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제1부
김군에게 신무기와 재래식무기 소의 얼굴 까마귀 스물다섯살을 반성함 맷돌과 모닥불 먼 데서 온 저녁상 능소화 동백꽃 신경림씨의 근황 시민 김창수씨 신길온천에는 온천이 없다 사전선거운동 축문(祝文)을 지으려다 그만두고 트럭을 타고 온 사람 제2부 날이 장히 좋구나, 청아 백일홍 일곱살과 일흔한살 금강산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이제 초행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출생률을 높이는 법 아버지는 어떻게 답하셨을까 표표히 떠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오래 남는다 의자 할미꽃은 여름 풍경 목련꽃이 피었다 시론 제3부 해방촌 소나무 숲에서 산수화는 본디 나는 그렇게 들었다 아까 그 사람들 바람에겐 안됐지만 정원이의 스케줄 딴 세상과 거래할 일이 있거든 매화야, 너는 어이 그 새끼, 말 참 이쁘게 했다 주의와 협조를 당부함 톰처럼 주디처럼 맨손체조 어린이날에 제4부 백년 여관에서 산불 이후 밤의 공제선 태풍 19호 오래 걸릴 것이다 절경 이런 날은 윤슬을 보며 오래된 직업 영랑호에서 양 천치와 백치 하지(夏至) 졸곡(卒哭) 대설 지구인 해설|김수이 시인의 말 |
윤제림
윤준호의 다른 상품
|
1
그해 오월 광주 사진에는 부처님 오신 날 광고탑과 현수막이 보인다 오셨을까? 안 오셨을까? 의견은 둘로 갈릴 것이다 -오셨다면 그 난리가 났겠어요? -오셨어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2 사실은 이렇다, 그분은 다녀가셨다 황금 가사는 무등산 깊숙이 숨겨두고 서둘러 변복을 하고 머리띠를 두르고 총을 잡았다 당신이 본 사진 속 그 사람이다 웃통을 벗어부치고 깃발을 흔들었다 피 묻은 청년을 들쳐 업고 내달렸다 가두방송을 하고 구호를 외쳤다 당신이 들었던 그 목소리다 겨우 총성이 멎고, 집으로 혹은 다른 세상으로 모두 흩어지고 난 아침엔 비를 들고 광장을 쓸었다 (…) 화순 운주사 장씨 이씨 박씨 최씨도 따라와 말없이 앉고 서고 누웠다 그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부처님이 많이 오셨다 ---「트럭을 타고 온 사람」중에서 지하철 4호선 신길온천역이 온천도 없으면서 굳이 저런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은 길손 불러 앉혀서 선뜻 들밥을 나누고 낯선 짐승 쉴 자리도 보아주던 옛 마을이 사뭇 그리워서다 갯것 비린 것 아낌없이 실어다주던 서쪽 바다에 허리를 굽히고 소금밭에 기우는 해에도 큰절하던 때가 눈에 밟혀서다 (…) 거기엔 필시 매끄러운 물이 솟고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터, 이 고장 사람들과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물을 필요도 없어진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낯과 살갗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한데 벗고 앉아서 더운 김을 나누며 뜨거운 생명의 물을 온몸에 바르고 마실 날이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신길온천에는 온천이 없다」중에서 “자리 잡으면 연락할게” 먼 길 떠나는 사람들이 곧잘 던지고 가는 이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영 소식이 없으면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았거나 아주 잊어버린 까닭이라 생각하자 제법 잘 지켜지는 약속도 있다 “먼저 가보고 좋으면 부를게” 삼년 전에 저세상으로 간 언니가 자꾸 부른다며, 엄마가 먼 길을 갔다 혼자 갈 수 있다며 언니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며 새벽길을 갔다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좋으니까 불렀을 것이다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중에서 더는 못 참겠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피도 좀 묻히고 작정하고 나온 화염(火焰)의 언어가 마음먹은 데까지 온전히 가닿았다면 그 소리가 지나던 길에 앉고 서고 눕고 걷고 뛰고 달리던 다른 말과 노래와 울음 들이 냅다 엎드리고 목을 움츠리고 다리를 오므리고 물러서고 비켜서고 멈춰준 까닭이다 새들도 분명 평소보다 높이 날았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랑의 말들은 예외 없이 비상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는 것이다 ---「주의와 협조를 당부함」중에서 |
|
“당신이 먼저 왔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의 삶이 일깨우는 존재의 섭리 이번 시집의 기저를 관통하는 태도는 ‘알아듣기’와 ‘알아보기’다. 시인은 우주의 관객인 “지나가는/사람”(「백일홍」)의 자리에 머물기를 자처하며 스스로 말하기보다 삼라만상에 먼저 귀 기울인다. 그에게 있어 듣고 보는 행위는 어떤 존재도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는 거창한 순간이 아닌 소박한 일상 속에서 반복된다. 그는 “인간이 모른 체 지내도 괜찮은 존재가/천지간에 하나도 없”으며 “태초에 인간과/삼라만상이/서로의 신원을 보증해주기로 한/약속이 있었음”(「맨손체조」)을 겸허히 믿는다. 이러한 태도의 바탕에는 만물이 복잡하게 얽혀 순환을 이루는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이 있다. “우리는 지금/바싹 붙어 앉아 있다/두 손을 꼭 붙들고.//오늘 처음 본/사이에!”