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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너 종이 빵 기도 벽 종이 불행 상자 종이 창고 저수지 눈송이 불행 제2부 재단사의 노래 흑백사진 사탕 공장 고기 수치 싱크홀 눈의 아이 재단사의 노래 눈의 아이 흑백사진 식인의 세계 구두 불행 식탁 애도라는 외투 제3부 거미 여인 시인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시인의 죽음 종이 낭독 천사에게 단식 한 사람 공회전 사탕 개를 모르는 여름의 불행 제4부 감자의 멜랑콜리 창고 전향 망각 아들들 우리 모두의 애도 편지 빵 전향 들판의 상자 속에는 청춘 불행 작별 해설|서영인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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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후에 너는 사라지겠지.
사람들은 먼지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너는 먼지도 아니겠지. 백년 후에는 종이가 남고 글자는 사라지겠지. 사라진 너는 이름도 없겠지. 백년 후에는 풀과 벌레들이 있겠지. 벌레는 글자를 갉아 먹고 검은 글자를 닮은 풀들은 여전히 풀처럼 있겠지. 그리고 모르는 네가 있겠지. 풀처럼 네가 없는 노래를 영영 부르겠지. --- 「너」 중에서 앙상한 팔과 다리가 다 닳아서 한줌의 재가 남았을 때 흰 실에 칭칭 감긴 채 검은 밤에 잠긴 흐릿한 얼굴 (…) 입안 가득한 재의 맛을 알지 못한 채 너는 밤새도록 실을 잣고…… 어떤 노래는 하얀 실처럼 끝없이 흐르고 그것은 네가 지어놓은 잿빛 수의처럼 빛난다 --- 「재단사의 노래」 중에서 그 겨울에 우린 무엇을 하고 있었지? 너의 손을 잡고 걷는다. 비탈길 천천히 스며드는 저녁의 냄새. 골목은 어둡고 부서진 연탄재 가등 아래 낡은 구두 눈송이 같은 여공의 기침 소리. 누군가 방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면 세계가 빈 상자 속 눈동자처럼 흔들린다. 천장에 번져가는 검은 얼룩을 보며 우리는 다가올 장마를 걱정하지만 그 겨울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펄럭이는 빈방의 커튼, 살갗에 돋는 소름과 누군가의 텅 빈 입술. 나중에 우리는 헤어지게 되지만 아직은 손을 꼭 잡고 1970년의 겨울 속에 있다. --- 「흑백사진」 중에서 너는 무언가를 쪼개고 꿰매고 있다 밤새 무언가를 쓰기도 한다 커다란 외투를 만들려면 하룻밤이 필요해 죽은 이의 혀를 닦아내고 삼베옷을 입히듯이 조각난 것을 꿰매고 이어 붙일 시간이 시간의 앞면과 뒷면을 마주 보게 하고 어제의 얼굴과 햇빛과 오늘의 이야기를 이어서 커다란 외투를 만들면 밤새 눈물이 다 마르고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된다는 듯이 그 커다란 외투 속에 너를 숨길 수도 있다 누군가 벗어놓고 떠난 신발처럼 매끈한 피부처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도 외투에 넣고 이건 우리에게 무언가 남아 있다는 뜻이지 이런 생각은 언제까지나 너를 이곳에 머무르게 한다 너의 외투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 「애도라는 외투」 중에서 항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네게 종이를 한장 건네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음을 깨닫고 돌아보지만 너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이고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은 주머니 속에서 쓰디쓴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때 시계는 정지하고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에도 남아 있는 것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 네가 떠난 뒤에도 남은 것 어둑한 너의 눈동자처럼 아직은 있는 것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 ---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중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이건 기도하는 자세와 같구나 하지만 내겐 손이 없다 슬픔과 기쁨의 날개를 달고 뒤뚱거리는 늙은 새처럼 나는 울퉁불퉁한 얼굴로 눈을 감고 그건 어쩌면 기도하는 자세와 같고 아무려나 나에겐 손이 없으니 어느 날 꼭 맞잡았던 두개의 손 검게 벌어진 시간의 틈새로 흘러나간 건 기쁨의 젖은 입술인가 희게 굳은 너의 슬픔인가 죽기 전에 눈을 꼭 감은 채 나는 더 둥글어지고 조금 더 밤에 가까워졌다 --- 「감자의 멜랑콜리」 중에서 작별 인사를 하지 말자, 눈송이야 이제 사랑은 끝나고 작은 상자 속에 넣어둔 망각이 먼지에 덮인 채 검게 굳고 있다 어느 날 그것을 한점 떼어 입에 넣으면, 눈송이야 그건 오래된 음악, 흑백사진, 낡은 종이 위에 쓴 시 천천히 사라지는 너의 맨발 이제 죽음의 새하얀 혓바닥 위에서 희게 녹아버리자, 눈송이야 --- 「작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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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래는
