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경 시에는 특이한 리얼리티가 있다. 현실을 반영하는데, 몽환적이다. 그는 이미지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어디서 이렇게 끊임없이 이미지가, 그리고 이야기가 솟아 나오는 걸까.
“검은 액체가 항해하는 내 몸의 항로가/지도 위에 남은 흐릿한 흔적처럼 선명해요”(「항로를 그리던 시간」).
“흐릿한”데 그토록 “선명”해서 그 “흔적”, 이미지가 샘솟는 걸 멈출 수 없네. 선병질적으로 집요한, 그것은 도망일까 추격일까. 환상일까 현상일까.
그의 시들은 내게 ‘평행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흐르는 강물이 수많은 물결로 이루어져 있듯, 땋아지고 풀어헤쳐지는 겹겹의 존재, 겹겹의 삶. 마치 흩어진 존재의 파편들이 완전체를 지향하여 나아가듯 거침없는 박혜경 시의 언술을 보면, 내 시와 사고가 얼마나 진부한가, 얼마나 낡았나, 절감하게 된다.
시집 속의 어떤 문장은 일렁거리고 어떤 문장은 출렁거린다. 그렇게 견결하고 선명한 시퀀스가 하나둘 태어난다. 박혜경의 상상력, 즉 영혼의 세계는 풍요롭고 섬세하고 신비하다. 그런데, 그 시를 읽으면 가슴이 저릿하고 쓸쓸해진다. 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