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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마트료시카
세수 농담 친구의 집 마트료시카 취미 생활 아주 잠깐의 저녁 거울의 스푸마토 타박타박 제라늄 도토리 줍기 24시 편의점 남아도는 기분 제2부 오답 노트 서정 왕십리 질문들 연못과 팻말 슬픔이여, 안녕 오답 노트 겨울방학 웨하스 생각 토마토 올해의 슬픔 우리가 아이를 잃는다면 음각박물관 눈감은 도서관 침대에서 만나요 제3부 잠의 아름다운 형태들 그레텔 에우리디케 잠의 아름다운 형태들 수련 벽과 공과 나 당신의 모든 조각 사서 K 생일 나는 오늘 고통스러웠으나 애쓰지는 않았어 푸른 십년 후의 잔디 청혼 젖은 머리로 누우면 제4부 짙고 푸른 별무늬 커튼 개 배송 집 한채 관리사무소 비닐봉지 속에서 나의 아름다운 냉장고 무인상점 사은품 천사 여자는 잘 있습니다 짙고 푸른 별무늬 커튼 고요 식물원 백지 손 해설|송현지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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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이 될게
지겨운 꿈의 영사기가 토해내는 풍경 말고 이웃의 식탁 위에 얇게 저며져 아삭아삭 씹히다가 달콤한 피 흘리면서 사라지는 여자들은 말고 대대로 내려온 아버지들의 튼튼한 위장 속을 물구나무선 채 역류하는 독한 농담이 될게 허물어지는 얼굴이 좋아 반백년 전쟁을 겨우 마치고서 폐허가 된 가난한 나라의 국경선이 좋아 주인 없는 실패가 좋아 ---「농담」중에서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친구인 걸까 물음표처럼 자꾸 구부러지는 몸을 펴고 의자에서 일어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는 내가 서 있어 나는 드디어 친구처럼 나를 활짝 끌어안았다 ---「친구의 집」중에서 내일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지? 안간힘으로 한 방울 남은 샐비어 꿀에 대롱을 드리운 나비에게 무엇이 축복이지? 부서진 다음에도 부서질 것이 그만큼 남아 있다는 것 ---「질문들」중에서 오늘은 쌀알만 하다가 눈사람처럼 커다래지는 그런 슬픔은 말고 (…) 폭죽처럼 웃음처럼 터지는 슬픔에 대해 힘센 슬픔에 대해 정답을 잊어버릴 때까지 계속 틀린 답만을 적어내는 고집 센 학생들에 대해 ---「오답 노트」중에서 삼백육십오일 세일 중인 웨하스처럼 남아도는 비극이 각자의 창문 틈에 부스러기 소식으로 떨어지다가 이내 눅눅하게 잊히겠지 대단지 아파트 저 조그맣게 깜빡이는 창문마다 얼마나 많은 세계가 들어 있을 것인지 생각하다가 길어질 대로 길어진 그림자와 산책길을 다 끌고 와서도 나는 그 어떤 슬픔에도 다다르지 못했네 ---「웨하스 생각」중에서 “저기요… 거기 실 좀 주시겠어요?” 등 뒤에서 누군가 낮게 속삭였지. 버려진 문갑처럼 여자는 문에 기대 있었어. “나는 문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불을 꿰매는 일을 하지요.” 너의 그림자는 발밑에서 실처럼 얇게 이어지다가 여러 가닥으로 엉켰어. 바늘이 그림자를 통과할 때마다 그림자는 몸 밖으로 풀려나왔지. “당신의 모든 조각들은… 어디로 이어질까요…” 여자는 바느질의 매듭을 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 너는 손을 뻗었어. 네가 흘린 실밥과 잃어버린 조각들이 무수히 깔린 복도를 향해. ---「당신의 모든 조각」중에서 오늘 우리 귀엣말처럼 사소해집시다 추운 세계에서 날아가려다 붙잡힌 고통의 깃털을 산 채로 뽑아 만든 가볍고 포근한 이불 아래서 이웃의 나쁜 소식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잠의 입구를 서성이다가 문득 흘러나온 혼잣말이 침대를 적실 때에 서로의 창문에서 코끼리 귀를 닮은 커튼으로 펄럭입시다 ---「청혼」중에서 가끔 나를 열어보고 놀란다. 이렇게 오래된 것들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니. 어제는 둥둥 뜬 기름처럼 걷어내도 자꾸만 엉겨 붙는다. 밤의 주름마다, 젊은 모습 그대로 밀폐 용기 속에 담긴 엄마가 웅웅 낮게 울린다. 쓸쓸하고 서늘한 음악, 얼어붙고서야 선명해지는 삶의 무늬들. 네모난 어둠 속 깊이 밀어 넣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 입을 열면, 유통기한 지난 우유처럼 흘러내리는 기억들. 나는 조용히 닫힌다. ---「나의 아름다운 냉장고」중에서 무릎을 세우고 방 안에 앉아 있다 재투성이 어젯밤 베개를 안고 짙고 푸르게 뒤척이는 별 아래 비밀 편지를 담은 술병처럼 아니, 돛단배처럼 창 너머 흔들리는 이파리들 손을 뻗으면 모래처럼 바스락거리는 먼지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용서를 빌지 않았으면 좋겠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어둠 위로 잘 오려낸 별들, 부서지며 빛난다 ---「짙고 푸른 별무늬 커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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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고 흩어진 마음들이 서로의 곁에 닿을 때
