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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내리는 눈발들
제1부·이렇게 고요하고 차가운 불꽃의 세계 백색증 눈 내리는 행성을 나는 가졌네 이렇게 고요하고 차가운 불꽃의 세계 청색에 흘린 청색 수의(壽衣) 그런 약속의 말이 있었다는 듯 발목들 신의 아그네스와 벚나무 꿈 걸인 여자가 다녀갔다 불어나는 풀 제2부·청사과 눈 오고 동백 지다 파란(波瀾)을 끌어 덮는 밤 청사과 산책자 달리면서 생각하기 멍게 이야기 검은 곤드레나물을 삶는 밤 흰 개 1 너무 환한 오후 세시 오늘의 파이 깨진 화분 삼십대 당신은 이름이 저녁이라 했다 나는 나의 장례식에 갔었다 유리, 혹은 유리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새가 쏟아졌다 두고 간 목소리 물에 놓다 제3부·감정의 기원 물의 무형행성에서의 하루 감정의 기원 정오의 풀밭 기린여자 세번째 거짓말에서 만난 싯다르타 흘러 다니는 섬 사라진 누선(淚腺)으로 우는 것들 밤의 푸른 외투를 걸친 자화상 그리운 곳으로부터 바람은 분다 타살들 낮에 산 패딩을 입어보았다 언 사과 한 자루 질병이 우리를 야유한다 흰, 제4부·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 빈방 박수의 탄생 일기예보 없는 나비 환승역 백색소음 고택(古宅) 취토(取土) 땅꾼의 여자 동심초라니요? 고양이가 간다 검정 백합 눈동자에서 태어나는 아침 침묵을 쓰다듬는 사람 아일랜드 흰 개 2 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 해설|최현식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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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꽃들의 체온은 대체로 4°C이므로
집에 와 곰곰 생각하다가 저녁 먹고 이 닦고 다시 생각하다가 아, 꽃들은 이미 구백년간 잠든 채 갓 깨어난 잠의 음악이거나 구백살인 채 태어난 어린 신들인 거라 신이기에 물론 슬픔 따위 몰라야 하는 이 깊은 슬픔 ---「이렇게 고요하고 차가운 불꽃의 세계」중에서 나는 흔적 없이 스미고 번졌다 그것은 몹시 적막한 일 나…… 하고 부르면 방향을 알 수 없이 나, 나, 나…… 대답하는 메아리에 에워싸이는 그것은 잠수부가 물의 깊이에 몰입해가는 것과 같은 일 나의 청색에는 겹겹 나, 나, 나, ‘나’들의 메아리가 있다 (…) -누구라도 저 문을 밀고 나타났다가 문을 닫고 사라져가. 숲속엔 그런 문이 셀 수 없이 많아. 바람 부는 날 숲은 문 여닫는 소리로 얼마나 소란한지 알아? 그때의 소란을 듣는 일은 얼마나 고적한 일인지? 꿈속을 배회하는 여럿의 나를 지나가는 나는: 옻칠한 나무 반상에 물을 떠놓고 흰 양초를 켜고 치성을 드리는 아내인가 하면 그 상을 뒤엎는 남편이기도 했다 쏙독새만 한 무쇠 가윗날을 양손으로 벌려 머리채를 베는 미용사인 나와 검은 머리 다발을 잘리는 붉은 제의의 샤먼인 내가 있었다 그날의 꿈은 모든 꿈의 총체, 나의 가능한 깊이와 너비, 나의 알레프 ---「청색에 흘린 청색」중에서 고독의 왼뺨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다 화가의 두개골, 화가의 자궁, 화가의 심장인 둥그런 입체, 전방과 후방이 동일한 사과가 있다 내재율의 방이 있다 악공은 가고 홀로 우는 만돌린이 있다 나는 이음새 없는 그것을 돌며 문을 찾으려했다 그러자 그것은 우웅…… 소리를 내며 문 없는 건축물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장애 없는 수평이동이었다 화가가 낳은 그것 또한 자궁인 동시에 두개골이며 심장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그것의 삼위일체에 몸을 맡겼다 이제 막 귀가 생기고 듣는 능력을 얻은 태아처럼 웅크려 건축물 바깥으로 귀를 모았다 사과가 사과인 사과로서의 발생 경로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들판의 일을 지나 저곳, 아득한 백악기가 내쉬는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우주 저편, 별들의 생성과 소멸을 듣는 일의 가없음에 휩쓸려 나는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충만감에 압도되었다 우주미아가 되어 말할 수 없이 광활한 고독감 속으로 내던져졌다 하나를 이루는 일은 개별을 버리는 일이었다 ---「청사과」중에서 나는 겨울 해변을 거니는 늙은 갈매기. 잿빛 차도르를 두른 비육한 산책자. 시인 C가 신중한 걸음걸이로 오고 있었어. 그는 밤의 밀사에게서 운석을 받아 오는 길이라 했지. 이곳은 수세기 전에 죽은 시인의 꿈속. 갈매기의 시야에 펼쳐지는 타자의 꿈이라니. 타자의 꿈을 껴입고 뒤뚱거리는 갈매기라니. 그때 세계는 잠든 자들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가는 한마리 상제나비. 후두염을 앓는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내어 그게 어떻게 생겼나 좀 보자고 했지. 그는 조심스레 손을 펴 보였어. 회청색 운석이 있었지. 그것은 손바닥을 운행하고 있었어. 손바닥이 그처럼 깊은 천체였다니!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의식한 듯 곧바로 운행을 멈춘 그것은 흔해빠진 화강암 한 조각이었어. 