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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1부 시를 심는 사람들 양승분이 흙에 시를 심고 있다 그까짓 것, 것들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감나무 몇 그루 서 있는 집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만나 보니 우리의 사부들은 마중물과 쉼표 동거 살아서 하늘을 만났으니 2부 환하고 맛있고 즐거울 겁니다 텃밭 공화국에서 청소해 주고 밥해 주고 머리 감겨 주고 폐지 값과 시 값 만인에게 기본소득을 귀촌을 묻는 당신께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 봇짐 3부 방주에 실린 해피랜드 한 사람이 왔다 간 자리 모든 언더그라운드를 위해 건배 오늘 하루 문학이라는 말조차 잊고 한없이 기쁘고 가벼웁게 난 엉덩이만이 아니야 방주에 실린 해피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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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서 버스로 40여 분 거리에 있는 여기 사구실 마을 사는 동안, 이웃의 정이 이런 거구나 싶고요, 사는 게 이렇구나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이웃들이 돌아가며 나를 비춰 주는 입체적인 거울 같다고나 할까요. 도축장에서 장화 신고 곱창 밟으며 추었다는 ‘곱창 블루스’를 여기서 배웠고요, 겨울 견디고 파릇파릇 돋아난 시금치에 부추를 올려 자작자작 풀죽 넣으면 담백하고 구수한 물김치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
사람이 사람을 피해야 하는 팬데믹이라는 기이한 상황에서야 근대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들을 듣습니다.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후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 들어서고야, 우리 삶과 환경과 정치·경제와 의식을 바꾸는 생태문명의 길은 대지에 기반한 민중적 삶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대지의 상상력은 흙에 젖줄을 대고 살아가는 몸들에 새겨진 언어라는 걸 말이지요. ---「책을 펴내며」중에서 문맹의 언어는 흙과 닮았습니다. 시 안 쓰는 시인들의 말을 받아 적는 동안 저는 흙이 되고 문맹이 됩니다. 말한 게 다인 말이고,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듯싶은 미안한 말입니다. 저잣거리의 언어를 사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지나갑니다. 일부러 단어를 찾아다닐 건강을 타고나지 못한 저는 사는 곳에서 그냥 시어를 주고받습니다. 평생 농사짓고 사는 분들과 이웃해 살며 김치니 동치미니 나물이니 사철 내내 얻어먹고 살면서, 저는 땅에 묻혀 있는 시, 미래의 씨앗들에게 질문합니다. --- pp.73~74 제게 시는 흙에 내맡긴 초목의 수액과 닮았습니다. 소멸이라는 브레이크와 삶이라는 액셀 사이, 하늘과 땅을 잇는 돛단배가 출렁거립니다. 희디흰 한 필의 옥양목에서 한없이 풀려 나오는 노래를 달고 노래가 스미지 못하는 사막을 건너갑니다. 더 이상 원초의 상태로 남아 있지 않은 바다, 천공에 떠 있는 지구라는 배는 이미 난파되는 중입니다. 몇 조각 남은 널빤지 위에 올라서서 저는 가까스로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 노래는 액체로 흐르고 아직 부를 노래가 남아, 모음뿐인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여러 해 죽을 고비를 넘고 농담처럼 살아남은 저는 신의 음식, 신음을 달게 들이킵니다. 농담처럼. --- p.93 흙에 에워싸여 산 지 12년, 이제 제 주제를 깨닫게 되었으니 여러분께는 ‘백수 농법’을 추천합니다. 백수 농법은 우정을 가장 높이 받들어야 가능한 농법인데요, 이 집 저 집 다닐 넉살은 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백수’는 창백한 지식인의 손이 아니라 백 개의 손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손 하나 빌리는 것도 아쉬운 봄가을 바쁜 때 어느 집이 더 손이 필요한지 알아차리는 안목도 필요하고요, 내 소유가 적어야 가능한 방식이죠. 내 할 일이 너무 많으면 바로 옆집에서 불러도 부담스럽잖아요. --- pp.137~138 저처럼 느려서, 새로운 것과 낯선 것을 쫓는 게 힘이 드는 사람들에게는 공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저는 오래 만나 온 사람들과 오래된 물건이나 고전적인 것에 매료당합니다. 망태기나 덕석이나 항아리 같은 것들 말이죠. 못에 걸린 수놓아진 낡은 횟대보나 어릴 때 사랑방에서 동네 언니들과 나눠 먹던 군고구마와 동치미 맛을 잊지 못합니다. 여름날 마당에서 배터지게 먹고 짚으로 짠 멍석 위에서 바라보던 별과 달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죠. --- pp.199~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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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심는 사람들”