고통의 폐허에서 피어나는 조용한 연대의 언어 이번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흐려지는 장면들이다. 시인은 ‘나’가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마다 서로의 자리와 몸짓이 변화하는 유연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친구인 걸까”라는 물음을 통해 단순히 관계를 묻는 것을 넘어 두 존재가 서로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마침내 “문밖에는 내가 서 있어/나는 드디어 친구처럼/나를 활짝 끌어안았다”(「친구의 집」)라는 장면에서 ‘나’와 타자의 구분은 사라진다. 또한 “벽에 나를 던지면 대답 대신 돌아온 공이 벽을 퉤 뱉는다”(「벽과 공과 나」)라는 기묘한 장면을 통해 ‘나’와 세계가 부딪치고 자리를 바꾸는 동안 존재가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김경인의 시에서 ‘나’는 세계의 수많은 기억을 계승하는 존재로서 어느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나’와 타자는 차이를 지닌 채 함께 존재하면서 서로 고통을 나누어 갖는 연대적 관계의 ‘우리’로 거듭난다. 연대하는 ‘우리’가 되기에 앞서 시인은 먼저 비극적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존재들을 깊은 연민의 눈길로 살핀다. “노동자들이 조각조각 부서져 사라졌다 해도 (…) 다행히도 내 나라의 천연자원은 슬픔이어서 가장 가난한 집조차도 슬픔만은 넘친다네”(「웨하스 생각」)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대목이나,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 현장에서 “곤봉에 맞아 형체 없이 으깨진 살 같은 것”(「토마토」)을 떠올리는 순간은 사회적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홀로 외롭게 살아가며 “눈 코 입 없이 반죽이 된 여자”, “유리창처럼 깨져 풍경 속에 박힌 여자”(「사은품 천사」)의 삶을 바라보며 “여자는 잘 있습니다/가장자리가 오그라든 채/벽지에 스며들어”(「여자는 잘 있습니다」)라고 묘사할 때, 시인의 언어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차가운 얼굴을 감싸주는 “고통의 깃털을 산 채로 뽑아 만든/가볍고 포근한 이불”(「청혼」)이 된다. 중요한 점은 시인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는 그 어떤 슬픔에도 다다르지 못했네”(「웨하스 생각」)라는 고백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드러낸다. 시인은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관망하듯 함부로 말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세상의 모든 비유가 새로 쓰이는 순간을/침묵 속에서 지켜”(「우리가 아이를 잃는다면」)본다. “삼킨 말이 쌓인 식탁 모서리”, “응답 없는 전화기에 얕게 쌓인 먼지”, “돌아오지 못한 짝짝이 신발”(「음각박물관」)처럼 잊힌 존재, 구석진 자리를 하나하나 꺼내어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슬픔을 대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곁에 오래 머물며 자신의 맨살을 드러내는 일이다. 시인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어설프게 재단하는 대신 자신의 취약한 안쪽을 내놓고 “우리를 꺼내어/토막 난 진실을 잇는”(「우리가 아이를 잃는다면」) 쪽으로 나아간다. “얼어붙고서야 선명해지는 삶의 무늬들” 비산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우리’로 잇다 “저 멀리 아름답고/가까이서 보면/참혹뿐인”(「서정」) 현실의 이면을 직시하는 김경인의 시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자신의 상처와 맞닿아 있다. “부서진 다음에도/부서질 것이 그만큼/남아 있”(「질문들」)는 보통의 비극 속에서 내뱉는 “나는 살아 있다/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그러니 아무도 용서를 빌지 않았으면 좋겠다”(「짙고 푸른 별무늬 커튼」)라는 시인의 다짐은 이번 시집에서 가장 빛나는 단단한 문장이다. 이는 단순한 희망의 선언이라기보다, 아직 오지 않은 삶을 향해 “새로 돋아/아름다운 귀”(「고요 식물원」)를 열어두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의지의 선언이다. ‘지금-여기’의 삶을 비추며, “끝내 생활하는 사람의 편”(이원, 추천사)에 서 있는 김경인의 시는 언제까지고 우리 곁에 머물며 마음의 응달을 밝힐 빛의 언어로 오래도록 읽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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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의 이번 시집은 등고선과 닮았다. 인간이 만든 규칙 사물 구조를 깨트리지도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겹겹”의 세계를 “거듭거듭” “가닥가닥” 펼친다. 현실을 이탈하지 않은 결과로 “온몸이 주름이 된 노파”, 번번이 내 것을 너에게 내어주는 나, 그런 내 안에서 끝나지 않는 “마트료시카 엄마”와 “아빠”는 같은 높이에, 같이 위치한다. 이 부조리를 심각이 아닌 담담으로 만드는 것은 김경인의 기법일까, 갱신일까.
김경인의 등고선을 클로즈업하면 방금 잘린 나무 냄새가 난다. 막 드러난 나이테에 대고 ‘조용한 삶’이라고 불러보게 하는 김경인의 시편을 ‘생활의 윤리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오래 반복되면 생활이 된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능성을 닫은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끝내 생활하는 사람의 편인, 그런 관점. “나는 살아 있다/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그러니 아무도 용서를 빌지 않았으면 좋겠다”. 읽는 사람을 삶의 순례자로 멈추게 하는 여기에 “모자”가 있다. 모자가 감추고 있는 것은 “새로 돋아/아름다운 귀”. 새싹 귀를 가질 수 있다는, “허름한 미래의 모자” 안에도 별이 돋아날 수 있다는 믿음. 김경인의 시적 여정은 이제 거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이 시집이 우리 모두의 보고서라는 걸 의미한다. - 이원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