이 돌멩이는 그러니까…… 그……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의 출처. 세상 모든 시(詩)가 응축된 시. 창세 이후 파도 소리를 듣던 모든 영혼들의 형해(形骸). 그런 은유에 대해서라면 나도 좀 알지. ---「산책자」중에서 바람도 없이 꽃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바람 한점 없이도 벚꽃이 저마다 흔들린다 보이지 않는 뿌리도 뿌리를 품은 흙도 미세하게 흔들리겠지, 짐작하는 동안 나에게서 알 수 없는 무엇이 장지문 문풍지처럼 바르르 떨린다 그게 목숨일지 그리움일지, 내 안의 검은 악기가 저 혼자 운다 ‘없음’으로 생생하게 전개되는 이런 일 바람 없이도 꽃이 흔들리는 만큼만 흔들리기로, 나는 사뭇 안도하며 길을 걸었다 벚꽃과 나, 이쪽과 저쪽의 공명 지상의 모든 떨림은 우주적 떨림에 연이은 거라고, 스스로 악기이며 악공인 우주는 지금 사뭇 저의 선율에 잠겨 있다고 알 수 없는 건,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아파하는 일 그러므로 나는 사랑의 세계성에 들어선 사람, 죽음 너머의 날들을 흘러가는 혼령, 사랑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 이전의 것이므로 ---「감정의 기원」중에서 모든 발걸음 속 당신 발걸음을 구별하는 능력은 어디서 오나. 처음엔 선로를 구르는 지하철 바퀴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어. 뒤이어 지하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 조용한 산문의 보폭으로 걸음을 떼는 당신. 우리는 노선이 다른 전철을 타고 서로에게 가고 있어. 불의의 사고 같던 그날 이후 백년을 우리는 서로 다른 노선 위를 달리는 중이지. 백년 후 어느 봄날, 우리는 J 환승역에서 보기로 했어. 당신은 플랫폼 5-3 나무 의자 앞에 선다. 나는 한시간 정도 늦을지 모른다는 문자를 보낸다. 당신은 배낭에서 책을 꺼내 읽던 페이지를 편다. 책장들은 펄프 이전의 기억들을 부스럭거린다. 책장을 넘길 때 쏟아지는 활자의 그림자가 잠깐씩 환하다. 나는 이 모든 걸 한시간 늦을지 모르는 시점에서 보고 있다. 아무튼, 늦어서 미안. ---「환승역」중에서 빛과 어둠 사이 모든 있는 것들에 깃든, 그러나 또한 어디에도 없는 그의 이름은 무(無) 최초의 적막…… 대지의 숨, 시공간의 맥박으로 그는 살아 있다 그는 사계의 기억을 깨워 그의 일을 한다 지금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여름의 맨몸인 수박이 익어가는 때 * 해변으로 밀려온 어린 난민의 익사체…… 공습 사이렌 소리에 책상 밑으로 기어들기도 전에 수업 중이던 아이들이 숨을 거두는…… 공포의 세계, 손목 힘이 풀리고 컵을 놓치고 그대로 주저앉는 영문 모를 질병의 세계: 지상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드라마에 그가 어떻게 관여하는지에 대해 그는 침묵한다 다만 오늘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부조리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옵시고…… ---「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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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경험하는 중이다”
하나의 ‘나’에서 세계의 무수한 떨림으로 겹치고 번지며 확장되는 감각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꿈속을 배회하는 여럿의 나”(「청색에 흘린 청색」)가 있음을 발견하고 고독의 정서를 통해 끊임없이 분열하고 확장하는 자아를 보여준다. 시인에게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끊임없는 울림 속에서 내면에 숨겨진 수많은 목소리와 흔적을 발견하고 자아의 본질을 탐색하는 사유의 시간이다. 선명하게 전개되는 색채 이미지들은 그 내면세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천사, 나비, 개, 눈[雪] 등을 표상하는 흰색은 무구함, 탄생, 애도, 환함, 슬픔과 같은 여러 성질의 바탕이 된다.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백면 위에, 시인은 짙은 청색으로 또렷하게 자신의 존재를 새겨나간다. 마치 “청색에 흘린” 또다른 “청색”처럼 “흔적 없이 스미고 번”지는 것 같아도, 세계 속의 존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직접 “경험하”(같은 시)면서 겹겹이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스스로 “내가 나를 답사하고 탐사하는”(「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를 거쳐 진정한 ‘나’를 완성해나간다. 한편 ‘르네 마그리트 「Listening Room」에 부치는 시’라는 부제가 붙은 「청사과」와 「환승역」에서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감각적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어두운 방 안에 가득 들어찬 청사과 그림의 인상은 어느새 무수한 초현실적 이미지로 이루어진 노래가 되어 흐른다. 