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1993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문학이 필요한 시절』이 있으며 김수영 해설, 연구서인 『리얼리스트 김수영』과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등을 펴냈다. 2020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은 결국 이순(耳順)의 시집이다. 존재하는 것들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최대한 낮추어보는. 그래서 실린 작품들이 순하고 잔잔히 흐르는 물결 같은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경이 앞에 설 줄도 안다. “삶에 떠밀려 땅끝까지 오면 외려 그 키 큰 바다가/ 나를 막아선다 내 마지막 보루(堡壘)처럼/ 나를 육지로 밀어준다 저 바다가”.(「아직도 바다는 키가 크다」) 경이의 순간은 지배나 상승 의지로 충만해 있을 때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낮고 작아지는 길에 들어섰을 때 불현듯 방문을 받는다. 비만해진 앎을 버리고 어두운 모름에 귀를 기울일 때!
백기동의 이 시집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 인간이 자신을 치유하는 순간들이 담겨져 있다. 시는 세계를 치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치유하게도 한다. 몸의 상처는 직접적인 수술이나 투약을 통해서 치료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말’의 읊조림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백기동은 월포 앞바다와 대화를 하면서 그것을 행한 듯하다. 모든 대화는 결국 자기와의 대화다. 자기와의 대화가 수반되지 않는 언어는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명령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시는 바람이나 희구일 수는 있어도 명령은 아니다. 바람이나 희구를 우리는 때로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백기동에게 희망이라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것”과 “내일을 볼 수 있는 것”(「희망과 소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에 상처 입은 존재를 치유하는 것 아닐까? 말하기 쉽지 않지만, 백기동은 바다를 찍고 바다의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살아 있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것 같다. 됐다. 누군가에게 시는 이 정도만 되어도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