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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

폐쇄 병동
난 좀 어지러운데
망고 우드 슬랩
아름다워라
잠의 풀밭
까마귀 숲
연어와 에프킬라
알코올 냄새
스콜성 폭우
야전 침대
근성
대방광불화엄경
회전목마
도서관 마당

2부 끝을 배우고 싶은데



블루
나무 아래 벤치
우리 비행기
부재중 전화
실수
호두알이 부딪친다
던지는 사람
연분홍
유정란
장마
귀지 마네킹
소문
어떤 마지막은 처음 같지만
셀프 페인팅

3부 내가 모래알인데요


갠지스강의 모래알
출근길
아침 거미
깜빡깜빡
물고기가 있는 풍경
반지하
둥글다는 믿음
관악기

이유
티타임
도망
고시원
장미

4부 죽은 자의 눈 위에 손바닥을 대면


물의 문
충혈
까마귀
실종
스노우 볼
조우
조현
포도
장미는 아름다운가요
자연이라면 자연일 텐데
글자로 된 사람
을 것이다
강릉역 근처

해설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기록
- 김주원(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202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송순문학상 새로운시인상을 수상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40쪽 | 168g | 125*200*10mm
ISBN13
9791175010222

책 속으로

천년도 넘게 잎이 떨어지고 있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잎을 맞으며
합장하는 사람이 있다
곧 앙상해질 나무에 기대 우는 사람이 있다
돌에 돌을 얹는 사람
낙엽을 주워 책 사이에 끼우는 사람

여기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사람에게는 못 하고
나무에게 돌에게

아무도 이 나무에서 목을 매지 않았다
믿는다
--- 「아름다워라」 중에서

치우고 치워도 말라붙는 똥
무덤 아래 조상들도 거름이 되어 있을 것이다
거대한 똥 덩어리 지구에서 탈출해
새로운 행성을 똥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미래가 있다
있다고 믿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은 식지 않는다
비둘기는 마스크 줄에 발이 잘리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비둘기 발을 잘랐을지도 모른다 모르니
얼마나 좋은가 내 탓인지 아무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몰라 버려라 미래 따위
--- 「알코올 냄새」 중에서

시난고난 장미가 앓고 있다
툭, 떨어지기를 바란다 해도

뿌리로부터 배운 집착은
허공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붉게, 더 붉게 붉어지려는 악착
활기를 위해 빨간 옷만 입는 사람을 안다
붉은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자 졸다 깬 것처럼
옅은 숨을 뱉는다 졸린 눈 사이로

청력이 약한 비둘기가
피 묻은 채 도로에 놓여 있다
--- 「근성」 중에서

연분홍은 간지러운 거라고
가볍게 웃는 당신에게서 더 짙어지는 분홍
계절이 지나면 꽃이 진다지만
떨어진 꽃잎은 녹지 않아요
자동차 바퀴에, 신발 바닥에
일그러진 분홍, 분홍, 연분홍
접착제처럼 붙어 있어요
꼼짝도 못 하네요
내가 먼저 갈게요
당신이 분홍의 늪에서 손을 흔드네요
울지 말고 웃어야지요
작고 여린 분홍이 당신의 얼굴을 찢고 있네요
--- 「연분홍」 중에서

온 세상 다 지울 듯
몰아치는 눈보라

고요히 내려앉은
검은빛 하나를

어째서 흔들지 못할까
하얗게 덮지 못할까
--- 「까마귀」 중에서

글자로 된 사람이 잠을 잔다
무슨 문장이 되는 줄도 모르고
몸부림칠 때마다 글자들이 흩어진다 유령처럼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편지를 쓰고
누군가는 유서를 쓴다
누군가는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하다

축축한 글자, 흐릿한 글자, 구겨진 글자, 지친 글자, 알아볼 수 없는 글자, 글자 같지 않은 글자… 글자로 된 사람이 있다 글자로 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으려고 떨어진 글자를 줍는 사람이 있다
--- 「글자로 된 사람」 중에서

갈가리 찢어지는 문장 속에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장을 쓰고 한 장을 찢을 것이다
찢기 위해 쓰는 글은
얼마나 진실할까
한 점의 꾸밈도 없이
쫘악 쫙 찢겨 나가는

조각들을 모아 물에 적실 것이다
밀가루 풀을 섞어 바가지에 붙이면
탈이 될 것이다 탈을 쓸 것이다
진실로 만들어진 탈을 쓰고 있어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 「을 것이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오르골 가게엔 오르골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음악이 다 가냘파서
투명한 슬픔이 내릴 것 같은데

태엽 소리를 감추고

회전목마는 오르락내리락
기차는 칙칙폭폭 달려갑니다

신랑 신부는 얼마나 오래 키스하고
무희는 몇 번을 더 회전할까요?

동그라미 동그라미로 도는
부질없는 아름다움이 더없이 명랑합니다

2025년 가을
변영현

추천평

“천년도 넘게 잎이 떨어지”(「아름다워라」)는 나무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이 있다. 인간은 의탁해야 할 무언의 존재에게 합장하고, 기대고, 울고, 꿈틀거린다. 그러나 미망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잠의 풀밭」)이 든다. 변영현의 시는 울음을 삼키는 아이처럼 격렬하지만 담담하게, 폭설이 내리는 삼나무 숲을 날아가는 까마귀처럼 장엄하게, 음을 소거한 채 잔혹한 세상을 보여 준다. “꽃들이 향기를 팔아 사려는 것이/끝없는 감옥이라 하면, 좀 그런가요?”(「난 좀 어지러운데」) 무심하게 묻고 “우는 사람 앞을 지나는” 무심한 행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두 “넘어져도 모르고 떨어져도” 모른다. “하얀 보자기를 덮어쓴 사람”(「야전 침대」)들의 도시에서 시인은 “누가 죄인인지 누가 시인인지/궁금하지 않”(「난 좀 어지러운데」)다. 모두 죄인이 고 시인인 세상. “태어났으니 사는”(「회전목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팔아 시를 쓴다. 과거도 미래도,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말하며 한낱 “끝없는 동그라미 속으로” 추락하며 “누군가는 시를 쓰고/누군가는 편지를 쓰고/누군가는 유서를”(「글자로 된 사람」) 쓸 뿐이다. “뿌리로 인해 뿌리째”(「부재중 전화」) 뽑히는 은행나무를 보며 “내가 하고 싶은 건/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라 읊조리며 살기 위한 발버둥이 곧 죽음의 길을 여는 시대를 증언한다. “부딪치는 소리가 살아 있는 소리 같고/부딪치는 소리가 부서지는 소리 같”(「호두알이 부딪친다」)지만 그것이 사물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듯 시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무의미한 시대를 견디는 길은 오직 시를 쓰는 행위. “온 세상 다 지울 듯/몰아치는 눈보라”(「까마귀」) 속에서도 “고요히 내려앉은/검은빛” 한 점을 흔들지 못하듯 시를 쓰는 것만이 “멀어서, 아득히 멀어서/따스한/만년 평온”(「티타임」)에 가닿는 유일한 길이며 등불이다. - 김성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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