「지복(至福)」)는 고백처럼, 땅을 돌보고 기록을 남기는 일은 그에게 생의 근원을 향한 기도이자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실천의 방식이 된다. 시인은 또한 “비경(?境)과 비명(非命) 사이”(「어제가 중복이었지」)에서 삶과 죽음이 서로 맞물리듯, 다수의 생이 얽힌 복수(複數)의 세계를 노래한다. “이 세상은 지난 생의 복수”(「복수(複數)」)라는 선언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연쇄와 윤회의 시간을 암시한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바닥을 떠돌며 마지막 온기로 나를 받”드는 순환의 일부이며, “몇백년 전 먼 혈육이 식은 심장을 타닥거리며 나에게 무슨 말인가”(「콩대를 태운 밤」) 건네듯 삶과 죽음은 서로를 비추며 이어져 있다. “죽은 아들을 품었구나”(「밑변」), “죽은 알을 품는다”(「누군가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었다」)와 같은 구절에서는 부재한 생명에게조차 삶의 온기를 건네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 “작은 것이 우리를/미치게 혹은 경건하게 에워싼다”(「작아서」)는 통찰은 모든 생이 서로를 비추며 순환하는 생명의 감각을 포착해낸다. 한편 시인의 고향을 신화적 무대로 재구성한 3부의 ‘소룡골 시편’ 연작은 이번 시집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그는 “아득한 과거의 신화적인 한순간”을 “만신의 언어를 빌려”(추천사) ‘지금-여기’의 현실로 불러내고, “몸 없는 소리”(「잠복」)에 귀 기울이며 사라진 존재들의 흔적을 좇는다. “시체를 꺼내 걸레로 닦”는 서늘한 장면에서 “생지에 공포로 오그라진 꽃잎들”(「십자수」)처럼 스러져간 원혼들을 달래며 역사적 폭력의 흔적을 발굴하고, 동시에 “배춧잎 속 같은 날”(「산그림자가 나를 배춧잎처럼 덮어도」)을 살아가던 가족과 정겨운 이웃들의 신산한 삶의 풍경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기억의 갈피 속에서 사라진 이들의 목소리를 불러오던 시인은 마침내 “흰 뼈를 안기 위해/몸을 흔든다”(「흰 뼈」)라는 문장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죽음의 회고가 아니라, 사라진 존재들의 삶까지 껴안으려는 깊은 연민과 사랑의 표지이다.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당신에게 간다” 순환하는 모든 존재에 바치는 기도의 노래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은 문학평론가 장은영이 짚어 보였듯 “눈발처럼 사라진 존재들이 남긴 흔적에 대한 기록이자, 그들의 부재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담은 고백록”(해설)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사라진 존재들을 다시 불러내는 ‘되살림의 제의(祭儀)’이며, 죽은 자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호명하는 기도의 노래이다. “사실 기다렸어요 죽음을”(「수수」)이라는 담담한 고백처럼, 시인 지연은 사라진 것들을 애도하면서도 그 속에서 다시 피어날 생명의 온기를 기다린다. 죽음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순환하는 세계의 질서를 노래한다.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백엽상」)이라는 다정한 인사는 시집의 끝자락에 이르러 인간과 자연,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숨 쉬는 세상을 향한 주문으로도 읽힌다.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걸었다」)로 서로의 존재를 향해 천천히 스며들며,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잠복하듯 물드는 이 흙의 세계에서 마침내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현실이 가장 아름답고 고통스럽다 가난한 오늘을 세워 무엇을 덧붙이랴 그 기꺼운 눈물겨움이 나를 살게 했으므로 고시레 고시레 오늘을 건너시라 이름도 없이 훈김으로 산 목숨들 여기 살아 춤추시라 2025년 10월 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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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시골 밥상 앞에 둘러앉아 싱겁지만 정겨운 싱건지를 먹으며 “서로의 온도에 기대”는 전북 방언 특유의 소박한 말맛에 초대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침마다 마룻바닥을 닦고 모서리의 작은 틈에 묻은 얼룩까지 세심하게 어루만지며 자연과 삶에 올리던 시인의 감사 기도에 빠져들려는 찰나,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뭔가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자 몸부림치는 “은심(隱心)”에 나도 모르게 걸려버렸다. 그 은심의 말은 처음부터 기상 관측 장비 ‘백엽상’의 이름을 빌려 개와 함께 웅크린 몸으로 날씨와 자아의 흔들림을 측정하는 감정의 기상학에 닿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지역적 삶의 결을 통해 말할 수 없던 존재들이 말하게 되는 시적 공간을 창조한다. 아버지의 기일, 어머니의 말 등 기억의 공동체와 물외, 노각, 탱자 울타리 등 토속적인 시어들이 빚어낸 세계가 그렇다. 그런데 그 세계는 회상과 서정시의 문법에 머물지 않고 무당의 의례와 귀신의 언어로 거듭나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전복시킨다. 3부의 ‘소룡골 시편’은 그것을 입체적으로 집약해낸다. 아득한 과거의 신화적인 한순간을 “살고 싶은 죄가 썩지 않아 죄를 지어 올리네”라고 비손하는 만신의 언어를 빌려 우리 바로 곁의 현실로 불러낸다. 이처럼 지연 시인의 시세계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의인화하여 목소리와 생명력을 부여하며 인간 너머의 존재와 우리의 현실을 잇는, 만신의 프로소포페이아의 경계에 닿아 있다. - 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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