― 위대하고 사소한 일들에서 발아하는 ‘시’ “위대한 일들이 저기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 콩들과 깻잎과 동글동글 유난히 예쁜 땅콩들이 내 입으로도 들어올 겁니다. 저 노동과 환대와 우정을 먹고 제 몸이 차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초저녁 바람에 밭 위에도 구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위대한 일은 “씨앗을 뿌리는 일”이나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같은 사소한 일들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땅과 이웃들의 주름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했던 시인은 자연과 이웃들의 친절과 대가 없는 보살핌 덕분에 ‘생각’에 찌들곤 하는 자신의 “영혼에 빈틈이 생기고” “그 빈자리에서 시가 발아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양승분 씨를 들여다보면 시인 같습니다. (…) 시인은 명사라기보단 형용사나 부사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시야말로 동사인지도 모릅니다. 시적인 삶, 혹은 시적인 태도로 나와 이웃과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시인 아닐까요. 그러니 양승분 씨야말로 진짜 시인입니다.” 새벽부터 가마솥에 콩을 삶아, 잠 깨길 기다려 현관문 두드리는 구부러진 손가락, “복지관에서 갖다주었다는 국수와 함께 두부 두 모 꼬옥 쥐어 주는 굽은 손”에서 시인은 ‘시’를 발견한다. “삐그시 부침개 접시를 내미는 흰 부추꽃 같은 묵음의 말”, “먹어 봐 달지, 묽은 감 입에 넣어 주는 가만한 말”, “잘 자랐네, 이쁘네. 왕고들빼기와 쇠비름, 개망초도 어루만지고, 삭아 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서로 엉겨 붙은 말들”은 시인을 먹이고 살렸으며, 이제 시가 되고 산문이 되었다. “여기 살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책이 되었습니다. 밥 먹으면서 듣고, 마늘 종자, 양파 모종 심으며 듣고, 김매면서 듣고, 마을회관에서 해바라기하며 들었습니다. 듣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명이 시시각각 자라나고 열매 맺고 스러져 가는, 이 대지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가장 단순하고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삶들이 귀하고 위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자리는 환하고 맛있고 왁자지껄 즐거울 겁니다” ― 환대와 우정, 삶에 대한 사랑 “저를 먹여 주고 가르치고 보살피며 희망을 주고, 나눔과 우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한 내 이웃들과 친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제 밭을 무료 급식소로 사용하면서 임대료 없이 세 살며 날마다 노래 불러 주는 명랑한 참새들과 텃밭의 모든 작물과 풀들께도요.” 농촌 공동체의 환대와 우정 속에서 몸과 마음을 보살피며 살아온 시인의 산문에는 “땅속에 묻힌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뼈만 앙상한 역사 속에서 숱한 사람들의 속담과 이야기와 수수께끼와 노래”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또한 시인은 환대와 우정 속에 더 많은 이들이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농촌 정경을 떠올린다. “보다 깊게 사랑하고 창조하며 공짜로 파견된 이 지구에 희망을 피워 내는 일에 몰두”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는 미리 백수를 선언합시다. 손이 백 개나 되니 할 일 참 많다고 즐거워합시다.” 흙에 젖줄을 대고 살아가는 존재들, 세상의 바닥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인의 산문은 삶을 대하는 진정 어린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은 말한다. “나도 잠시 이 지구상에서 동거하다 갈 겁니다. 기왕이면 동거하는 동안 서로 어루만지며 나누며 살다 가고 싶습니다. 그런 세상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거의 회복되지 않을 만큼 인간이 망가뜨린 지구 한 모퉁이에서 저는 잠시 쉬어 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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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가 2012년에 써낸 민중열전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읽으면서 감동으로 찌릿하고 감탄으로 짜릿했던 생각이 난다. 얼핏 주말연속극 제목 같기도 한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저자의 ‘찐’ 마음에서 우러난 제목임을 절감했었다. 이후 김해자 시인에 대한 우애의 마음에 경애의 마음이 더해졌는데, 이번에 내는 책에 추천사를 쓰라니 영광이다. 15년째 농촌에 살면서 시인이 겪은 사람과 자연, 그리고 그 밖 세상 이야기가 감칠맛 나게, 때로는 경건하고 숙연하게 펼쳐진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썼을 뿐인데, 일상이 명상인 듯 이토록 시의 향기가 따끈따끈 두근두근 물씬물씬한 산문이라니.
“저 노동과 환대와 우정을 먹고 제 몸이 차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뼈가 삭도록 일하면서 농촌을 지켜 온 ‘언니들’이 팔십 넘도록 살아가는 이야기들. 호미질 하다가 불쑥 나타난 지렁이에 질색해서 얼른 흙으로 덮어 두던 사람이 이제는 지렁이가 놀랄까 봐 덮어 주게 됐다는 것, 두엄 더미에서 싹 틔운 아몬드 씨앗이 몇 달 새 부쩍 자라 시인보다 키가 크다는 것 등등 옮기고 싶은 글귀가 어찌나 많은지.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섬세한 필력에 나는 새삼 감탄한다. 김해자는 나보다 아프면서 나보다 강하구나. 맑은 영혼과 건강한 정신의 증표인, 이렇게 평온한 멜랑콜리에 찬, 평범한 삶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널리 읽혀서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길 빈다. - 황인숙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