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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경청
반양장
이민하
창비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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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희곡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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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계절 ·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뜻이지

홀(hole)
사랑의 역사
검은 책
내가 죽었던 의자
사월에 감은 눈은 사월에 다시 떠지고
지그소
혼자와 함께
공감각
언니의 숲
우리가 시인이었을 때

제2계절 · 아프지 않으면 침묵할까요?


해변의 수인
홀로(holo)
검은 제복의 아침
테이블
개구(開口)맨
식물도감
내가 살았던 의자
밤과 시
여름의 끝
이 터널 선샤인

제3계절 · 당신이 나의 저자입니다


무엇
9201
크래커
옛날 영화
꿈속에 혼자
북의 기원
T-maze
일인용 식사
지구인
밤의 원주민
엑스트라가 주인공인 영화의 엑스트라들

제4계절 · 그러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의 귀일까


우울과 경청
영향력
신세계
벽에 갇힌 사람들
진홍의 왕
신비주의
지박령
복도와 그림자
12월 3일
제너레이션

제5계절 · 다음엔 우리 얘기만 해요


라이터
동시대
살과 뼈
마른 탯줄을 목에 감고
옛날 귀신
흙과 물
내가 없는 시간 속에서
우주의 한 점으로서 바라본 우주의 깊고 고요하고 무궁한 흰 발자국
영원
자연의 것

해설|전승민
시인의 말

저자 소개 1

1967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2000년 [현대시]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 등이 있다. 2012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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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1월 03일
판형
반양장 ?
쪽수, 무게, 크기
192쪽 | 216g | 125*200*10mm
ISBN13
9788936425265

책 속으로

물과 물이 붙어 있었다. 어둠과 어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사람이 촛불을 들고 들어갔다.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홀(hole)」 중에서

아무리 천천히 먹어도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수학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행인에게 물어보니 폐교라고 했다

텅 빈 운동장을 다시 가로질렀다
흘리고 온 이름표라도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 「내가 죽었던 의자」 중에서

혼자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멀리 혼자와 떨어져 있었다. 너무 오래 혼자였다. 눈물을 말리려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의 빛바랜 줄무늬들이 하얗고 두껍게 칠해지고 있었다. 나는 잠깐 멈추었다. 알 수 없는 음악이 흘렀다. 혼자도 나를 보았는지 화들짝 페인트 통을 엎지른 것 같았다. 머리 위로 흰색이 쏟아졌다. 첫눈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 「혼자와 함께」 중에서

나는 거의 직후다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유랑단처럼 떠돌아다니는
나는 나의 합창단이다
나의 오른쪽이 입을 열면 왼쪽이 침묵한다
우리 사이엔 비밀이 많다
절반의 멤버는 목소리가 없다
죽은 척과 죽지 않은 척 사이에서
그러나 나는 모두 기립해 있고
--- 「홀로(holo)」 중에서

텅 빈 운동장을 다시 가로질렀다
두고 온 일기장이라도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손에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
모두들 다른 열쇠를 쥐고 떠났을까
사물함의 수만큼 각자의 교실이 있는 것일까

기억 속으로 들어가 빛바랜 일기를 읽고 있는데
혼자 숨어 있던 짝꿍이 속삭였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교탁 아래서

오늘 당번은 누구지?
아무 말 없이 나는 또 검은 칠판을 지웠다
--- 「내가 살았던 의자」 중에서

우리를 부르며 우리를 향해 우리 속으로 달려갔어요
젖은 해변에 누워 주고받는 인공호흡처럼
티끌 없는 마음과 다만 한걸음

벽이 닫히면 틈이 열리고

우리는 문득 밤에 가까워지고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알 수 없는 문장처럼
한번도 꾸지 않은 꿈처럼
--- 「이 터널 선샤인」 중에서

어떤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숲속을 달리는 아이들과 반짝이는 꽃과 열매
명랑한 토요일의 구름과 함께

해가 지도록 아이들이 뛰어다닌 건
숲이 아니라
숲속에 깃든 무엇
--- 「무엇」 중에서

그러면 천사가 땅에 닿을락 말락 땅거미를 끌면서 물을 주러 왔지
눈에서 잎사귀가 피어나면
어른이 되는 거란다 몸의 계절이 시작되는 거지
이건 비가 오는 밤 내가 지어낸 천사 이야기
--- 「밤의 원주민」 중에서

오늘은 무너지듯 폭설이 오고
사람들은 외국어처럼 겉돌아서
나는 귓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끝없는 복도에는
베낄 수 없는 문장들이 달빛도 없이 흐르고
바람도 없이 흘러서
이야기는 혼자서도 흘러가는데
--- 「우울과 경청」 중에서

멍하니 시간만 읽던 사람들이 뒤따라 나갔다
부싯돌 같은 눈빛들을 이리저리 부딪치며
건물 뒤편 희뿌연 잿더미 옆에 기대어

불을 건넨 사람과 불을 붙이는 사람 사이로 꺼질 듯
꺼질 듯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 「라이터」 중에서

그런데 말이야
시골 외갓집 창고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곤 했어
혼자서 노는 꿈속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귀신이 우는 거라고 사람들은 달아났지
난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 「옛날 귀신」 중에서

