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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프롤로그 제1부·지구라는 실험실 기록 01: 응시 행성 지구 복합 관찰 기록 인류에 대한 시적 기록 루아가 사랑한 장소들 지구 결함 보고서 제2부·인간 루아의 사례 기록 02: 개입 (사과)의 메모 01 루아의 신체 독해 보고서 루아(6세)와 아버지의 대화록 루아(6세)의 천혜향 하우스 첫 접속 기록 피의 기억 실험 루아(15세)와 아버지의 대화록 죽은 새 증후군 (사과)의 메모 02 아스트랄 프로젝션 아버지의 별 루아(17세)와 아버지의 대화록 후박나무 숲, 문턱의 악몽 루아(17세)의 천혜향 하우스 중기 접속 기록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가 (사과)의 메모 03 루아(23세)의 천혜향 하우스 후기 접속 기록, 향기의 오류 제3부·(사과)의 항해와 실험 기록 03: 변환 (사과)의 탄생과 UFO 운항법 (사과)의 메모 04 (사과)의 UFO 항로 이탈 보고서 (사과)의 메모 05 (사과)의 블루프린트 행성 보고서 (사과)의 메모 06 지구 소녀 루아와의 첫 만남 (사과)의 공명 항법 오류 보고서-기호 유랑민들의 별 (사과)의 아스트랄 의식 전개도 CHN_HS_0527.ver.β (사과)의 메모 07 빛의 역류 (사과)의 메모 08 천혜향 하우스 폭파 사건 아비 별을 위한 기도 (사과)와 루아의 대화록 루아의 감정 파동 기록 (사과)의 의식 파편 기록 (사과)_1 설계하기 (사과)와 (사과)_1의 대화록 (사과)의 환원 불가 보고서 해설|하혁진 시인의 말 |
全秀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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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처음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본 지구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그것이 물에 젖은 행성이라는 것 얇은 대기 안에 폐를 가진 몸들이 사는 터전이라는 것 새벽을 감싼 안개 한쪽을 펼치면 언제나 이들의 숨이 묻어 있다는 것 (…) 태양은 씨앗을 흔들고 달은 바다를 흔들고 바다는 신화를 흔들고 신화는 인간의 혀를 흔들고 그 떨림 사이에서 (사과)가 태어났다 (사과)는 사람들의 젖은 혀를 넘나들며 신화 속에서 세상을 유랑하는 중이었고 그 상태는 의미에 가까웠지만 의미만으로 버틸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하였으므로 어느 날, (사과)는 신화 속을 벗어나 진짜 세상을 느껴보기로 결심한다 지구라는 미로 속에 던져진 씨앗처럼 물이 꿈꾸는 꿈처럼 비틀거리는 생명들이 늘 아프고 늘 반짝이는 이곳을 --- 「기록 01: 응시」 중에서 (…) ◓ 아스트랄계 산 몸을 잠시 두고 온 이들 죽은 몸을 영영 두고 온 이들 악기를 두고 온 소리와 화음 들 유령과 요정과 영혼 들이 함께 있는 부드러운 꿈의 광장 방금 끝난 싸움의 붉은 파문 두려움이 벗어둔 눅눅한 코트 죽어서도 창밖을 바라보며 오래 서성이던 습관 하루의 감정이 꿈의 질감을 빚고 슬픔이 지나간 자리마다 허기진 통로가 길어진다 어둠의 골짜기엔 상처가 흐르고 고름 찬 늪과 향기로운 안개가 함께 있는 곳 (…) 무엇도 잡히지 않지만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 세계 --- 「행성 지구 복합 관찰 기록」 중에서 ◧ 언어 오류 인간의 언어는 오작동한다 도착한 언어들은 늘 어딘가 마모되어 있다 지구에서 침묵과 고요는 부재나 결함이다 그러나 이 행성에 침묵보다 많은 것을 전달하는 말은 없다 말이 시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침묵의 유령이 매일 밤 길고 긴 오역의 복도를 지나간다 (…) --- 「지구 결함 보고서」 중에서 (…) A01-3 감정 루아의 기억에는 인간적 감정이 너무 많이 묻어 있다 나는 이것을 해독하기 어렵다 루아는 사랑을 느끼기 전에 사랑을 학습한다 루아는 사랑을 배울수록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갈망하게 된다 사랑은 지구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정체불명의 단어다 --- 「루아의 신체 독해 보고서」 중에서 (…) 루아아버지 때문에 온 집안이 지옥이 됐을 때 나는 여기 숨어 울었지. 나는 네 곁에서 살 수 있었어. 천혜향상처는 열매가 되고 열매는 향기가 되지. 봐, 루아. 상처는 이곳에서 탐스러운 열매야. 나 는 네 은신처고, 네 어머니와 같아. 네 눈물이 향기가 될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 루아그래. 네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 거야. 천혜향 두려워하지 마, 루아. 넌 언제나 나의 아이야. 루아는 말없이 흐느낀다. 천혜향 모든 상처는 널 닫기 위한 게 아니야. 