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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기어를 쓴 간호사들
정익진
걷는사람 202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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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수평선 너머, 그 너머를 슬퍼하며
인간의 굴레
염색의 시간
귤 향기 바람에 날리고
낙과여낙화
03동 주민 회보
어둠 속의 돌
가파른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는 돌
축, 소용돌이
로프의 모든 것
메두사
동물성 어둠
벌레 도감 1부
식물성 반란
난민들
가끔 나쁜 개들도 있다
이글루 보드카
소가죽 소파
캔, 캔 자판기
와불
망명망령

2부 나는 쫓긴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다
헤드기어를 쓴 간호사들
옥타곤 블루스
유도 소녀 미미
수구 하는 여자
근대 5종
숲이 되어 가는 남자
테니스 코트 위로 흐르는 느린 음악
시소
메트로놈
불빛 사냥
리처드 킴블을 위한 회고
트랙 위의 사람들
계주의 완성
세력들
깡통 차는 노인의 후반전

3부 액자 밖으로 흘러내린 모래 위로 풀이 돋다
파블로 따라 하기
전람회
대머리 여가수
열려라, 폴록
그림의 위치
칸딘스키 서약
데칼코마니아 소고
그림 동아리, 재즈 밴드 그리고 타로
냉장고 안, 베란다 밖
두 마리 치킨
넙치
책상
리수스 과수원
문라이트 독서회
반얀트리
불란서 문화원
당신의 바로크, 나의 로코코

4부 열한 번째 계절
수술실
떨림, 겨울
입술에 핀 꽃
농도
진단서
내일의 오늘
시계 저울
뒷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개 속의 북항대교
파타야 12월 25일
홍등
키세스, 키세스
타국의 계절

해설
쫓기는 ‘몸’의 감각과 윤리 세계로의 초대
—염선옥(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7년 계간 《시와 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구멍의 크기』 『윗몸일으키기』 『낙타 코끼리 얼룩말』 『스캣』을 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92쪽 | 228g | 125*200*20mm
ISBN13
9791175010628

책 속으로

헤드기어를 쓴다.
마우스피스를 문다.
거친 언변이 튀어 나가지 않게.
표정이 무너지지 않게.

환자의 볼이 쏙 들어가 절망이 고이면
난해한 경로를 뒤져서라도 특효약을 구해 오고
면식도 없는 신에게 다급히 전령을 띄운다.

(중략)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비로소 가드를 내린다.
헤드기어를 벗고 마우스피스도 뺀다.
화장을 고친다.
형광등이 깨진 탕비실, 유리 조각 위에 서서
문을 닫고 비로소 흐느낀다.
규칙적으로 흐느낄 시간이 필요했다.
--- 「헤드기어를 쓴 간호사들」 중에서

1학년, 나는 활자가 싫었다. 목덜미에 ‘성공’이라는 글자가 찍힌 채로 피를 빨리며 살았다. 그때부터 나는 폐기된 것들을 그렸다. 으깨어진 양배추, 파도에 구르는 공룡알의 잔해. 사람을 그리지 못했다. 구름을 보며 친구들의 태아를 떠올렸다. 내가 그린 사람은 늘 괴물에 가까웠고, 누구를 닮아 불쾌했다. 늑대의 귀를 그렸다. 상처받지 않으면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2학년이다. 선율은 실핏줄을 타고 들어왔다. 술집에서 주운 더블 베이스 하나. 뒤뚱뒤뚱, 팅팅거리는 소리가 나의 기본 리듬이 되었다. 우리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마일수’라고 부르며 웃었다. 재즈를 사랑할수록 건물들은 푸르러졌고, 이유 없이 목이 죄어 올 때도 있었지만 공기는 달콤했다. 이마로 벽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3학년, 눈 밑에서 미세한 해충들이 꿈틀거렸다. 결핍과 욕망은 좀처럼 낫지 않는 병이었다. 타로 카드를 펼칠 때마다 ‘전 재산을 몰수당한 자’가 나왔다. 우리는 기적을 원했지만 기적은 불평등했다. 패를 돌려라, 타, 타, 타.

4학년. 겨울나무의 빈 가지가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 베이스도 치지 않았다. 타로도 펼치지 않았다. 다만 오랜 시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그림 동아리, 재즈 밴드 그리고 타로」 전문
춤사위의 완성은
아무 장식 없는 담백한 몸짓일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바로크
당신은, 나의 로코코

카페를 나섭니다.

잎사귀와
꽃잎의 향기에 눈꺼풀이 떨립니다.

조르주 데 키리코풍의 적막이 흐르는 거리,
대학의 담벼락 위로
산발한 장미의 피 흘림 앞에 발길을 멈춥니다.

차량의 미등이 하나둘 켜지는
초저녁의 적요가 나를 감쌉니다.

사람들이 벗어 놓은 시간을 밟고 지나가면,
석양이 카펫처럼 깔린 서쪽 하늘,
붉게 물든 아르데코풍의 구름이 퍼져 가고 있습니다.
--- 「당신의 바로크, 나의 로코코」 중에서

꿈을 빼앗긴 채 맞이한 이 겨울,
은박 담요 속에서 불빛을 나누던 당신들,
그 눈동자 속에서 나는 계절이 옮겨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손바닥에는 아직 불씨 하나 숨 쉬고 있습니다.

눈 내리는 광화문 광장,
함박눈을 맞으며 일렁이던 은빛 고깔의 물결.
당신들은 그 안에서 서로의 이름을 묻습니다.

‘키세스 시위대’라 불리던 당신들,
그날의 열기는 이마에 뿔이 여러 개 돋은
우리의 가슴속에 식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심장 속에서 작은 북소리가 울립니다.

키세스, 키세스.
이 길을 지나, 오늘은 따뜻한 밥을 먹으러 갈까요.

--- 「키세스, 키세스」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뚜렷한 형태가 드러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지 않는다.

떨어져 나간 일부인 것들이
굴러가고 접히고 다른 일부인 것들 속으로
스며듦을 선호한다.

폐석처럼 남은 것들
이해되지 않는 동작

문장을 쓰다 잘려 나간 지점에서
흐르는 피가 시라면

2026년 여름
정익진

추천평

정익진 시인의 시에 대해 그동안 많이 언급되지 않았던 점을 얘기하고 싶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괴이하기까지 한 상상력으로, 우리가 알아 오던 사물과는 전혀 다른 면모와 성격과 맥락을 거느린 사물로 변신시키는 시적 특징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우울의 정서를 꼽고 싶다. 기존의 사물을 난도질하듯이 전혀 다른 사물로 구현하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우수에 찬 화자의 표정이 진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피에로의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만이 아니듯이, 깊은 슬픔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그의 잔혹극은 그래서 잔혹극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애써 울음을 삼킨 자의 기이한 행동과 사건은 뭐라고 명명하기 힘든 장르물이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한다. 물경 12년 만에 나오는 신작 시집에서도 이상의 특징은 변함없이 농밀하다. 엉뚱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한 상황극 속에 냅다 자신을 던져 버리는 화자의 표정은 시집을 덮고 나서도 계속 잔상을 남긴다. 웃는 것 같은데 도무지 웃는 것 같지 않은, 어찌 보면 내내 울고 있는 자의 표정이다. 그의 시가 잔혹극이나 상황극 이전에 한 편의 비애극으로 다시 읽혀야 하는 이유다. - 김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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