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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구워 낸 여름들은 유행가가 되고
유수진
걷는사람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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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누군가 오랫동안 너를 훔쳐보았구나
피아노
열아홉
저녁의 집
신발의 질문
동그란 사람들
프랑스 사람들
도드라진 사람
오해
저녁의 꼬리

2부 깼다고 생각하는 꿈에서
엉덩이 눈
당나귀 속엔 몇 마리나 되는 당나귀가 들었을까
발목만 남았네
염소 방목장
허겁지겁
양띠
해류도 슬픔

구겨진 거미들
발을 만졌다고 했다

3부 누워서 하는 생각은 멀리도 간다
돌부리
폭포
경사

검은 단어
자리왓
섯알오름
발끝의 사례
법랑
누워서 하는 생각은 멀리도 간다

4부 이제 누구의 건너편이 될 수 있지
독신의 나날들
혼잣말
등장인물, 그 밖의 인물
종소리 하나
옆모습
그 혐의에 질문도 포함됩니까
접어 둔 창문이 네 개
건전지
안녕, 나선
치약

5부 최고의 속도는 어쩌면 멈칫
빈말
심부름 중입니다
개양귀비와 동갑
식물의 말투
여름에 부엌
꽃씨는 언제 꽃을 설계할까
뱉은 씨앗
거기까지도 좋지만 여기까지도 좋아요
사과나무 아래서
뾰족한 소용

해설
근원적 세계에 대한 역설의 희망
—유성호(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2015년 《시문학》 신인우수작품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으며 제10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4·3 표류기』 『선택받는 글쓰기』 『태양의 사랑』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너도 예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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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178g | 125*200*20mm
ISBN13
9791175010710

책 속으로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불화
세상일은 늘 이런 식이지.
벽을 등지고 나서야 소리를 터트리지.
낮과 밤이 서로의 깃발을 펼치면
펄럭이는 마음으로 양말의 목을 밤까지 당겨 올린다.
아마도 옆집은 손잡이를 당기는 심정으로
벽과 벽의 경계에 불행을 버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어느 방에도 던지지 못할 것들
넘치는 불행을 벽에 던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벽을 등지지 않아도
벽에 기대지 않아도
눈을 감고도
흰색과
검은색 소리를 구분할 줄 알아서
벽 너머에 있는 피아노를
동의도 구하지 않고 흥얼흥얼
따라 부르곤 한다.
--- 「피아노」 중에서

순진한 경사도라니
그래서 잊히기도 딱 좋은 경사도들이
제주에는 많다

제주에는 그런 경사도가 일 년의 날수만큼이어서
매일을 올라야 한 해가 지나가는 사람들
밤마다 꿈의 안과 밖을 헤매고
또 달아나느라
숨느라
여전히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들

아침이면
어느 중턱,
가락지나물이나
노랗게 멍든 꽃으로 피었다
--- 「경사」 중에서

붉은 노을 속으로 잠긴 마을
파란 하늘 속으로 수장된 마을
연기로 뿔뿔이 흩어진 마을이 있다
근처 땅을 파면 아직도 녹슨 주소들이 나온다는데
이쯤에서 저쯤 사이로 집이 있던 사람들은
이쯤이나 저쯤으로 없어졌다

그 마을에는 삼거리가 아닌 삼거리가 있고
길이 계속되는데 길이 없어진 어느 날이 있다
여기저기 긁히고 파인 마룻바닥엔
먼지 쌓인 나무 제기가 굴러다닌다
놋숟가락엔 검은 도새기의 눈망울 같은 고요가
집 안팎을 가득 채우고 마을로 흘러넘친다
눈 쌓인 밭 아래로 온기를 모아 두었다
해마다 잎사귀가 피고 또 말라 부서지는 집터는
지슬 밭이 되었다
--- 「자리왓」 중에서

서서 하는 생각은 걸어가거나 뛰어갈 뿐이지만
누워서 하는 생각은 시공을 건넌다.
다리도 아프지 않고 숨도 차지 않는다.

(중략)

거꾸로 걸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뒷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타고 카드 단말기에 교통 카드를 거꾸로 긁는다. 꽃가게 앞문을 거꾸로 나와서 손에 꽃다발을 쥔 채 거꾸로 지구를 걷는다. 겨울에서 딴 빨간 사과를 크게 베어 문 입 언저리로 무더운 여름으로 꽃 피는 봄으로 별자리를 헤아리는 밤으로 노을의 한 줄로 아침으로 해가 높은 정오로 신석기를 지나 말랑말랑한 발자국 속 밀물로 꽃이 이름을 갖기 전으로 찰나의 한 점으로

누워서 하는 생각은 참 멀리도 간다.
--- 「누워서 하는 생각은 멀리도 간다」 중에서

여름 접시들을 꺼내 식탁에 펼치면 가을벌레들 소리가 뛰어온다.
여름 칼은 싱거운 맛을 볼 줄 알게 되었다.
여름에 깨지는 접시에선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의 끝, 푸른 넝쿨들
오전과 오후 사이에 매듭 하나 만든다 싶더니
어느새 한 뼘을 만든다.
이러니 여름은 못 믿을 계절, 시시때때로 변하는 짐승.

매듭 하나 넣은 건 그래, 눈 감아 줄게.
--- 「여름에 부엌」 중에서

우리가 조급한 건 내가 나에게 뒤처져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오늘이라는 날에는 사백 미터 트랙이 몇 개나 들었나.