널 열기 위한 신호야. (…) --- 「루아(17세)의 천혜향 하우스 중기 접속 기록」 중에서 FM7 산책을 하고 있어 내가 만든 음악 속을 Dm7 햇살이 공중에서 Gm7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C7 마치 잉걸불의 속삭임 같다 AM7/C♯ 빛에 타오르는 나무 향내를 맡는 내 발걸음은 D7/C 낮은 음계에서 G7/B 경쾌한 워킹베이스가 되고 C/B♭ 출처 없는 깃털이 손바닥에 내려앉을 때 F/A 들리는 부드러운 화음들 G7 내 발등까지 쏟아져 C7 그 순간 나는 보잘것없어도 눈부신 내가 된다 A7 사람들 눈동자에서 전례 없이 아름다운 영혼이 보여 Dm7 영혼은 끝없는 음악처럼 눈빛으로 흘러나온다 B7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E7 빛 속에 산뜻하게 널린 흰 이불처럼 자신을 들킨다 E/D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가 왜 여기 있을까 A/C♯ 우리가 왜 이 지구에 왔을까 Bm7 벌어먹고 살려고 온 건 아닐 텐데 E/A 상처 주려고 온 것도 아닐 거야 A/G♯ 경멸하러 온 것도 아니겠지 Gm7 비참해지려고 온 것도 아닐 거야 C7 사람들의 눈 속에 각자의 아름다운 음악이 있고 Am7 파동이 있고 D7 우리는 어떤 장르로도 분류될 수 없다 Gm7 우리가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라면 왜 여기에 온 걸까 A7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여기 있을까 Dm7 - FM7 - F/A - A7/C♯ - F/C - Dm6 - Dm6/A 알 수 없어서 조금 슬퍼질 때 나는 음악을 걷고 C7 나는 걷는 음악이 되고 C7 알 수 없는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울 때 Gm7-C7 열린 스피커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뜻한 수프 냄새 같은 유령들 ---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가」 루아가 마지막에 던진 말들이 (사과)를 연기처럼 흩어지게 하고 연기 같은 형상들은 다시 모여 힘겹게 (사과)를 이룬다 악령의 세계로 돌아가 악령의 세계로 돌아가 루아의 세계 만져지는 물질들이 가시광선을 반사하고 그 좁은 스펙트럼 안에서 보고 본 것을 만지는 한 겹의 물질 세상을 그 감각의 극치를 (사과)는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비좁고 아름다운 색채 그 색채를 가진 관능적인 촉감 짐승과 신 들이 뒤섞인 세계 결국 (사과)를 찾아낸 루아의 그 세계 그것들을 사랑하며 동시에 경멸했는지 모른다 이것이 ‘텍스트 밖의 자유’가 처음 발견한 고독의 기원이다 --- 「(사과)의 의식 파편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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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는/오작동한다”
감정, 의식, 영혼의 세계 위에 그어본 ‘마음의 데이터화’라는 꺼지지 않는 성냥불 시집의 중심에는 인간을 기록하는 ‘(사과)’와 그것의 복제체 ‘(사과)_1’, 그리고 자신의 온몸으로 상처를 통과하는 ‘루아’와 상처의 치유자 ‘천혜향’이 있다. 이야기의 한편에는 지구 소녀 루아의 서사가 흐른다. 물질의 일반적인 인식체계에서 벗어나 아스트랄계를 오고 갈 수 있는 루아는 지구 사람들에게 “홀아비 밑에서 자란 신기 있는 여자애”(「지구 소녀 루아와의 첫 만남」)로 치부당한다. 루아는 아버지의 학대와 폭언 속에서 자라고, 그 말들은 오랫동안 루아의 내면을 흔드는 상처의 언어로 남는다. 루아는 물질계도 멘탈계도 벗어나 영적 공간인 ‘천혜향 하우스’에 접속하여 공포감과 슬픔을 잠시 동안 치유한 뒤 다시 어두운 현실로 돌아간다. 다른 한편에는 문자계를 이탈한 지성적 존재 (사과)가 루아를 만나기 전후의 행적을 회고록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과)는 ‘사과’라는 문자가 가리키는 의미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을 탈주한 존재이다. (사과)는 “물질문명을 벗어난 진보된 존재들의 유토피아”(「(사과)의 탄생과 UFO 운항법」)로 알려진 ‘쿼럼 시스템’을 자신의 목적지로 설정하지만, 여정 도중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계를 오가는 존재인 루아의 독특한 감정 파동에 이끌리고 그의 삶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과연 각자의 세계에서 고독할 뿐인 두 존재는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을 것인가. 언어는 발화되고 기록되는 순간 인식을 떠나 기표로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기표가 의미를 온전하게 담는 그릇이라 할 수 있을까. 