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삽사리문고 읽다 까무룩 잠들면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막북에 가서 소 꿈 지구에서 십 년 살아 보니 개나리가 묻다 발소리 흰 것들이 녹는 시간 수도꼭지 교체사 마른 꽃 벌레 초식동물 빵은 괴롭다 고구마 저물녘 낙법 피닉스 계면활성제 바래다 줄게 뒤 공책 그대여 고독한 골목에 안개의 시간 고인 베를린 2부 밤새 우는 아기를 안은 창백하고 질긴 얼굴 뱀이 되려 했어 기일 몽골에서 쓰는 편지 서 있는 사람 소금쟁이 햇볕의 구멍 원더우먼 윤채선 시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 커튼콜 섬의 비망록 살아 있는, 유령들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새 얼굴의 노래 나무숟가락 밤 택시 소실점 오늘 내게 제일 힘든 일은 파도의 기분 데리러 온다는 말 스물다섯 비망록 파도의 일과 뼈 심부름 민박 3부 왜 아직 거기에 있는 걸까 붉은 노을은 몽유도원 검은 개와 눈이 마주친 순간 폐역, 수레국화 옆에서 스팸의 하루 목련꽃 필 때의 일 치마의 원주율 호수 경전 요한의원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 잔 통영 가족력 마카롱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드들강 1 판 낙안댁 고양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 절 비를 틀어 놓고 터널 반달 우리가 모여서 우리들 가장 희미해진 사람 4부 한 발 나갔다가 두 발 물러서는 사랑 두절 가자미 마감 시간 풍경 벌레 마스크팩의 여유 뒤로 나아가는 그대의 앉은 자리에 내가 앉아 있고 좁교가 간다 머그샷 엄마는 꽃등을 달고 가파도 꽃멸치 흠이라는 집 아버지는 뭐 하시니 신년 계획 추격 광안리 1 소낙비와 사과꽃과 옥수수 대궁 허공은 힘이 세다 아궁이였음 좋겠네 미역 한 타래 고양이를 기다리는 저녁 개밥바라기 쉿 견인 발문 걷는사람과 걷는 사람들 - 송진권(시인) |
김해자의 다른 상품
|
도리깨질하는 앞에 서서 고개만 까딱거려도
수월하다는 앞집 임영자 씨 말 듣고 저짝에서 하나 넘기고 이짝에서 하나 제치고 둘이 하면 힘든지도 모르고 잘 넘어간다는 아랫집 맹대열 씨 말 듣고 쌀방아 보리방아 매기미질도 둘이서 셋이서 하면 재미나대서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양승분 씨 밭에 가서 가만히 서 있다 콩 터는 옆에 앉아 껍데기 골라냈다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콩알을 줍기도 했다 심지도 않은 땅콩 한 소쿠리 얻었다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 「김해자,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중에서 어린 감나무가 있던 집 애기업개로 살다 간 삼양 고모는 열여섯 살이었어 삽사리문고 읽다 까무룩 잠들면 수천 년이 흘렀던 거야 옛이야기 속 누이는 다 슬픈 건지 솜이불 다독이는 소리 낮아졌지 비키니 옷장 속에 숨어 얼굴을 묻으면 라디오 소리가 더 잘 들렸어 엄마 키만 한 기타를 갖고 싶었어 이름난 별자리 옆에는 탁아소가 성행이었고, --- 「현택훈, 지구에서 십 년 살아 보니」 중에서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또 누군가는 남아 견뎌야 하는 시간 우리 앞에 아주 짧은 햇빛이 놓여 있었네 바닥에 흩어진 빛들을 긁어모아 당신의 빈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이미 어둠이 스며든 말은 꺼내지 않았네 --- 「길상호, 저물녘」 중에서 너와 함께 뱀이 되려 했어 (…중략…) 침묵으로 된 길고 긴 사랑 이야기를 너와 함께 써 보려 했어 한 벌뿐인 드레스를 고목나무에 걸어 놓고 못 찾는 짐승으로 남으려 했어 백 년 동안 계속되는 게으른 신혼을 너와 함께 맞으려 했어 --- 「김개미, 뱀이 되려 했어」 중에서 문득 내 옆자리에 누운 풀을 보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누웠다 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도 외롭고 무덤도 외롭고 무덤에 내린 햇볕도 외롭고 문인석도 상석도 외로워 얼어 있었습니다 햇볕과 무덤이 서로를 껴안고 잠들었겠지요 햇볕이 구멍을 열고 무덤을 꺼내 안았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갈 곳이 없습니다 저 멀리 날아가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 내 살림이 담겼습니다 --- 「김점용, 햇볕의 구멍」 중에서 나의 엄마는 여전히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약을 먹고 밥을 하고 냉이를 캐고 약을 먹고 콩을 고르다가 밥때를 놓쳐서 아버지에게 된통 혼쭐이 나고 돌아앉아서 약을 먹고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끙끙 앓으며 잠을 잔다 무릎과 입 안에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긴 했는데 별 효과가 없다 전동으로 움직이는 슈퍼카를 구입했지만 슈퍼맨을 