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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새빌오름
산지등대
문득, 선인장
비학동산에서의 일
어머니의 은반지
자리왓 폭낭
엉겅퀴 소녀
바리데기의 시간
풀벌레들의 힘으로
안개 주의보
메밀
떫은 여름
숲을 잃어버린 아이
이끼

2부
북받친밭
웡이자랑
우무
그날, 북촌리
서흘개
해녀들
밤배
사슴이 온다
볼레
백조일손지묘
낸시빌레
태풍의 눈
새를 주세요
뇌선
이녁에게

3부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
마리안느와 마가렛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남생이못
남방큰돌고래가 물살을 가를 때
조난
목성아파트
의자가 있는 풍경
연북정
옛 한림성당 종탑
아살람

4부
빅토리야 로시나
소금물로 쓴 시
나크바의 돌
에지디
벽돌 공장의 아이들
부르카
게르니카
기념일
고사리 장마
사슬
슬픈 유산
별도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문장을 쓰네

해설
‘사이’를 기입하는 가장 구체적인 문장
-황유지(문학평론가)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7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125*200*20mm
ISBN13
9791175010949

책 속으로

물풀 속 숨어든 오랜 신발 한쪽 들춰내듯
반대편 바다에서 하루를 다 보낸 어머니도
언젠가는 해묵은 이름처럼 이곳에 다녀갈까요
잠시 쉬어도 좋을 능선에 앉아
거칠한 당신의 손, 쓸어 드릴 수 있을까요
헤아릴 수 없는 심정으로 돋아난 작은 꽃들이
발아래 넘실댑니다
뭐든 겪은 모습으로만 판단하며 살아온 날이기에
잡초라는 말 어둡지도 억울하지도 않다는
독백조차 벨칸토 창법으로 이어지는 밤입니다
고독한 아리아가 이 섬을 감싸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현관문을 잠그지 못하고 열어 두겠지요
---「새빌오름」중에서
박물관에 머무는 동안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 위로 피어오르는
작은 불꽃을 보았다
누군가는 유령이 피워 놓은 불이라 하고
누군가는 잊지 말라는 미래의 표징이라 했다
뜨거웠을까
무서웠을까
햇볕에 바랜 해골들, 죽어서도 혁명의 격문을 쓰는
뜨거운 모래 속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누군가의 지문
(중략)
흑백 사진 속 해녀들,
쉬이 꺼지지 않을 물속의 불덩어리들
---「해녀들」중에서
여자가 안경 너머 한 방향을 응시할 때
나는 부러진 나뭇가지로
잠시 허공에 길을 낸다
이마가 쓸리기 전
무릎이 꺾인 꽃이
조용한 오후였던 야생화의 얼굴로 발견된다
계획과 무계획처럼 시간의 정확성을 가진 말들은
강아지풀의 속수무책 간지럼에도
근엄한 자세를 참을 수 있을까
(중략)
표정의 깊은 골마다 새겨진
푸르고 때론 붉은 섬광들
최초의 로사 파크스처럼
들판의 혁명가로 피어나는 밤의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중에서
모든 이름을 지우려 하네
내가 아는 해변의 이름도
가 보고 싶었던 나라도 그곳의 안부를 살고 있는 사람도
백비는 너무 많은 죽음으로 붐비네
시장기 가득한 얼굴로
날다가 착지하기를 반복하는 새들
나의 죽음은 작고 손쉬워라
(중략)
불멸의 이름도 먼 훗날의 이름도 아닌
당신의 원형,
가슴 속에 파묻힌 이름을 꺼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문장을 쓰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문장을 쓰네」중에서

출판사 리뷰

“가슴 속에 파묻힌 이름을 꺼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문장을 쓰네”

사이에 선 목격자의 문장
제주에서 세계로 가닿는 이름들

고주희 시인의 신작 시집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가 걷는사람 시인선 156번으로 출간되었다.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의 시적 배경은 제주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출발해 국경 밖으로 뻗어 나간다. 4·3 이후 턱을 잃은 채 평생을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문패, 443명의 이름이 뭉뚱그려진 위령제 명단, 여태 아무 글자도 새기지 못한 백비 앞에서 시인은 공적 언어에서 지워진 이름을 하나씩 되찾아 적는다. 그 시선은 이내 섬 바깥으로 건너가 흑인 전용 칸을 거부한 로사 파크스, 소록도에서 한센인의 곁을 지킨 마리안느와 마가렛, 나크바를 겪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부르카를 쓴 여성, 벽돌 공장의 아이들에게까지 가닿는다.