(「지구인」)라는 진술에는 뭇 존재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묻어난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면 좋겠다, 동행도 없으니” 시인은 이 우주에서 만물이 간절히 연결되어 있음을 노래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과 동물, 나아가 죽은 이들의 목소리까지도 집중해서 듣는다. “말조심해라/우리는 아무거나 먹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당신을 고기로 보지 않는다”는 “버들치 갈겨니 동자개 모래무지”(「나는 그렇게 들었다」)들의 조용한 외침을 듣고, “누가 날 좀 지상으로 내려다오/나를 올려다보는 사람들 목도 아플 것이오,/김구 팔도 아플 지경이니”라고 “남산공원 백범 동상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걸”(「시민 김창수씨」) 듣는다. 이는 환청이나 상상이 아닌 “마음으로 알아듣는 말”(김수이, 해설)이다. 이처럼 존재 사이의 담장을 허물고 낮은 목소리에 주파수를 맞추는 치열한 경청으로 시인은 세상과 공명한다.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삼라만상의 숨소리를 받아 적는 이에게 그 시선을 안으로 돌려 스스로를 매섭게 성찰하는 일은 숙명과도 같다. 시인은 과거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던 시절, “죽는 약”인 줄도 모르고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농약 광고를 만들었던 젊은 날의 무지를 뼈아프게 복기한다. 그는 “배추 한포기 키워보지 못한 사람이 흰소리를 막 했다”고 고백하며 “늙은 전답, 검버섯 들판” 앞에서 “참회의 문장을/땅에다 묻”(「스물다섯살을 반성함」)는다. 이러한 서늘한 자기반성은 타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이래라 저래라’ 방법도 방향도 이르지 못하면서/‘일해라’ ‘절해라’ 명령만/되풀이하는” 기성세대의 무책임함과 권위적인 태도를 꼬집으면서도, “나 역시 꼰대”라며 시인은 스스로를 낮춘다. “청춘이 사원(寺院)인데/누구한테 경배하겠는가.//일도 절도/자네가 주인”(「김군에게」)이라는 말로 청춘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시인의 모습에서는 권위를 걷어내고 성찰을 거듭하는 어른의 단정한 품격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랑의 말들은” 온 우주가 기꺼이 길을 터준 자리에 고이는 진심 윤제림에게 사랑은 나만의 의지로 완성되는 독백이 아니다. 불꽃처럼 달려가는 사랑의 언어가 온전히 가닿기 위해서는 세상의 다른 말들이 잠시 물러서주는 “주의와 협조”(「주의와 협조를 당부함」)가, 거대한 연대의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감각을 곤두세워 만물을 살피는 행위는 결국 지극한 사랑을 온전히 전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시인은 온천이 없는 역에 붙은 ‘온천’이라는 이름에서 “길손 불러 앉혀서 선뜻 들밥을 나누고/낯선 짐승 쉴 자리도 보아주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어내고, “뜨거운 생명의 물을/온몸에 바르고 마실 날”(「신길온천에는 온천이 없다」)이 마침내 오리라 믿는다. “이쪽저쪽 두루 통하는/우주의 엔터테이너”(시인의 말)로서, 만물이 서로를 다정하게 살피는 장면을 꿈꾸는 시인은 현실의 삶에 급급한 우리에게 “사람과 하늘을 섬기는 법”(「소의 얼굴」)을 일깨우며 위태로운 ‘인간의 자리’를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시인의 말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김수영 「금성라디오」 이것이 저것을 저만치 밀치고, 오래지 않아 또다른 무엇이 와서 저 자리의 주인이 된다. 점입가경, 타락과 승격이 순식간이다. 폭포의 전율과 급류의 공포가 마을로 내려오고 꽃과 나무들조차 성실 근면의 미덕을 버렸다. 산신령이 집을 잃고 물귀신이 거처를 구걸하리라. 위태로워라, 사람의 자리. 멀리서 횔덜린이 말한다. “근심하고 섬기는 일, 시인들에게 맡겨진 일이로다.” 만신(萬神)과 손을 잡아야겠다. 시인과 무당은 이쪽저쪽 두루 통하는 우주의 엔터테이너. 할 일이 더 늘 것 같다. 2026년 입춘 즈음 남산 시옹암(是翁庵)에서 윤제림 |
|
광고 한줄의 유효기간을 생각한다.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사람들에게서 잊히면 사라지는 걸까. 휘발된 말은 다 어디로 갈까. 『스물다섯살을 반성함』에는 지나간 말의 무게를 기억하는 사람이 산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삶의 결락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어째서 행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지, 어디로든 더 걷고 싶어지는지 늘 궁금했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애쓰는 마음이구나! 삶이 이쪽과 저쪽 사이, 그 찰나의 대기실임을 아는 이의 뜨거움이랄까. 밥상 위로 흘러오는 것의 궤적을 헤아리고, “천성이 모질지 못했던” 태풍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과도 닿아 있다. “딴 세상과 거래”하기에는 어떤 날이 좋은지 알고, “하늘과 내통해온” 나무들의 내력을 슬쩍 흘리는, 이토록 수상한 산책자라니! 그의 세계를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나는 또 처음처럼 놀라고 안도하고 낯선 홀림에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된다. 이 반짝이는 위트와 깊은 포옹을 선물하고 싶다. 살포시 흔들어놓고 싶은 사람에게, 오늘을 살아낼 힘이 필요한 사람에게. - 윤고은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