만나기는커녕 평생 웬수 아버지와 산다 린다 카터는 은퇴를 선택했지만 엄마는 아직도 우리의 원더우먼, 쭈그렁 가슴이 무너져 내려도 별무늬 몸뻬를 입고 혼절한다 --- 「피재현, 원더우먼 윤채선」 중에서 우리에겐 저마다 어떤 병이 있고 대신 문병 가는 이웃이 있고 대신 병 치르는 사람이 있고 대신 밥 차리는 여인이 있고 대신 뼈를 사 오는 가녀린 아이가 있다 나는 누구의 대신일까 누가 나 대신 황야를 걸어 노을 속으로 심부름 갔을까 누군가 대신 들고 온 양동이 속엔 핏물 머금은 뼈다귀들이 울음도 없이 --- 「김안녕, 뼈 심부름」 중에서 해 뜨지 않는 날이 백 일간 지속된다면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비가 오면 심장까지 축축하게 젖도록 시를 읽을 것이다 도둑인 줄 알았다고 누군가 실없는 농을 걸어 오면 나는 벌써 시를 이만큼이나 훔쳤다고 쌓아 둔 시집을 보여 줄 것이다 (…중략…) 그렇게 시를 읽다가 살구꽃 터지는 날을 골라 내 눈에도 환장하게 핏줄 터지고 말 것이다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에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 「문신,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 중에서 정신 승리를 거듭하다가 몸은 패배하는 우리들 백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우리들 용기가 없는 사람은 괜찮지만 약한 사람은 불편한 우리들 진작에 말하지 않아서 언제나 준비가 안 된 우리들 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바람에 흩날리는 우리들 잠시 동안 혼자가 아닌 것처럼, 우리들 --- 「원보람, 우리가 모여서 우리들」 중에서 나는, 물 같은 시를 쓰고 있는가, 물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가, 여름을 이루는 단단한 순간들을 나열하는 사람인가, 서열을 가르는 사람인가, 늪에 빠진 왼발을 위해 기꺼이 오른발마저 빠지는가, 아름다운 것을 가리킬 줄 아는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있는가, (…중략…) 불에 그을린 냄비처럼 생활이 묻어 있는가, 뒤집힌 양말처럼 다시 뒤집을 혁명이 있는가, 나는, 시를 쓰면서, 귀와 눈과 코와 입술이 뚜렷한 입체적 사랑과 구체적 결말을 예견하는가, 이 모든 눈송이를 뭉쳐 질문처럼 던질 수 있는가, 나는 --- 「하기정, 뒤로 나아가는」 중에서 상처라는 말보다는 흠집이란 말이 더 아늑하다 마음에, 누가 허락도 없이 집 한 채 지어 놓고 간 날은 종일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홀로 아득해진다 --- 「권상진, 흠이라는 집」 중에서 낯선 방에서 서로가 가져온 짐을 펼쳤다 어떤 건 쓰임새가 겹치고 어떤 건 생소했다 그가 가져온 치약을 칫솔에 담뿍 짜 주었다 한번 써 보라는 말에 정말 한 번인 것처럼 오래 이를 닦았다 (…중략…) 저녁 바다에 수만 개의 검은 보자기들이 출렁였다 나는 날이 환해질 때까지 보자기 하나하나를 집어서 우리가 가 보기로 한 산책길과 헌책방, 카페와 밥집 들을 덮었다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꼭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루를 살고 우리는 광안리에서 죽었다 --- 「강나무, 광안리 1」 중에서 사람의 입은 무덤, 말을 많이 한 날 나는 내가 죽은 것 같았다 --- 「함기석, 쉿」 중에서 |
|
시인의 말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걷는 사람이 아닌가. 영혼에 걸린 바늘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시인인 거 아닌가. 아픔을 견디면서 걸어가는 고독한 순례자처럼 우리는 간다. 지워져 가고 있는 발자국 위에 또 다른 발자국을 남기고 간다. 이 발자국도 언젠가는 지워지겠지만, 앞서간 발자국들이 끝나는 지점에서 어쩔 수 없이 우왕좌왕하겠지만 숙명인 듯 묵묵히 또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견뎌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이전부터 견딤을 학습했던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견딘다. 입술을 악물고 우리는 간다. 우리가 꾸는 꿈이 비록 상처가 있거나 피가 묻었더라도 우리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시류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히 해 가는 좋은 시인들과 시를 재발굴하여 독자들과 보다 가까이에서 소통하고자 함은 ‘걷는사람’의 모토다. 100호 기념 시집을 내며 다시 한 번 이 말을 새기고 처음 비롯된 발원지의 물을 생각한다. 그 아무것도 아니었던 물줄기 하나가 마을을 만들고 길과 사람 사는 마을을 만들고 도시를 만들었듯 처음의 마음을 세워 나가서 도랑과 실개천과 시냇물을 품고 흘러 한국시의 도저하고 장대한 큰 강물로 흘러 바다에 닿으리라 믿는다. - 송진권 시인 발문 「걷는사람과 걷는 사람들」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