사람들이 속도를 알아챈 건 사냥감을 쫓으면서라고 들었다.
임종을 앞둔 엄마는 속도보다 빨리 와 버렸다고 너무 조급했다고 아쉬워했다.

나에게 맞는 속도는 애초에 없는 일
정해진 길이를 두고 다투는 경기
전력 질주하는 트랙, 떨어뜨린 바통들, 실격들

(중략)

오늘은 레몬처럼 시큼한 속도
내일은 사과처럼 아삭한 속도

최고의 속도는 어쩌면 멈칫
지구가 멈칫거릴 때여서
사과꽃이 시들고
사과가 달린다.

--- 「사과나무 아래서」 중에서

출판사 리뷰

걷는사람 시인선 151
유수진 시집 『잘 구워 낸 여름들은 유행가가 되고』 출간

“말랑말랑한 발자국 속 밀물로
꽃이 이름을 갖기 전으로 찰나의 한 점으로”

사라지는 존재들의 곁을 지키는
사물의 언어와 역설의 희망


제10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한 유수진 시인의 첫 시집 『잘 구워 낸 여름들은 유행가가 되고』가 걷는사람 시인선 151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5부에 걸쳐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매개로 존재의 조건을 탐색하는 시편들을 선보인다. 해류를 떠도는 오리, 언덕을 오르는 당나귀, 화덕에서 구워 낸 계절, 녹슨 못과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들은 비극적인 현실을 과장 없이 비춘다. 관념을 설명하는 대신 대상의 물성과 움직임을 따라 사유를 전개하는 시들은 사물을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다룬다. “씨앗은 마르는 동안 꽃을 설계한다”(「꽃씨는 언제 꽃을 설계할까」), “최고의 속도는 어쩌면 멈칫”(「사과나무 아래서」)과 같은 구절은 사물들의 고유한 속도와 리듬을 포착해 존재의 이면을 비스듬히 드러낸다.

순진한 경사도라니
그래서 잊히기도 딱 좋은 경사도들이
제주에는 많다

(중략)

밤마다 꿈의 안과 밖을 헤매고
또 달아나느라
숨느라
여전히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들
─「경사」 부분

『잘 구워 낸 여름들은 유행가가 되고』의 또 다른 특징은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경사」, 「귤」 등의 작품에서 시인은 제주 4·3을 경사도, 귤, 녹슨 사물과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접근한다. 이러한 방식은 사건을 현재의 감각으로 환기시키며, 지나온 기억과 망각의 층위를 드러낸다. “잊히기도 딱 좋은 경사도”라는 표현은 망각의 구조를 시적 형식으로 포착한 사례다. 폐허가 된 마을이나 남겨진 물건들을 통해 역사를 환기하는 서술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유수진의 시는 짧고 압축적인 시편과 산문적 호흡의 긴 시편을 오가며 다양한 리듬을 만든다. 「뾰족한 소용」, 「돌부리」처럼 세계를 응축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엉덩이 눈」, 「당나귀 속엔 몇 마리나 되는 당나귀가 들었을까」처럼 긴 호흡으로 사유를 확장하는 시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다양한 정서와 형식을 균형 있게 담아낸 이번 시집은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깊고 다정한 유행가가 되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것이다.

시인의 말

동그란 사람

두 나무토막 사이에 피는
엄지손가락만 한

불꽃처럼

당신과 나 사이에 피는
엄지손톱만 한

시처럼
2026년 5월
유수진

추천평

유수진 시인은 여름을 굽고 익고 치대고 보고 열고 닫으며 노래가 될 때까지 계절의 감각에 귀 기울인다. 모든 빛들이 저녁이면 스러지는 것처럼 시인의 눈길도 저녁의 집으로 향하고 저녁과 골목의 꼬리에 대해 사유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이다. 시공간은 소리의 감각을 찾으면서 열아홉의 시간을 떠올리는 기억술을 보여 준다. 유수진의 유행가는 상처를 깨닫는 시간에서 태어난다. 기억은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불화”(「피아노」)에 가깝지만 그것으로 하여금 상흔의 존재가 의미일 수 있다는 이치를 전해준다. 모닥불의 원형圓形 이미지는 “씨앗은 마르는 동안 꽃을 설계”(「꽃씨는 언제 꽃을 설계할까」)하는 생장의 원리를 원형原型의 이미지로 전달한다. 시인이 비유한 다양한 동물의 생태와 풍습은 우리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다. 엉덩이에 그려 넣은 눈을 회피하는 사자, 짐을 지고 언덕을 오르는 당나귀, 비탈과 함께 하는 염소, 굶주린 개, 기르면서 뭉치는 양, 새장 속의 새, 빈손에 있던 거미, 자신의 뱃속을 바닥까지 보여 준 소 등은 결국 인간의 허위와 폭력을 상징하는 서사이다. 유수진은 씨앗과 나무와 열매를 통해 식물의 말투를 받아쓰는 시인이다. “최고의 속도는 어쩌면 멈칫”(「사과나무 아래서」)이라는 속삭임처럼. 그것으로 하여금 “당신과 나 사이에 피는/엄지손톱만 한” 시가 우리의 마음을 오래 불 지필 것이다. 우리가 “동그란 사람”(시인의 말)이 될 때까지. - 이재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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