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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물결처럼 번져 간다
그립 썸머타임 상영관 소나무와 천사 깜짝 지난여름 하늘과 구름 휴양 귀 기울여 듣는 여름 음 소거 습관 내내 해열 2부 그렇게 희곡은 시작한다 평양냉면 먹기 미야코지마 화곡 귤의 알고리즘 한겨울에 우유 데우기 과일잼 굿나잇 모자이크 작고 넓은 방 에디슨 효과 어느 날 3부 바닥은 그림자놀이를 한다 빈티지 왼쪽 눈에 점안하세요 선반 분실 신고 지난밤 얻은 감기가 아직 목덜미에 젖어 있어요 누 캐터필러 동시다발 친구와 지하철 리버풀과 브룩스 미래에게 들 4부 여름이 쏟아져 있었다 행방 오늘내일 어제오늘 밤의 그늘은 연회석 완비 캘린더 넘기기 Φ 자작나무 껍질에서 유서가 자라난다 홀연한 숲 수몰 에즈 레스 세상의 모든 안녕 해설 우리가 보낸 한 시절을 오직 기쁨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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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달린 프로젝터를 바라보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하얀 스크린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자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엎질러진 물처럼 여름이 쏟아져 있었다 --- 「그립」 중에서 불 끄고 누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여름밤에는 자꾸 뒤척이게 되고 며칠간 뒤집어 널어도 마르지 않을 방 슬며시 이불이 둘 쪽으로 끌려간다 어둠은 포개진 너희의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 「썸머타임」 중에서 의자는 머물러 있고 우리는 반듯하게 앉아 영화가 끝나지 않길 기다린다 촛농 떨어지면 전자레인지 안에 끓어오르는 카레 몇 년째 머물러 있는 신발들 --- 「상영관」 중에서 빛이 기울었을 때, 천사는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 남겨진 소나무의 웃자란 가지 끝을 꺾어 소나무를 엉망으로 해 놓아도 천사는 머물러 있고. 분명 우리는 천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웃은 적이 있다. 창밖을 보면 모든 구름은 하나가 되고. 천사가 울기 시작할 때.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해도 언제 또 자라났는지, 울창한 소나무 가득한 여름. 입을 다문 여름은 이제 분갈이할 마음이 필요하다. 여름이 자라난다. 한번 모양이 잡힌 소나무는 그대로 계속 모양을 유지한다는데. --- 「소나무와 천사」 중에서 애인은 물었다. 냉면 그릇을 들고 한 번 더 육수를 마셨다. 오래 머금었다. 주변 사람들을 봤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하며 그것을 먹었다. 애인은 냉면의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면을 한 젓가락 크게 집어 올려 살펴보기도 했다. 나는 오이를 집어 애인의 그릇에 놓았다. 애인은 내게 면을 덜어 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것을 받아먹었다. --- 「평양냉면 먹기」 중에서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갔고 나는 너의 감은 눈을 보며 바다를 떠올렸다 미야코지마 서핑 보드를 든 나는 바다에 뛰어든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를 때 지평선과 눈이 마주친다 먼 데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 밀려오는 파도 유유히 내 몸을 지나 육지를 향해 나아간다 높은 파도에 몸을 맡기면 시간이 빛으로 변한다 나는 모든 순간이 번쩍이는 것을 본다 --- 「미야코지마」 중에서 이곳에 잠든 자 빛의 구원을 받으리. 빗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에밋은 어둠 속에서 번개의 섬광 같은 것을 보았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오오 여름이여. 우리는 여름의 무르고 달고 축축하고 검은 포도 알맹이를 나눠 먹으리. 그렇게 희곡은 시작한다. --- 「화곡」 중에서 누구나 다 그렇다고 그래 외워서 하는 사랑 말고 그래 --- 「캘린더 넘기기 Φ」 중에서 에즈 에즈 걷고 걷다 보면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숲길에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세계를 내일을 맞이하고 내 안에 당신이 움트는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 간지러워서 미소 짓게 된다 에즈 에즈 창을 투과한 빛 놓여 있는 항아리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된다 --- 「에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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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지?
외워서 하는 사랑 말고 2025년 가을 정보영 - 「시인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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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 보니까요, 오래 남는 건 거창한 일보다 그때그때 나눈 웃음, 주고받은 말, 같이 먹은 한 끼더라고요. 이 시집도 그렇습니다. 읽을 땐 잔잔하다가, 나중에 불쑥 떠올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읽다 보면 누가 생각나거나 한때의 계절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이 시집은 꼭 평양냉면 같아요. 처음엔 싱겁지만, 먹다 보면 시원해지고, 다 먹고 나서야 ‘아, 그 맛’ 하고 떠오르는 것. 사람 사이 관계도, 우리의 일상도 그렇죠. 빨래에 밴 햇볕 냄새, 여름 골목의 그림자, 창에 맺힌 빗방울, 저녁 무렵 건네는 짧은 안부 같은 것들. 사소하지만 소중한 순간들. 그게 모여 삶을 엮는 실이 되고 사랑의 기록이 됩니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낸 기억이 돌아옵니다. 오래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문득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지면 그건 시집 탓입니다. - 장항준 (각본가, 감독,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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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영의 첫 시집을 읽고 나면 결코 내가 가져 본 적 없던 지난 계절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나는 엎질러진 물처럼 쏟아진 여름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다. 하얀 병실에 누워 네가 먹고 싶다던 초콜릿 하나를 끝내 사 주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 옛 동기의 불가해한 죽음을 추억한다. 그 장면들의 미감 taste 은 연유도 모른 채 “서로의 것을 받아먹었”(「평양냉면 먹기」)던 맑은 시절의 향취이기도 하고, 오랜 시절 동안 “뒤엉켜 사랑을 나누”고 파먹다 서로를 상처 입힌 썩은 “귤”(「귤의 알고리즘」)의 내음이기도 하며, 마음이 가난하고 쓸쓸한 내가 “한입 베어 물기에 딱 알맞”은 “말캉한 자두”(「썸머타임」)와도 같은 저녁의 식감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이처럼 다채로운 감촉과 향기들로 그 시절의 풍경을 가득 채운다. 평소였다면 이만큼의 서술로 족하겠으나 어째서인지 나는 정보영의 시집을 손에서 쉽게 내려놓기 어려웠다. 추천사라는 명목 아래 시에 덧붙는 췌언들을 자꾸만 썼다 지웠다. 아마도 그것은 이 작품들을 아름다운 활자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 탓일 것이다. 그의 젊음과 병, 사랑과 이별, 좌절과 웃음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나는 그가 꾹꾹 아껴 둔 첫 발화를 실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의 이번 시집은 어디로 조문을 가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지난날과 “밤마다 몰래 눈물을 흘린”(「세상의 모든 안녕」) 슬픔의 시간들이 그 누구보다 열렬히 시를 사랑했던 한 청년의 세월과 겹쳐 유달리 아름답고 서정적인 무늬를 그리고 있다. - 조대한 (문학평론가) |