홀로 들어앉은 “청취실”에서 시인은 “우주미아가 되어 말할 수 없이 광활한 고독감 속”에서 속절없이 “생성과 소멸”(「청사과」)하는 별들의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 기민한 감각은 「환승역」으로 그 여정을 이어간다. 지상과 천국, 과거와 미래, 역사와 선사, ‘나’와 ‘당신’이 교차되는 환승역에서 시인은 운문의 속도로 우주라는 긴 책의 역사를 따라잡고자 한다. 눈으로는 볼 수 없을 “검푸른 밤하늘 한복판”에 걸린, “사과”로 표상되는 세계의 기억을 리듬을 따라 되짚는다. 화자는 비로소 “나에게도 희고 커다란 날개가 생길 것 같”다는 말을 건네며 ‘나’와 ‘당신’의 경계를 넘어 세계의 진면모를 인식하기에 이른다. 개별과 총체, 고독과 화합, 소멸과 생성은 각각의 상태로 건너가기 위해 이어진 하나의 경로가 된다. “한없이 고적”(「청색에 흘린 청색」)하게 자신의 메아리를 들은 뒤에야 “스스로 악기이며/악공인 우주”의 선율과 결속할 수 있고, “죽은 시인의 펄럭이는 말들”을 빈틈없이 받아들인 후에 비로소 애도를 넘어 “사랑의 세계성”(「감정의 기원」)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너지는 세계를 온몸으로 애도하는 문장들 소멸의 슬픔을 안고 끝내 아름다움에 가닿는 음성 나아가 시인의 시선은 생의 공포와 소멸의 어둠 속에서 허덕이는 존재들의 현실로 향한다. “한 사람의 장례는 모든 사람의 장례”(「나는 나의 장례식에 갔었다」)라는 깨달음은 개인의 상실을 우리 모두의 슬픔으로 확장하고, “누가, 무엇이 그를 죽게 했는지?”(「타살들」)라고 묻는 목소리는 한 노동자의 죽음이나 희생을 단순한 개인의 불행으로 지나치지 않고 그 불행을 야기한 배후를 묻는다. 시인은 사회적 비극을 “인간 누대의 피에 젖은 식탁”(「사라진 누선(淚腺)으로 우는 것들」)으로 명명하며 삶의 그늘진 곳에서 고통받는 존재들의 죽음을 진혼하는 사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낸다. 그러나 시인은 슬픔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다. 고통과 절망의 세계를 온 힘을 다해 응시하며 끝내 생의 기척과 사랑의 빛을 포착한다. “손이 따듯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을 추억이라 하고/잡은 손을 놓을 리 없을 거라 믿는 일을 사랑이라 한다”(「백색소음」)라고 말하며 사랑과 애도는 결국 ‘기억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고독이 단순한 외로움이나 삶을 포기하게 하는 아픔이 아니라 “나의 연료, 나의 조난 식량”이 된다는 역설적 지혜와 “우리의 유일한 지하자원은 검은 고독”(「검은 곤드레나물을 삶는 밤」)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랑 역시 상처가 없는 무결한 상태가 아니다. 시인은 “사랑은 그러므로 스스로 얻은 상처가 아름다울 때 발현되는 빛”(같은 시)이라고 말하며,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 강한 생명의 힘과 희망을 다시 찾아간다. 죽음과 상실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사멸의 그늘 속에서 신생(新生)의 빛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시선은 더욱 강고하고 아늑해졌다. 곳곳에 도사린 “부조리의 덫에 걸리지 않”(「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고 삶의 비관과 비극을 담대하게 통과하여 아름다움을 펜 끝에 머금을 수 있게 된 시인이야말로 세계의 진면목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마지막에 남긴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일은 나를 용서하는 일이 되고 있었다”(‘시인의 말’)라는 읊조림은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가장 조용하고도 깊은 결론이다. 우리는 지금 “두렵고 흥미진진한 조정인 시의 미래”(최현식, 해설) 앞에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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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인의 시적 환상은 윤리적이다. 꿈의 세계에서 그의 자아는 여러번 나뉘고 겹치고 뒤집힌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지치고 슬픈 존재를 향해 위무의 눈길을 보내고, 연민의 노래로 슬픔의 여울을 달랜다. 폐가의 기슭에서 울리는 연민의 노래는 아리고 저리고 애잔하다. 모처럼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에도 그는 망설인다. 주저의 몸짓은 정직함의 다른 표현이다. 고통의 세상에서 마주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고 근심하는 표정이다. 그는 상식과 관념에 등을 돌리고 끝없이 질문하는 일을 운명으로 택한 시인이다. 끝없이 질문함으로써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려는 그의 언어는 그리운 모성의 손길처럼 우리를 따스하게 감싼다. 이를 통해 우리 시는 새로운 윤리 시학의 귀한 터전을 만나게 된다. - 이숭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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