억울하게 스러져 간 이름의 후손들은
원치 않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으로
먼지처럼 떠돌다

잃어버린 마을과 사람, 고적한 나무와
새들의 쟁쟁한 울음이 새겨진 각명비에
저마다의 누옥 한 채 지었네

보이지 않는 잿더미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이 땅의
용암 같은 사람들
-「자리왓 폭낭」 부분

제주에서 태어난 고주희 시인은 제주를 자신이 대신 말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 풀과 벌레(「새빌오름」), 젖은 이끼(「이끼」), 바다를 오가는 어머니들의 숨(「어머니의 은반지」)을 증인이자 목격자로 세운다. 시인은 제주의 타자성을 시의 타자성으로 손쉽게 번역하지 않고 목격자로서 제주를 호출한다. 짓밟혀도 피어나는 '야생화' 같은 미약한 존재들의 숨결과, 이에 저항하는 '혁명가'의 열정을 오가며 침묵 당한 이름들의 역사를 담담히 써 내려간다.

시인의 말

부디, 제주 땅 모든 만물에 잠시 위로이기를 바랍니다.

2026년 여름
고주희

추천평

제주도의 땅과 하늘, 바람에는 피와 비명이, 고통과 상처가 각인되어 있다. 반세기를 훌쩍 넘어가지만 학살의 간접적인 피해자와 유족 들의 기억에 그것은 생생한 오늘의 일이다. 꽃이 피고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어도 그것은 막막한 ‘절벽’으로 다가온다. 온전히 되살리기에는 그 참혹한 기억이 살을 후비고, 아득한 시간의 잿더미에 갇혀 있기에 끝이 없기 때문이다.

고주희 시인은 막막한 절벽 같은 그날과 그 이후의 시간들을 시에 ‘받아 적는다.’ 받아 적는다는 것은 대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목소리와 몸부림을 몸으로 껴안는 것이며 한 자 한 자 그 대상에 되돌려 주는 일이다. “저는 뒤척이는 오름과 바다를 오가는/당신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받아 적습니다”(「새빌오름」).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밤새 뒤척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그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이름”들을 자신의 몸에 새긴 사람이 있었다. “묵묵히 견딘 것들이/묵묵한 태양 아래 서 있었지”(「문득, 선인장」). 4·3 제주에서 일어난 일은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지만 그만큼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기에 역사 인식 자체의 아포리아, 즉 사실과 진실 사이의 불일치, 입증과 이해 사이의 불일치에 놓여 있다. 그러한 불일치를 생존자들이 말로 남긴 기록과 몸에 새긴 상처로 살려 내는 고주희의 시들은 절룩거리는 언어들과 유려한 비유를 동시에 거느린다.

온전한 정신으로는 읽을 수도 없는 것을 맨눈과 맨몸으로 감당했던 희생자와 유족의 기록을 시적 형식으로 받아 적는 일은 그 체감적 고통을 순화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단편적 사실들의 조합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고, 학살의 현장과 그로 인한 후유증은 비유적 대상에 의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붉게 덧칠 당한 한라산엔/이 악문 채 비명 삼킨 돌과 나무들”(「자리왓 폭낭」). 검은 벌집 같은 집 한 채, 팽나무, 억새와 순비기꽃, 엉겅퀴 등 그 모든 자연물들에 깃든 ‘어둠’을 길어 올리는 시적 작업은 그것들을 굳은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가만히 입술을 대어 보고 간절한 입김을 불어 넣는 일이다.
- 신철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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