출판사 리뷰

“죽은 사람들은 죽어서도 할 말이 남아서
꿈속의 빈 의자를 찾아다니고”

제목 그대로 ‘우울’과 ‘경청’은 이번 시집을 꿰뚫는 가장 적확한 단어라 할 수 있다. 시인에게 ‘우울’은 단순한 슬픔의 감정이 아니라 일상의 부조리를 감지하는 감각이자 타자의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는 윤리적 감수성이다. 시인은 “지난겨울의 천재지변과 누구나 아는 재앙 같은 것”(「진홍의 왕」)을 노래하면서도 “우리는 웃었다 믿음이 마르지 않았다”(「지그소」)라고 말한다. “밤낮 없는 암흑천지와 누구나 앓던 우울 같은”(「진홍의 왕」) 절망의 이야기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의 기운, 그것이 시인이 말하는 우울의 진짜 얼굴인 것이다. 당신의 슬픔에 귀 기울이고 슬픔을 함께 견디며 살아가는 우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타인의 목소리를 향한 ‘경청’이 놓여 있다. “귀를 기울일수록 못 들은 말이 늘어나고”(「우울과 경청」) “밤이 계속되자 경청이 직업이 되었다”(시인의 말)는 문장처럼, 시인에게 있어 경청은 단순한 청취가 아니라 고통받는 타자의 목소리에 몸을 기울이는 행위, 타자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윤리이자 곧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시인은 “나사처럼 천천히 숨을 조여오는 공포”와 “꺼지지 않는 어둠 속”(「공감각」) 저편에서 들려오는 “절뚝거리는 목소리”(「우울과 경청」)를 포착하고 이에 마음을 쏟는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귀신이나 천사, 지박령, 고양이 같은 비인간 존재들과 여자, 아이, 엑스트라 등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적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택한 세계와의 연대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 이들은 단순한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의 폭력에 가장 먼저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의 주체이다. 이처럼 작고 약하고 여린 존재를 통해 세계의 폭력을 응시하는 시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먼저 울고 먼저 듣는 자들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경청의 시학을 완성한다.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뜻이지.”
기나긴 밤의 복도를 따라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목소리


전작 『미기후』에서 “세계적인 우울과 각자의 기후 속” 살아가는 인간의 사랑을 노래한 시인은 이번 시집 『우울과 경청』에 이르러 “삶의 고독을 너무나 잘 이해하면서도 그 고독이 결코 나만의 일로 그치지 않”(황인찬, 추천사)도록 우울을 통해 타인의 슬픔을 껴안고, 경청을 통해 서로에게 접속하고자 한다. 시인은 “죽음 앞에서 손 붙잡고 할 수 있는 것,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니까”(「우울과 경청」)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어두운 쪽으로 손을 뻗는다. 그것이 이민하의 시가 지향하는 공감과 환대의 윤리이자, 삶을 지키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이름들을 기억하는 행위”(전승민, 해설)는 결국 “잊지 않겠다는 뜻”이며 “사랑한다는 뜻”(「사랑의 역사」)이 된다. 세계의 어둠을 견디는 모두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며 “죽지 말아요/오늘은 죽지 말아요”(「제너레이션」)라 되뇌는 이민하의 주문은 기나긴 밤의 복도를 가득 채우며 투명하게 울려 퍼질 것이다.

시인의 말

내 영혼의 그림자에 댓글을 다는 인생입니다만

밤이 계속되자 경청이 직업이 되었다
귀를 벌리고
다음엔 손을 벌리고

문(文)이 열린다

한 우울이 들어온다
깍듯이 의자를 빼드린다
거울처럼 마주 앉아

두 우울이 운다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2025년 10월
이민하

추천평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정동, 슬프면서도 밝고 가벼운, 이상하고 아름다운 밤의 시편들. 마치 꿈만 같고, 또한 환상 같지만 이민하의 시가 매우 분명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감하게 된다. 그의 섬세함과 예민함은 삶의 복잡한 결을 독특한 미감으로 구현해내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 삶의 비의와 폭력에 매우 민감한 천성을 지닌 까닭이리라. 귀신들, 고양이들,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여러 주역 아닌 존재들이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연유라 할 수 있겠다. 약한 것들은 섬세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삶을 지키는 방식이니까, 꿈과 환상은 약한 존재가 세계의 폭력을 견뎌내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려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바꿔낼 힘이 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민하의 시는 우리 삶의 약한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며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 나는 그의 시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깊게 사랑한다.

그의 시는 삶의 고독을 너무나 잘 이해하면서도 그 고독이 결코 나만의 일로는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울’과 ‘경청’은 이민하의 시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두 단어가 된다. 이 삶의 슬픔을 가슴 깊이 지닌 채로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기, 그리하여 당신의 슬픔을 함께 나누기. 그 다정하고 서글픈 말하기가 약하고 여린 우리에게 이 세상을 견딜 힘을 나누어준다. 시인이 내미는 그 손에, 건네주는 귀에 기꺼이 마음을 내주고 싶다. - 황인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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