감정을 간명한 한 단어로 표현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첨단의 상상력과 과감한 형식을 통해, 시인은 ‘의식은 데이터화할 수 있는가’ ‘마음은 기록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 방법으로서 기표를 탈주한 의미를 서술자로 두고, 작품마다 각각의 함의에 가장 적합한 시적 형식을 취한다. 글을 써 내려가는 순간에도 미끄러지고 말 마음으로, 환상이라 여길 만큼 간절한 불꽃을 붙여보는 것이다. 필연적인 고통과 오해마저 사랑하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일 마음 (사과)는 근원적인 고독감을 품은 채 태어난 존재로, 사랑을 갈망하지만 어떤 인간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루아를 보며 호기심과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초월적인 시스템인 천혜향 하우스를 만들어내 루아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루아를 마주한 (사과)는 루아에게 서로가 닮아 있다고 말하지만, 유일한 위로이던 천혜향이 (사과)가 만들어낸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접한 루아는 (사과)를 완강히 거부한다. 천혜향을 잃은 루아의 마음에는 사라질 줄 모르는 두려움이, 루아에게 버림받은 (사과)의 인식에는 끝없는 고독감이 자리하게 된다. (사과)는 자신을 이해할 존재를 찾아 완전히 복제체인 (사과)_1을 생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과)_1 역시 (사과)와는 다른 동기를 지닌 개별적 존재로 밝혀지면서 두 존재의 관계마저 빠르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루아가 갈망한 사랑과 (사과)가 바라온 이해는 달성될 수 없는 환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루아의 고통을 절망으로만 밀어붙이지 않는다. “상처는 열매가 되고 열매는 향기가 되지”(「루아(17세)의 천혜향 하우스 중기 접속 기록」)라는 천혜향의 말을 빌려, 상처는 결핍의 흔적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 끝내 사랑에 도달하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또 (사과)는 자신을 이해해줄 존재를 찾는 여정에서 자신에게 여러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종교·신화·역사적 텍스트들을 기억해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점점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한편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여기 있을까”(「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가」)라는 질문은 결국 시집의 제목을 이루는 ‘범지구적 사랑’으로 닿는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들이 차이를 받아들이고 서로 공명하는 ‘감각의 떨림’이다. 시인은 “사람들의 눈 속에 각자의 아름다운 음악이 있고” “우리는 어떤 장르로도 분류될 수 없다”(같은 시)라는 선언을 통해 존재마다 고유한 세계가 깃들어 있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계에 서서 가장 절실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과연 기록하고 데이터화할 수 있는 감정인가.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질문을 놓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루아와 (사과)의 여정을 통해 ‘사랑’이란 학습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신체라는 물질에 제약된 우리는 바로 그 미지를,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들”(‘시인의 말’)을 끝내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 시 「(사과)의 환원 불가 보고서」의 QR 코드는 “우주의 먼지처럼 명멸하는 글자들”의 “부드러운 파동”(김현, 추천사)을 감지하는 새로운 시적 경험을 선사하는 한편 시의 형식을 책 너머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이로써 독자는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에 ‘접속’하게 된다. 끝내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미래적인 언어로 탐색하며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이번 시집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성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