하얀 실처럼 끝없이 흐르고“ 이기성의 시는 불행한 시대와 “새의 발가락처럼 검게 오그라든 영혼”(「창고」)을 위한 “희고 검은 애도의 노래”(추천사)이자 “희미한 근대의 냄새를 환기”하는 “검게 탄 입술의 노래”(「흑백사진」)이다. 이는 망가진 삶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성찰하여 이윽고 투명한 감각으로 발화하는 목소리로 나타난다. 안온한 풍경의 이면에 주목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도시의 아픈 과거를 발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것은 단지 기억의 환기가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이런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는 걸/너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시인은 간절한 심정으로 쓴다, “마지막 남은 손이 사라지기 전에”(「편지」). 망각의 기억 속에서 지난날의 슬픔과 상처를 끄집어내어 삶의 비애와 불의한 시대의 실상을 온전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시인은 꿈인 듯 현실인 듯 “검은 외투를 입은” 한 청년이 “검은 법전을 끼고 평화시장 쪽으로 걸어가는”(「눈의 아이」) 모습을 본다. “검은 밤에 잠긴 흐릿한 얼굴”들을 기억하고 “입안 가득한/재의 맛”(「재단사의 노래」)을 감각하는 한, 전태일은 단지 역사적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비참한 현실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시인이 불러내는 전태일은 비단 ‘1970년의 전태일’일 뿐 아니라 “커다란 접시를 들고 빵을 기다리는 사람들”(「빵」), “빌딩 옥상 망루의 농성자”(「싱크홀」), “맨발로 사라진 아이를 찾아서” 울며 헤매는 “도청 앞 누더기를 입은 늙은 여인”(「구두」) 같은 또다른 ‘전태일들’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고통과 상처를 망각한 채 “어떤 슬픔도 없이” 그저 ”조용히 먹는 일에 열중”(「식인의 세계」)하는 인간의 모습에 수치를 느끼며 시인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인간이?”(「고기」) 울부짖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앞장서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는 영혼들을 품기 위해 시를 쓴다. “시간의 앞면과 뒷면을 마주 보게 하고 어제의 얼굴과 햇빛과 오늘의 이야기를 이어서” “애도라는 외투”(「애도라는 외투」)를 짓는다. 흩어진 삶의 조각을 한땀한땀 연결하는 바늘이 되어 상실과 망각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인은 오늘의 현실에 드리워진 잿빛 “불행의 얼굴”(「불행」)을 냉철히 직시한다. 먼지처럼 쓸쓸히 스러져간 존재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 무언가를 오래 생각”(「창고」)하고, 고통의 세월이 흘러도 남아 있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애도는 늘 불완전하고 “애도의 매끈한 표면 아래 남아 있는 울퉁불퉁한 것들을 더 의식할 수밖에”(서영인, 해설) 없지만 그 거친 얼굴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영혼의 순수한 본질을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무언가 남아 있다”(「애도라는 외투」)는 가냘픈 희망을 다시 새기는 것은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인은 불현듯 “시인의 죽음”과 “시인이 없는 세상”(「시인의 죽음」)”을 말하지만 불행한 시대일수록 “회색 먼지와 재로 뒤덮인/오래된 종이”(「거미 여인」)에 시를 적는 시인의 존재는 선명하게 반짝인다.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한 시에 남아 있는 것」)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가 있다.”(시인의 말) 그 노래가 세상의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울려 퍼질 때, 선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영혼처럼 환한 빛”(「천사에게」)이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를 것이다. 시인의 말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어떤 세상이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둠 속 광장의 작은 불빛과 언어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오래된 노래들을 떠올린다. 먼 훗날 이 계절의 언어들 어떤 목소리로 되살아올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가 있다. 2025년 3월 이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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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성의 시엔 다정한 결기와 기품이 흐른다. 우리가 잃은 재단사의 삶과 목소리도 그렇다. 그래서 입은 사라져도 노래를 잃지 않았고 잃을 것이 없다. 시인이 “우리에게 무언가 남아 있다”고 한 그것 아닐까. 우리는 손을 잡고 희고 검은 애도의 노래를 영원히 이어 부른다. “시간의 앞면과 뒷면을 마주 보게” 해 이제 시간은 우리의 윤무와 후렴 속에 있다. 깊고 아름다운 세계가 짜이고 펼쳐진다. 노래에 물든다. “이해와 슬픔”이 같은 시공간을 겹겹이 머물며 살아갈 것이다. 시와 노래와 혁명과 종이만이 가능한 사랑의 윤리. 우리가 시인에게 받은 선물이다. - 김경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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