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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이파리 끝에 매달린 고개 숙인 소리들
억새 폭포에게 바다를 그리다 별똥별 스무디한 계절 유리 사랑 티 포트 이별 버스 파 마른 호수 취한 나비 얼음 정수기 싱글 탈출 카페 키보드 돋보기에게 눈빛의 시대 2부 접었던 나를 펴다 라바콘 수행 반사경의 범위 탁발 매트리스 반성 진공청소기 매미 물음 달력을 훔쳐보다 딱풀 빈 병 바나나 숙성 자율 검문소 돌꽃 거울에 비친 등 도둑고양이의 미래 폐선의 기울기 3부 비 오는 날 누군가를 기다렸다 깃발 배롱꽃 농다리 오래된 알레르기 이끼 나는 남자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내 다이얼을 누른다 투명한 우산 실제 상황 곶감 속에 영감이 있다 지우개 한쪽으로 기우는 안테나 놓고 가시오 날지 못하는 새 장미 타투 4부 바다를 잡고 있어도 파도는 치지 않았다 피튜니아 스타필드 브런치 빅브라더 딱딱한 책 소리에 물들다 떨어진 새 해일 계단 모형 꽃게 움직이는 집 세계의 맥주를 집다 허공에 집짓기 휘어진 뒤란 철쭉꽃 인턴 워싱턴 야자수 5부 늘어진 그림자가 외벽에 기대어 있다 에어라이트 점핑 마른 수첩 공 신세한도 팽성 강가에서 계단이 가득했다 플라스틱 텃밭 명함 섬초 발소리의 크기 거리로 나온 복권 찢어진 벽보 다리 달린 안경 폴리스 라인 나를 위탁합니다 해설 항구적 법칙과 형식의 무게 -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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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말 찾지 못해 휘청이는 내 얼굴
싸늘한 기억들을 바람에 맡겨 놓고 슬픔을 채워 넣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떠나간 발자국이 차갑게 녹아든다 젖은 잎 출렁여도 손짓은 가벼워져 이파리 끝에 매달린 고개 숙인 소리들 --- 「억새」 중에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문장은 도망갔다 멀어진 너를 보며 아픔을 읽어 낼 때 얼룩진 시간 앞에서 서성이는 눈동자 상처 입은 종이 위를 촉촉하게 걷는다 한 마리 낙타가 모래바람 뚫는 것처럼 물결친 너의 두 눈을 되짚으며 찾는다 --- 「돋보기에게」 중에서 온전한 얼굴은 이곳에선 금물입니다 지금은 눈빛의 시대 서로를 살피세요 불신이 팽배하군요 입들을 가리세요 떠다니는 소리를 붙잡지 마세요 입술은 총알이 되어 우리를 겨눠요 미소가 궁금하군요 식사 한 끼 할까요 --- 「눈빛의 시대」 중에서 걸음을 멈추어도 물소리는 흘렀다 넓적한 등 내주며 견디어 온 돌의 시간 시절을 탓하지 않고 우리 앞에 서 있다 천년을 쥐고서도 변함없는 노래 물결 내 앞을 파고들 때 휘날리는 물방울 담담히 눈앞에 부서져 하얗게 피어난다 --- 「농다리」 중에서 중심에 서지 못하는 건 헐렁하게 살아온 일 소리 없이 낡아가 환절기를 꺼내 봐도 묵은내 끌어안는다 언제나 공손하게 계절을 눌러쓰면 낯빛이 감춰질지 휘청이는 몸을 세워 텅 빈 공간 더듬어 외롭게 위탁합니다 벗어 놓은 내 이름 --- 「나를 위탁합니다」 중에서 발길질에 차여도 깨질 일 없다는데 출렁이던 마음까지 떼어 내지 못해서 잘라져 토막 난 빈 병 재활용을 찾는다 오늘을 도려내면 내일을 꽃피울까 속 비운 얇은 몸에 흙을 채워 넣는다 흐린 날 뒤로 젖히며 텃밭을 키운다 --- 「플라스틱 텃밭」 중에서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다른 길을 약속했다 어둡고 외진 곳 등불을 밝히겠다고 새벽은 곁에 있는데 상처는 깊고 깊다 찢어진 얼굴들이 거리를 붙잡는다 물러서지 않는 벽과 뜯어지지 않는 몸 억지로 잡아당길 때 소문만 남는다 흩어져 남아 있는 기분을 떼어 낼 때 발밑으로 떨어진 슬픔의 조각들 저마다 절망을 들고 쓴웃음만 서성인다 --- 「찢어진 벽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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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거울부터 살핀다
단단히 나를 담았는지 표정을 벗는다는 건 여전히 낯설다 따뜻한 미소가 그립다 2025년 겨울 정병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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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삼은 삶의 면면을 짚는 시선이 찬찬하다. 세간의 낮은 곳이나 그늘진 구석을 살피는 마음이 묵묵하면서도 다감하다. 삶의 고샅에 이끼처럼 끼어 견디는 존재들의 고독에도 남다른 기울임을 보여 준다. 세상의 변방이나 바닥을 버텨 가는 주변인들의 안팎을 챙겨 읽는 관심이 현장성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 시조들은 크게 현실적인 선과 서정적인 선의 직조로 나뉜다. 우리네 현실의 다양한 질곡에 걸음을 더하는가 하면, 그 안팎의 육화에도 서정적 금선을 잊지 않는 게다. 사회적 그늘을 다루는 작품 중에는 등단작 「폴리스 라인」이 압권이다. “작업화를 신은 채 화단에 쓰러져 있”는 사내의 건조한 묘사를 통해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한 노동자의 죽음이 환기하는 현실은 “문마다 빗발친 민원 등허리가 시리다”(「투명한 우산」)는 공직자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링거를 맞고 있”는 우리 주변 “쇠락한 도시”(「피튜니아」)에서 겪는 나날의 분투에 대한 여일한 관찰이 보다 구체적인 현실성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정형의 서정성과 노래성에 대한 모색은 「농다리」 같은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자연에 맞게 놓인 “농다리”가 오랫동안 함께한 삶을 정형의 가락에 집약하며 오래된 곡선의 아름다움도 찾는다. 특히 “넓적한 등 내주며 견디어 온 돌의 시간”에서 얻는 “천년을 쥐고서도 변함없는 노래 물결”은 시조의 본래 면목을 일깨운다. 오는 물결 순순히 보내되 사람(삶)도 선선히 건네며 “천년”을 무위자연 넘어온 농다리의 선율. 그 면면한 품에 맞춤한 노래가 전통을 오늘에 살려 가는 시조의 초상인 양 선연하다. 정병삼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정형에 잘 담는 길을 묻는다. 고시조부터 삶의 투영이 많았듯, 세상에 치이는 삶들을 더 삶답게 하는 노래를 구하는 모색이겠다. 그런 지향의 첫 시집에서 이후의 시적 걸음이 한층 깊고 넓어질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 정수자 (시조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