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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기수 지역
그해 여름 얼음 그 말 만지기 테두리에 사는 사람 작용 반작용의 법칙 꽃받침의 불안 수영장 무명의 화분 어린이날 미지, 사랑 빙점 송지호 해변 하얗고 둥근 고통 바니타스 내게 맞는 옷 불가능한 일 4인용 1인 식탁 축제 기수 지역 제2부 아사비케이시인 카비카 호스텔 집들이 현실재연극 기도하는 소녀 모래 얼굴 자각몽 명진탕 샤론 피아노학원 심야 파티 반대편에서 만나 화해 숲 가수면 신이 등장하지 않는 신 꿈 이상할 정도로 아사비케이시인 제3부 잇기로 있기 안부를 묻지 않는 편지 지탱의 밤 달리기 시합 피셔맨 매듭 기도 관성적으로 그래도의 마음 불참한 기억들 그곳은 그릇이 될 거야 지선버스 여름, 여름 아이 젖은 시간 말리기 보호색 작은 죽은 새 면이 되는 선 출력 오류 자정 시쓰기 모임 이 칸에 탄 사람 잇기로 있기 해설 l 김미정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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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에는 말하려는 것이 말해지지 않았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무언가가 훼손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해 여름에는 나를 죽였거나 내가 죽였던 사람들이 매일 찾아왔다 그들은 한꺼번에 와서 내 잠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흡수해 갔다 (…) 그해 여름에는 비명이 자주 들렸다 어떤 비명은 너무 아파서 입안에서 얼음 부서지는 소리로 덮기도 했다 그해 여름에는 잃기 쉽고 생기기 쉽고 꺼지기 쉽고 솟기 쉬웠다 얼음을 물고 매일 사랑을 다짐해야 했다 ---「그해 여름 얼음」 중에서 완전한 바깥이 되지 않기 위해 안의 끄트머리를 꼭 쥐고 걸었다 그가 있는 곳을 안에서는 바깥의 시작이라 불렀다 밖에서는 안의 끝이라 불렀다 테두리로 밀려난 사람이 있다 테두리에서 버티는 사람이 있다 같은 하늘을 머리 위에 두었다는 것이 유일한 안심인 사람이 있다 ---「테두리에 사는 사람」 중에서 진짜 자두의 맛과 자두 맛의 거리는 아득히 멀고 우리는 대체로 자두 맛을 붙들며 살아왔지 너무 싱그러운 것들은 징그러워 흉내 내는 일에 몰두했지 작고 거칠고 사라질 한알의 기쁨 ---「어린이날」 중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걸 것이 없어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흰 가오리연이 걸려 있는 가지뿐인 나무 아래에서 평생 하나의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무인도에 딱 하나의 물건만 가져간다면 단 하나의 초능력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일어난 적 없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마음 함께 좋아하는 노래는 후렴만 따라 부를 수 있다 ---「빙점」 중에서 당신을 흘려보낸 나는 어디를 통과하는 중일까 나 역시 태어나기 위해 죽어가는 중일까 반대편에서 만나 나는 흘러간 당신에게 약속한다 서로 다른 시간에 서 있더라도 관통해본 사람은 어디든 존재하는 법을 알게 될 테니 반대편에서 만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과 아직 죽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다 ---「반대편에서 만나」 중에서 신에게 도착한 가장 최근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아무도 안 믿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를 믿어보자 그는 신이 아니고 신 비슷한 것도 될 수 없지만 천국의 반대말이 지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인간이 했던 최초의 기도는 아마 사랑이었을 것이다 ---「기도」 중에서 흙에는 지금까지 죽은 모든 여자가 있고 연필의 몸은 그들의 품에서 자랐지 그러니 연필을 꼭 쥐는 것은 그들과 한꺼번에 포옹하는 방법 겹겹의 체온에 기대어 끈끈한 체액을 흘리며 침묵의 소리를 받아 적는다 이름의 뒷면을 옮겨 적는다 내가 가두었던 검은 머리 아이가 사각사각 나타날 때까지 ---「여름, 여름 아이」 중에서 가까운 이가 죽는 꿈을 꾼 날에는 무거워진다 내가 몰래 그의 죽음을 바라기라도 했던 것처럼 무거울수록 더 크게 웃고 많이 떠들게 된다 내가 드러날까봐 자꾸 가정법으로 말한다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은 말은 아무 말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소리에 가깝다 (…) 행복과 슬픔 중 하나를 신으로 삼아야 한다면 슬픔을 선택할 거라는 당신이 떠오른다 행복은 마침표가 되기 쉽고 슬픔은 반드시 시작점이 된다고 ---「보호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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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장면에
‘그래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자 『반대편에서 만나』에는 삶의 구체적인 장면이 많다. 송정원 시인에게 시쓰기란 기억을 쓰는 일이다. 시인은 기억이 된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축제」)을 예감하며 다정한 언어로 “쓴다 기억을” 그리고 “기억한다 쓰는 마음을”(「4인용 1인 식탁」). 그는 “풍경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눈을 젖게 하는 것”(「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며, “잘 본다는 것은/시력이 아니라 시선의 문제”(「그곳은 그릇이 될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채로도/간절할 수 있다는 걸”(「그 말 만지기」)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김미정은 “이름 없는 세상의 모든 감정, 존재, 사건, 운동에 ‘그래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에 주목하며 이 시집을 “보이지 않게 움직이며 변이하는 세계를 미세하게 감각하고, 사라짐과 멀어짐을 다른 마주침으로 발명하며, 사라질 얼음을 물고 매일 다시 사랑을 말하는 나-너들의 이야기”(해설)라고 평한다. 타자와의 연결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지금, 송정원 시인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 있더라도/관통해본 사람은 어디든 존재하는 법을 알게 될 테니/반대편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그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과/아직 죽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유일한 약속”(「반대편에서 만나」)이며,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방식이다. 사라지는 말을 붙드는 다짐, 경계의 불안을 어루만지는 마음, 삶의 순간들을 끌어안는 넉넉한 품. 실패가 예견되어 있지만 “그래도”(「그래도의 마음」) 계속 나아가는 시인의 걸음걸음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